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38朝陽閣, 태평성세(太平聖世)의 상서로움을 기약한 교남(嶠南)의 으뜸 누각

경상북도 영천시 창구동에 위치한 조양각(朝陽閣)은 진주의 촉석루(矗石樓)와 밀양의 영남루(嶺南樓)와 함께 영남지역의 3대 누각이다. 고려말 창건되어 명원루(明遠樓)라 했고, 선조 25년(1592) 때 왜란으로 소실되어 인조 15년(1637) 누각의 자리에 조양각(朝陽閣)으로 불렸다. 중수를 거듭하다가 영조 18년(1742) 서세루(瑞世樓)의 편액을 달았다.

편집부 2017. 9. 1.

경상북도 영천시 창구동에 위치한 조양각(朝陽閣)은 진주의 촉석루(矗石樓)와 밀양의 영남루(嶺南樓)와 함께 영남지역의 3대 누각이다. 고려말 창건되어 명원루(明遠樓)라 했고, 선조 25년(1592) 때 왜란으로 소실되어 인조 15년(1637) 누각의 자리에 조양각(朝陽閣)으로 불렸다. 중수를 거듭하다가 영조 18년(1742) 서세루(瑞世樓)의 편액을 달았다. 조양각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누각이다. 현재 조양각과 서세루의 편액이 걸려 있고, 누각에는 수많은 명사들의 시문과 기문이 있다.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상북도 동남부에 위치한 영천(永川)은 골벌소국(骨伐小國)이란 부족국가를 형성했다. 신라에 병합되면서 영천 지역은 절야화군(切也火郡), 신녕(新寧) 지역은 사정화현(史丁火縣)이 되었다. 경덕왕 16년(757년)에 임고(臨皐)로 고쳤고, 고려 초에 도동(道同)과 임천(臨川) 두 고을을 합쳐 영주(永州) 고울부(高鬱府)라고 고쳤다. 성종(成宗) 때 자사(刺史)를 두었다. 그 후 명종(明宗) 때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다시 승격시켜 지주사(知州事)로 삼았다. 조선 태종(太宗)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군(郡)으로 삼았다.

동쪽은 경주시와 포항시, 서쪽은 대구광역시와 경산시, 남쪽은 청도군, 북쪽은 청송군과 군위군이 인접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풍속은 평이한 것을 숭상한다’라고 했다. 고을의 별칭으로 임고(臨皐), 익양(益陽)으로 불린다. 영천향교(永川鄕校) 동남쪽 금호강 절벽에 위치한 유서 깊은 누각이 있으니 조양각(朝陽閣)으로 서세루(瑞世樓)라고도 한다.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와 함께 영남지역의 3대 누각으로 이름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객사 동남쪽에 명원루(明遠樓) 있으니, 삼면이 모두 넓고, 아래에는 큰 냇물이 있어 남쪽으로 흐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양지(永陽誌)에 의하면, 공민왕 때 부사(副使) 이용(李容)이 누각을 짓고 명원루로 명명했다. 왜란으로 소실되어 조양각(朝陽閣)으로 고쳤고, 영조 18년(1742) 중수(重修)하여 서세루라 했다.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은 기문에 누각의 유래를 기록했다. “영천은 경상도에서 아름다운 군으로서 나의 고향 대구와 멀지 않다. <中略> 진주(晉州) 촉석루(矗石樓), 안동(安東) 영호루(映湖樓), 밀양(密陽) 영남루(嶺南樓), 울산(蔚山) 대화루(大和樓), 양산(梁山) 쌍벽루(雙碧樓), 김해(金海) 연자루(燕子樓) 등은 모두 이름난 곳들인데 누각의 경치도 서로 비슷하지만 명원루가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또한 기문에 누각의 이름삼은 뜻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내 생각건대 한유(韓愈)의 시에, ‘먼 곳을 보는 눈이 쌍으로 밝은 것을 더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명원의 뜻은 아마도 여기에서 나온 것인 듯 하다. <中略> 하늘과 땅이 맑고 편안하며 바람과 달이 활짝 개서 사계절의 아침과 저녁이 광명하고 맑은 기운이 길이길이 발과 책상 가운데 있고, 풍속의 티를 벗어나고 세상 티끌을 끊어 한 점 티도 그 사이에 없으니 이른바 명(明)이라는 것이요, 바라다보면 모든 산이 둘러싸이고 여러 산봉우리가 높고 높아서, 푸르게 튀어나고 푸르게 솟아 있는 것이 연기와 구름 아득한 안개 속에 출몰하여 저 멀리 몇 백 리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다. 긴 숲과 큰 들판은 꾸불꾸불 평탄하며, 누른 밭두둑 푸른 풀밭은 가로세로 뻗쳐 있어 하늘이 길어도 끝이 없고 새가 날아도 다하지 못하여 저 멀리 그 끝간 데를 알지 못하겠으니, 이른바 원(遠)이라는 것이다. 이 누에 오른 이는 장막속에 칼을 차고 창을 든 대부가 아니면 반드시 진신(搢紳)의 의관을 한 군자들로서, 모두 고명하고 원대한 의견이 있는 사람들이라, 눈을 들어 멀리 명원한 뜻을 보게 되니, 반드시 마음으로 터득하고 스스로 얻을 것이다. 전후에 원이 된 자가 또한 모두 밝게[明] 판단하는 재주와 크고 먼[遠] 그릇이 있어서, 비록 조그만 일을 경영하는 데도 역시 여러모로 계획해서 혹은 보충하고 혹은 더하며, 혹은 수리하고 혹은 고쳤으니, 그 마음 쓰는 것이 역시 부지런하지 않은가. 아, 명원이란 뜻을 크다고 할 것이다. 사람이 막힌 데를 보면 밝지 못하고 밝지 못하면 멀지 못할 것이니, 군자가 고명(高明)하고 궁원(窮遠)한 데 거하여 먼데를 보는 것이 오직 밝은 연후에라야 가히 이치가 통달하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영천군수 이건식(李建栻)의 조양각중수기(朝陽閣重修記)에 중수의 기록이 있다. “교남(嶠南)의 여러 고을에 높은 각과 이름난 누이 있는 곳이 열 곳이 넘는데 영천의 조양각이 그 중 하나이다. <中略> 이제 이 누각이 건립된 해가 오래되어 모양이 변하고 기울어져 장차 얼마동안 지나면 황진무초가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탄식하리라. 내가 이 고을에 부임한지 삼 년 되는 봄에 읍인이 다 중수를 원하기에 겨우 모은 돈 수천 냥으로 썩은 재목을 바꾸고 기와를 고치고 아울러 단청을 하여 시작한 지 육칠 개월만에 완공되었다. <中略> 옛말에 이르기를 한 번 노력하지 않으면 영원히 편안하지 아니하다 하였는데 이제 관민의 일시적인 노고가 후일에 관민백세의 편안함을 위한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할까?”

이 지역 임고(臨皐) 출신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누각이 낙성되자 중양절(重陽節) 때 이곳에 올라 시를 읊었다. “푸른 냇물 석벽이 고을을 안고 도는 곳에[淸谿石壁抱州回] 새로 다락을 지었더니 눈이 활짝 열리네[更起新樓眼豁開] 남쪽 이랑의 누른 구름 풍년을 알리고[南畝黃雲知歲熟] 西山爽氣覺朝來 서산의 산뜻한 기운은 아침을 일깨우네. 풍류를 좋아하는 태수는 녹봉이 2천 석[風流太守二千石] 뜻밖에 만난 친구 술 3백을 마신다네[邂逅故人三百杯] 밤이 깊이 들거든 옥피리를 불며[直欲夜深吹玉笛] 휘영청 밝은 달 아래 함께 거닐어 보세[高攀明月共徘徊]”

누각을 건립한 이용(李容)은 “새 누각 우뚝 솟으니 새는 날아 돌아오고[新樓突兀鳥飛回] 올라서니 회포가 활짝 열리네[懷抱登臨得好開 다른 고을의 옛 친구는 다시 만나기 어렵고[異縣故人難再會] 올해 이날은 거듭 다시 오지 않네[今年此日不重來] 시내가 맑아 물그림자에 무희의 부채에 흔들리고[溪虛日影搖歌扇] 산이 가까우니 가을빛이 술잔에 지는구나[山近秋光落酒杯] 고을살이 2년에 무슨 일 이루었나[五斗二年成底事] 어찌 견디랴? 고향떠난 천 리 밖에서 홀로 배회하네[可堪千里獨徘徊] ”라고 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은 “동궁의 학사가 이제 지방 군수 되었는데[春坊學士今爲州] 술에 취해 일찍이 황학루 시를 썼었지[醉筆曾題黃鶴樓] 내가 우연히 그대 부임하기 전에 와서[我來偶値未下車] 다만 길거리에 가득한 아이들을 볼 뿐이네[但看竹馬盈街頭] 군민들이 서로 다퉈 새 군수를 묻기에[郡人爭問新使君] 활달하고 고아한 풍류가 비할 데 없다 했네[曠致雅懷無比流] 맑은 시내와 꽃다운 풀에 흥이 절로 뛰어나니[晴川芳草興自逸] 언제나 함께 앞 현자들의 놀이를 계승할꼬[何日共繼前賢遊]”라고 읊었다.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는 “날아갈 듯한 용마루가 절벽 위에 높이 솟았으니[飛甍高聳斷巖頭] 빼어난 경치 의연하게 십이루와 같다네[形勝依然十二樓] 옥을 깎은 듯한 붉은 벼랑은 백 척을 능가하고[削玉丹崖凌百尺] 금을 찧는 듯한 푸른 물결은 두 갈래로 흘러 모여드네[舂金碧水匯雙流] 바람에 의지하여 먼 데 바라보니 하늘은 끝나는가 의심하고[憑風望遠天疑盡] 달을 대하여 허공에 임하니 땅은 뜨고자 하는구나[對月臨虛地欲浮] 기운이 상쾌하고 정신이 맑으니 세상근심 없어지고[氣爽神淸無世慮] 이 몸에 날개 나서 선계에 오른 듯 하네[身如羽化到仙區]”라고 노래했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