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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장 열전救國의 父子 의병장 구연영· 구정서 선생

구연영 선생은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다 한계에 부딪치자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해 의기를 불태우던 중 맏이인 구정서 선생과 함께 순국한 부자(父子)의병장이다. 선생은 1864년 경기도 광주군 실촌 지역에 세거해온 유력 가문에서 태어나 1895년 일제에 의해 을미사변이 일어어나자 전국에서 가장 먼저 경기도연합의진 이천수 창의소를 결성하고 중군장으로 활동하며 서울 진

이홍익 기자 2014. 2. 1.

구연영 선생은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다 한계에 부딪치자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해 의기를 불태우던 중 맏이인 구정서 선생과 함께 순국한 부자(父子)의병장이다.

선생은 1864년 경기도 광주군 실촌 지역에 세거해온 유력 가문에서 태어나 1895년 일제에 의해 을미사변이 일어어나자 전국에서 가장 먼저 경기도연합의진 이천수 창의소를 결성하고 중군장으로 활동하며  서울 진공을 눈앞에 두었을 정도로 성세를 크게 떨쳤다.

선생은 의진의 중군장이 되어 1896년 1월 18일 백현(이천 널고개)전투를 압승으로 이끌었다. 을미의병의 쾌거였다.

이후 원주 방면으로 이동하여 수백 명의 군사를 모은 선생은 같은 해 2월 25일 광주 이현에서 다시 모여 포군과 민병을 규합하고 광주의병과 연합하여 남한산성을 점거하였다.

선생은 이 수성전에서 중군장으로 의진의 본부가 있는 중앙을 맡아 지켰으며 관군의 공격으로 해산되기까지 한 달 동안 관군과 대치하여 여러 차례 전투를 치루었다.

선생은 남한산성에서 해산한 후 김하락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영남지방을 향해 내려갔다.

여주, 제천, 단양, 풍기, 순흥을 거쳐 안동에 이르러 영남의병과의 연합항전 방략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1896년 5월 한 달 동안 청송 감은리, 의성 수정사 등에서 수차에 걸쳐 관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896년 여름,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광주군 도척면 노곡리에 정착한 뒤 애국계몽운동을 통한 새로운 구국투쟁의 길을 모색한다.

그는 기독교에 투신한 뒤 이천에서 구국회라는 애국단체를 결성하였다.

이후 선생은 이천, 광주, 여주 등지를 돌면서 구국회를 기반으로 군중집회를 통해 일진회의 반민족 매국행위를 성토하는 등 구국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선생의 이러한 활동에는 애국단체 보안회와 대한자강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던 장남인 구정서 선생의 조력과 역할이 컸다.

그러나 선생은 일진회원의 밀고로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장남 구정서와 함께 체포되어, 1907년 8월 24일 부자가 동시에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