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삼한(三寒)으로 이름난 한풍루(寒風樓)는 2층 누각의 형태로, 아래층은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위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 누각이다. 창건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한풍루에 관한 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임란으로 소실되어 인조 24년(1646), 숙종 4년(1678), 영조 5년(1729), 정조 8년(1784)에 중수(重修)를 거듭했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불교포교당으로 사용되고, 목재가 헐어 영동군 양산면 금강변으로 옮겨져 금호루(錦湖樓)라는 편액이 걸리는 등의 아픔을 겪었고, 광복 후 한풍루복구추진위원회가 결성, 1971년 11월 원래 자리의 맞은편 지금의 위치로 이건(移建)했다.
무주(茂朱)는 북쪽으로는 충남 금산(錦山)과 충북 영동(永同), 동쪽으로는 경북 김천(金泉)과 경남 거창(居昌), 서쪽으로는 장수(長水)와 진안(鎭安)과 인접하고 있다. 무풍(茂豊)과 주계(朱溪)가 합쳐진 고을이다. 무풍현(茂豐縣)은 본래 신라의 무산현(茂山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무풍으로 고쳤다. 또한 주계현(朱溪縣)은 본래 백제의 적천현(赤川縣)으로, 고려 때 주계(朱溪)로 고쳤다. 고을의 남북으로 뻗은 소백산맥(小白山脈)을 사이에 두고 무풍은 신라에 속했고, 주계는 백제에 속했다. 조선 태종 14년(1414) 무풍현과 주계현을 합쳐 무주현(茂朱縣)으로 삼고, 현종 15년(1674)에 부(府)로 승격시켰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적상산성(赤裳山城)이 호남과 영남의 교차점에 위치하여 천험(天險)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므로 대진(大鎭)이 되어야 한다”고 하여 부(府)로 승격시키고 군량을 저장하고 군대 조련도 하게 했다. 고을의 별칭으로 무산(茂山), 적천(赤川), 단천(丹川) 등이 있다. 예로부터 “주계(朱溪)의 냇물과 산의 경치가 뛰어나게 좋다”라고 했고, “만학천봉(萬壑千峯)에 자색(紫色) 안개가 깊다”라고 했다.
무주향교(茂州鄕校) 남서쪽 남대천을 조망할 수 있는 곳에 남원의 광한루(廣寒樓), 전주의 한벽당(寒碧堂)과 함께 호남(湖南)의 삼한(三寒)으로 손꼽히는 한풍루(寒風樓)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한풍루는 객관 앞 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재(逸齋) 성임(成任)이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남긴 시가 있다. “말 한필 탄 행색(行色)이 시내 다리를 지나는데[一鞭行色過溪橋] 그림 그린 기둥과 층층한 난간은 기세도 높구나[畵棟層欄氣勢高] 궁벽한 수림에 새소리는 시끄럽다가 조용해졌는데[林僻鳥聲喧又寂]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물에 비친 그림자 멈추었다 다시 흔들리네[風微水影定還搖] 처마 앞에 오동잎은 쟁반처럼 넓적하고[簷前梧葉如盤大] 둑 위의 버들은 눈처럼 흩날리네[堤上楊花學雪飄] 눈에 가득한 청산(靑山)을 어찌 가히 저버리겠는가[滿目靑山那可負] 흥겨워 노래 읊조리며 붓을 휘두르네[興來吟詠强揮毫]”
중종 때 영의정을 역임한 노포당(老圃堂) 유순(柳洵)이 이곳에 와서 시를 남겼다. “시냇물은 맑고 얕아 장교(長橋)를 비치는데[溪流淸淺照長橋] 다리 위에 누각은 높기가 백 척은 되겠구나[橋上危樓百尺高] 산 그림자는 구름 그림자를 따라 구르고[山影相隨雲影轉] 물결 빛은 햇빛과 함께 흔들리네[波光長與日光搖] 뜰 가득히 풀빛이 깔렸는데[滿庭草色茵初展] 양쪽 언덕에 버들개지 솜털이 아직 날지를 않누나[挾岸楊花雪未飄] 저녁이 되도록 난간에 의지하니 누구와 짝을 할꼬[竟夕憑欄誰作伴] 세 잔 술의 힘을 빌어서 억지로 붓을 휘둘렀네[三盃借與强揮毫]”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인 뇌계(㵢谿) 유호인 (兪好仁)이 이곳에서 장문의 시를 읊었다. “지난 날 그대 일찍 난봉서를 하직하고[往日早辭鸞鳳署] 도문서 전별 받고 강을 건너갈 때[祖罷都門過江去] 멀리 방장산<智異山>이 하늘 높이 솟은 곳[望中方丈倚天高] 한 조각 뜬구름 어디론지 아득했네[一片浮雲杳何處] 당귀를 가득히 쥐고 정에 연연하여[滿把當歸情眷戀] 길을 가다 주계현<茂朱>을 들렸네[行行路出朱溪縣] 옛 벗은 소나무와 계수나무 숲속에 높이 누워[故人高臥松桂林] 그대와 술잔 앞에서 옛 얼굴을 다시 마주했네[解后尊前舊顔面] 그대와 나는 각기 반백 된 인생[人生半白各華顚] 등불을 다 돋우니 밤은 길도다[挑盡燈花夜如年] 난간에 털썩 앉아 새벽토록 이야기하고[頹然曲檻不知曉] 언뜻 꿈을 깨니 시내 건너 몰아오는 비바람[夢斷隔溪風雨天] 솔바람 휘부는 소리가 산골짜기 안을 움직이고[笙鍾鱗甲動萬壑] 캄캄한 밤 우렛소리 멋대로 우루릉 대네[屛翳豐隆恣飜覆] 집채 같은 물결이 쿵 쾅 쏟아져[洪濤巨浪劈張龍] 노기가 지축을 꺾을 듯도 하더니[怒氣猶將折坤軸] 마을남쪽 석양에 갈매기가 번뜩이고[村南夕照蘸鷗鷺] 구름 건너 먼 산에 하늘이 반쯤 드러나네[雲外遙岑天半露] 이윽고 물상들이 차츰 갈라져[湏臾物像漸離披] 눈에 가득 계곡과 산 모두 아름답네[滿眼溪山俱態度] 아스라한 연기 속에 만 송이 버들가지[蒼茫煙柳更萬朶] 허리를 흔들흔들 예쁘기도 하여라[嫋嫋腰支工婀娜] 이런 경치에 좋은 시가 없을 수 없어[此間不可無好吟] 그대가 절반을 내게 나눠 주었지[使君一半分輸我] 긴 휘파람 몇 소리가 바위 골짜기를 울리니[數聲長嘯振岩谷] 안개와 노을 돌아보며 다투어 아양 떨었네[煙霞顧眄爭容悅] 좌로 황학을, 우로 홍애를 부르니[左招黃鶴右洪厓] 주위 사람들이 우리를 신선이라 하겠네[傍人解道天上客] 날마다 늦도록 맑은 놀이 실컷 하니[遲回日日飽淸賞] 도처에 임금의 은혜 소방에 미치었네[到處君恩及疎放] 이로써 노래 지어 승유를 적노니[是用作歌記勝遊] 구태여 벽을 쓸고 현판을 달 것도 없으리라[不須掃壁隨銀榜]”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도사(都事)로 있을 당시 이곳에 찾아와 이곳의 풍광을 노래했다. “빈 대청 위를 걷는 신선 무리 흩어지고[步虛堂上散仙曹] 별나게 걷는 자라는 높은 누각 올라타네[別起高樓駕巨鰲] 우연히 찾아와 만난 친한 나그네[靑眼客來逢邂逅] 누각 모습 드러나니 선경에 취해 즐겁게 노네[紫霞杯亞醉遊遨] 고요한 밤 달 떠오르니 얼음 덮인 여울 장관 이루고[月當靜夜氷灘壯] 차가운 바람에 구름 흩어지니 눈 내린 산 조화롭네[風折寒雲雪岳高]”
선조 25년(1592) 왜란의 방화로 한풍루가 소실되고, 선조 32년(1599) 백호의 아우인 임환(林懽)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복원을 했으나 완공을 이루지 못하고 전임(轉任)되고, 후임 남복시(南復始) 현감에 의해 복원되었다.
무주는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가 있다. 정조가 승하한 후 실록청이 설치되자 당시 63세인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가 편수관(編修官)이 되어 “우리나라는 각 왕대(王代)마다 모두 실록(實錄)을 편찬하여 명산(名山)에 보관하였으니, 이는 후대에 증빙 자료를 남겨 역사를 고찰하는 사람이 근거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가록했다. 조선 초기 실록을 내고(內庫)인 경복궁(景福宮)의 사고(史庫)와 외고(外庫)인 전주(全州) 성주(星州) 충주(忠州)의 사고에 보관하다가, 임진왜란 뒤에는 봉화(奉化) 태백산(太白山), 평창(平昌) 오대산(五臺山), 영변(寧邊) 묘향산(妙香山), 강화(江華) 마니산(摩尼山)의 사고에 보관하였다. 그 후 다시 강화의 마니산은 강화의 정족산(鼎足山)으로, 영변의 묘향산은 무주(茂朱)의 적상산(赤裳山)으로 바뀌었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