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 정하동 낙동강변에 위치한 영호루(映湖樓)는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한수(漢水) 이남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이름났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으로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로 몽진(蒙塵)하여 70일 동안 머물렀다. 공민왕은 백성들의 환대에 고마움을 담아 친필 금자현판(金子懸板)을 내려 누각에 달았다. 조선 명종(明宗) 2년(1547)년 홍수로 누각이 유실되어 편액이 김해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수차례 중수(重修)를 거듭하여 1970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移建)되었다. 영호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누각 편액은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고, 누각의 ‘洛東上流 嶺在名樓’은 순조 때 안동부사 김학순의 친필이다.
안동(安東)은 삼국시대 이전에 창녕국(昌寧國)이 있었다고 하며, 신라 때 고타야군(古陁耶郡), 경덕왕(景德王)이 고창군(古昌郡)으로 고쳤다. 그 후 고려 태조가 후백제와 쟁패(爭覇)할 때 이 고을 사람 김선평(金宣平), 김행(金幸), 장길(張吉)이 태조를 도와서 견훤(甄萱)을 패배시켰다. 그들의 전공(戰功)을 높여 대광(大匡)과 대상(大相)을 삼고 안동부(安東府)로 삼고 충렬왕(忠烈王) 때 복주목(福州牧)으로 고쳤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紅巾賊)을 피해 남쪽으로 순행(巡幸)하여 이 고을에 머무를 때에, 고을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여 대도호부(大都護府)로 하였다. 조선에 와서도 그대로 따랐으니 안동은 경주(慶州)와 함께 경상좌도(慶尙左道)의 중심지였다. 고을의 별칭으로 고창(古昌), 영가(永嘉), 길주(吉州), 복주(福州)라 했다. 북쪽으로 영주(榮州)와 봉화(奉化), 동쪽으로 영양(英陽)과 청송(靑松), 남쪽으로 의성(義城), 서쪽으로 예천(醴泉)과 인접해 있다. 예로부터 이 고을은 ‘무본절용(務本節用)과 근검충의(勤儉忠義)’로 이름났다. 풍속은 부지런하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농사를 힘쓰고 씀씀이를 절약하여, 근검(勤儉)과 충의(忠義)는 남쪽 지방의 으뜸이 되며, 백성들은 예의있고 순박하다고 했다. 안동향교 서쪽 15여리에 부(府)의 남쪽에 유서깊은 누각이 있으니 영호루(映湖樓)이다. 고려 공민왕 17년(1368) 고려말 문신인 담암(淡菴) 백문보(白文寶)가 봉익(奉翊) 판전교(判典校) 권사복(權思復)의 요청으로 적은 영호루금방기[映湖樓金榜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축년(辛丑年, 공민왕 9년, 1361) 겨울 11월에 임금께서 난리를 피하여 복주(福州)에 이르렀다. 처음 광주(廣州)와 충주(忠州)로부터 죽령(竹嶺)을 넘었을 때, 관리들과 백성들이 난리를 만나 당황하여 마치 놀란 노루와 엎드려 숨은 토끼처럼 손발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몰랐다. <中略> 그중에 복주는 거진(巨鎭)으로, 산이 높고 물이 맑으며 풍속은 예스럽고 백성들은 순박하였다. 깃으로 장식한 큰 깃발이 엇갈려 하늘을 덮고 관면(冠冕)과 패옥(佩玉) 차림의 행렬이 이어지니 행궁(行宮)을 깨끗이 정돈하여 어가(御駕)를 인도하였는데 편안하고 침착하였다. 임금께서 마음속으로 기뻐하여 이곳에 어가를 멈추고 장수에게 적을 치도록 명령하였다. 얼마 있다가 경도(京都)를 수복하게 되자, 마침내 복주를 승격하여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삼고 조세를 감면해 주었다. <中略> 공양왕 17년(至正 戊申年, 1368)에 고을의 수령인 신자전(申子展)이 예전 제도를 고치니, 누각이 웅장하고 화려하여 바로 호수의 수면에 걸터앉게 되었다. <中略> 봉익(奉翊) 판전교(判典校) 권사복(權思復)은 복주 사람으로, 누각을 중수(重修)하여 그 편액을 걸고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했다. <後略>”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찬(讚) 서문(序文)에, “병오년(丙午年, 공민왕 14년, 1366) 겨울에 임금이 서연(書筵)에서 영호루(映湖樓)라는 석 자를 큰 글씨로 써서 왕지(王旨)를 전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기(記)에, “영호루는 영가(永嘉)의 이름난 누각이다. 그 강과 산의 뛰어나고 큰 모양은 비록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에는 양보해야 할지도 모르나, 같이 낙동강(洛東江)의 언덕에 버티고 선 것으로 상산(商山)에 있는 관수루(觀水樓), 일선(一善)에 있는 월파정(月波亭)은 이 누와 더불어 갑을(甲乙)을 다툴 수 없다”라 기록하고 있다. 고려후기 명장으로 이름난 김방경(金方慶)이 일본 정벌 후 돌아오는 갈에 이곳을 지나 누각에 올라 시를 읊었다. “산과 물은 옛날 보던 맑음 그대로 이며[山水無非舊眼靑] 누대 또한 어릴 적 그대로라네[樓臺亦是少年情] 고국엔 옛 풍속 남아 있음이 사랑스러우니[可憐故國遺風在] 노랫소리 모아서 나의 갈 길을 위로하네[收拾絃歌慰我行]” 역동(易東) 우탁(禹倬)은 “영남에 여러 해 동안 두루두루 노닐었으나[嶺南游蕩閱年多] 이 호산(湖山)의 경치를 가장 사랑 하네[最愛湖山景氣加] 풀 우거진 나루터에 나그네의 길이 나누어지고[芳草渡頭分客路] 수양버들 푸른 뚝 가에 농가가 있네[綠楊堤畔有農家] 거울에 바람그치니 안개 낀 산 비끼었고[風恬鏡面橫煙黛] 오랜 세월 담 머리에는 이끼가 자랐구나[歲久墻頭長土花] 비 갠 뒤 온 벌판에 격양가(擊壤歌) 부르는 소리 들려오니[雨歇四郊歌擊壤] 앉아서 저 수풀 끝에 밀려 있는 뗏목 보노라[坐看林杪漲寒槎]”라고 노래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일본서 돌아와 누각에 올라 이렇게 시를 지었다. “동남으로 여러 고을 두루 다녀 보았지만[閱遍東南郡縣多] 영가(永嘉)의 경치가 제일 아름답네[永嘉形勝覺尤加] 고을이 산천 형세 가장 좋은 곳에 있어[邑居最得山川勢] 인물도 많구나, 장상가 분분하네[人物紛然將相家] 논밭에 풍년 들어 곡식들은 넉넉하고[塲圃歲功饒菽粟] 누대의 봄날엔 꾀꼬리와 꽃이 있네[樓臺春夢繞鸎花] 모름지기 오늘 밤이 다 새도록 취하리[直須酩酊終今夕] 만리 길을 처음으로 배 타고 왔다네[萬里初回海上槎]” 공민왕이 시해(弑害)된 이후 유배된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은 “날아 오르는 용이 하늘에서 밝은 구슬 희롱타가[飛龍在天弄明珠] 영가(永嘉) 호수가 누각에 멀리 떨어 뜨렸네[[遙落永嘉湖上樓] 밤 구경엔 구태여 불 밝힐 것 없어[夜賞不須勤秉燭] 만 길의 신령한 빛이 물가에 비추네[神光萬丈射汀洲]”라고 읊었다. 양촌(陽村) 권근(權近)은 “나그네의 몸으로 누각에 올라 굽어보니 느낌과 탄식이 많고[客裏登臨感歎多] 게을러 노느라 귀밑머리에 흰머리 늘어가네[倦遊瀛得鬢絲加] 바닷가로 흘러 떠돌면서 공연히 고국을 그리워하고[海天流落空懷國] 고향이라고 돌아와 보니 거처할 집은 없다네[鄕郡歸來未有家] 백 척(尺)이나 높고 위태로운 난간은 푸른 공중에 떠 있고[百尺危欄浮碧落] 구중궁궐(九重宮闕) 임금의 글씨는 황금빛 꽃처럼 빞나네[九重宸翰耀金花] 긴 내[川]는 멀리 은하수와 이어졌으니[長川廻與銀河接] 지금 곧장 뗏목 띄워 멀리가고 싶다네[直欲超超一泛槎]”라고 노래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나그네 근심이 비를 만나 더한데[客中愁思雨中多] 더구나 가을바람이 더욱 심란하네[況値秋風意轉加] 홀로 누각에 올라 해진 후 돌아와[獨自上樓還盡日] 홀로 술잔 들어 집 그리움을 잊네[但能有酒便忘家] 은근히 벗을 불러 돌아갈 제비는[慇懃喚友將歸燕] 쓸쓸히 정을 품고 늦은 꽃을 향하네[寂寞含情向晩花] 한 곡조 맑은 노래 숲속에 울려 퍼지니[一曲淸歌響林木] 이 마음 어쩌다 마른 그루터기 같이 되었는가[此心焉得以枯槎]”라는 시를 남겼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