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40洗心亭. 스승을 독신(篤信)하며 곤궁(困窮)에도 뜻을 바꾸지 않고 종신(終身)토록 도(道)를 지켰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덕촌리에 위치한 세심정(洗心亭)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제자인 용문(龍門) 조욱(趙昱)이 은둔하여 후학양성을 위해 만든 정자라고 알려져 있다. 세심정은 7개의 주조석(柱礎石) 위에 건립된 육각원당(六角圓堂)의 누각이다. 정자 앞에 연당(蓮塘)을 축조했다. 용문의 나이 12세 때 한강에 나갔다가 당대의 문사들이 시회(詩會)를 열

편집부 2017. 11. 1.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덕촌리에 위치한 세심정(洗心亭)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제자인 용문(龍門) 조욱(趙昱)이 은둔하여 후학양성을 위해 만든 정자라고 알려져 있다. 세심정은 7개의 주조석(柱礎石) 위에 건립된 육각원당(六角圓堂)의 누각이다. 정자 앞에 연당(蓮塘)을 축조했다. 용문의 나이 12세 때 한강에 나갔다가 당대의 문사들이 시회(詩會)를 열었는데, 즉석에서 “푸른 산 곳곳에 솟아 있고[靑山面面立] 한강물 유유히 흐르네[漢水悠悠下] 높고 넓은 산수 사이에[峨洋山水間] 그 누가 내 마음 알아주랴[誰是知音者]”라는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지평(砥平)은 고구려 때 지현현(砥峴縣)으로, 신라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때 광주(廣州)에 예속하였고, 조선 태종(太宗) 13년에 현감을 두었고,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흑천이 고을을 감싸 흐르고, 경기의 금강(金剛)으로 이름난 용문산(龍門山)이 있다. 지평향교(砥平鄕校) 북동쪽 용문면 덕촌리에 유서 깊은 정자가 있으니 세심정(洗心亭)이다. 세심정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문인(門人)인 용문(龍門) 조욱(趙昱)이 건립한 정자라고 알려져 있다. 용문의 자(字)는 경양(景陽)이며 호(號)는 우암(愚菴), 보진암(葆眞菴), 용문(龍門), 세심당(洗心堂)이다.

 

용문선생집(龍門先生集) 연보(年譜)에 의하면, 연산군 4년(1498) 서울 청파리(靑坡里)에서 출생하여, 중종 11년(1516) 19세 때 생진시(生進試)에 합격하고 정암과 충암(冲菴) 김정(金淨)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구도(求道)에 뜻을 두어 자신의 처소를 우암(愚菴)이라 편액했다.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과거(科擧)에 대한 뜻을 버리고 은둔할 뜻을 품었으니 당시 나이 22세였다. 50세 때 명종 2년(1547) 지평으로 와서 모재(茅齋)를 짓고 은거하여 용문선생(龍門先生)으로 불렸으며 둔촌록(遯村錄)을 지었다. 명종 7년(1552) 55세 때 임금이 현인(賢人)을 구하는 교지(敎旨)를 내려 성수침(成守琛),조식(曺植),이희안(李希顏), 성제원(成悌元) 등과 함께 유일(遺逸)로 뽑혀 선무랑(宣務郞) 내섬시(內贍寺) 주부(主簿)에 제수하였다. 명종 9년(1554) 외방으로 나가 장수현감(長水縣監)을 맡아 백성을 새롭게 만들고 풍속을 선하게 하는 일에 힘쓰고, 가혹한 정사를 없애고 대체(大體)를 보존하여 조용히 지내면서 번거롭게 하지 않아 관리들이 순종하고 백성들이 안정을 찾았다. 이듬해 형(兄) 조성(趙晟)의 상(喪)을 당하자 사직하고 용문(龍門)에 은거하여 세심당(洗心堂)으로 호(號)를 삼았다. 명종 12년(1557) 60세 일기로 서거(逝去)하여 지평의 용문산 남쪽 구거(舊居)의 뒤에 안장(安葬)되었다.

 

병술년(2006)에 편액한 세심정기(洗心亭記)에 “명종2년(1547) 정미(丁未)에 용문산하 토최미(土最美: 德村)에 둔세복거지(遯世卜居地)를 정하고 모재초가(茅齋草家)를 건조(建造)하여 세심당(洗心堂)이라는 학당을 마련하여 제자와 사림에 도리 의리 경학을 강론하였으며 교유(交遊) 퇴계(退溪) 이황(李滉)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등 현사(賢士)와 화답하다. 세심당 구기(舊基)에 영조 41년(1765) 을유(乙酉)에 제자손(諸子孫)이 세심정자(洗心亭子)를 중건하고 세심지(洗心池)를 축조하여 선생이 얼을 되새기며 누차 중수를 거듭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상촌(象村) 신흠(申欽), 계곡(谿谷) 장유(張維)와 함께 조선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택당(澤堂) 이식(李植)은 용문(龍門) 법령(法靈) 시축(詩軸)에 표제(表題)했다. “산속에 숨은 사원 돌아온 곳[蘭若山回處] 바람에 연기가 상방까지 젖어드네[風煙接上方] 옛날 추억 깃든 곳 찾아가 인사도 못 하나니[舊遊渾不省] 인간 세상 바쁘기 때문이라[人世本多忙] 승려와 담소 나누기 꼭 맞는 고요한 방[靜室宜僧語] 가을 등불 아래 서늘한 빗방울 떨어지네[秋燈引雨凉] 그러고 보니 용문께서도[仍思葆眞子] 밝은 시대에 몸을 깊이 숨기 셨다네[昭代亦深藏]”

 

용문선생집 연보에 “날마다 침잠하여 연구하면서 침식을 잊기까지 하였으므로, 정암이 일찍이 ‘제자 중에서 구도의 뜻이 독실하기로는 조모(趙某)만 한 이가 없다’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포저(浦渚) 조익(趙翼)이 찬(撰)한 묘갈명(墓碣銘)에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당시의 일이 적혀 있다. “사화가 일어나자 상소하여 해명하려고 초본(草本)을 작성해 놓고는 아직 올리지 못했을 때에, 문생(門生)이라는 죄목으로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나이가 가장 어리다는 이유로 화를 면하게 되었다. 그때에 상소를 올렸더라면 화를 예측할 수 없었을 텐데, 공은 미처 상소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마침내 은거할 뜻을 세우고는 과거에 응시할 뜻을 완전히 끊어버린 채, 형인 양심당(養心堂)과 삭녕(朔寧)의 옛 동산에 집을 짓고 함께 거처하며 강마(講磨)하면서 형제 스스로 사우(師友)가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이정(二程 :程顥, 程頤)에 견주기도 하였다.”

 

또한 묘갈명에 “일찍부터 스스로 스승을 찾아서 의리지학(義理之學)에 투신한 뒤에 화난(禍難)에 임해서도 꺾이지 않고, 궁곤(窮困)에 처해서도 변함이 없이 부지런히 일생 동안 종사하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두었으니, 바르게 지키고 깊이 터득하고 후하게 기른 이 점이야말로 세상에 지극히 드문 일이니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이 사귄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당세의 현사(賢士)들이었으니,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퇴계(退溪) 이황(李滉)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등이 모두 공의 집우(執友)였다. 제현(諸賢)들이 공을 일컬은 말을 보면, ‘도학(道學)에 독실하게 뜻을 두어 성인의 경지에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공부하는 길을 제대로 알아서 계속 전진하며 멈추지 않았다’, ‘유가(儒家)의 공정(工程)을 제대로 안 사람은 오직 공 뿐 이었다’라고 하였으니 당시 붕우들 사이에서 공이 얼마나 인정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라고 적혀 있다.

 

조구상(趙龜祥)은 “봄철 물이 흐르는 좁은 곳을 찾아[尋春沼絶峽] 말을 몰아 용문 선생이 계신 곳에 이르렀네[驅馬到仙源] 돌로 이룬 정자는 숲에 의지하고[石作坮倚樹] 마을에 이르니 물은 마을 입구를 감싸고 있네[村臨水掩門] 단지 가운데 세계는 열려 있고[壺中開世界] 바깥은 형상은 하늘과 땅 뿐이네[象 外有乾坤] 천천히 맑은 못을 거닐어[散步靑潭上] 세심정 누각은 누구랑 말을 하는가[洗心臺誰言]”은 시를 읊었다.

 

이근원(李根元)의 판상차운(板上次韻)에 용문이 이곳에 은거하여 정자를 짓고 세심당 또는 보진암(葆眞菴)으로 명명했다고 적혀 있다. “선생이 도를 구하고자 한 뜻은[先生求道志] 진실로 보진암을 경영함이었네[爲實葆眞菴] 두 선생의 가르침에서 연원하여[潑潑雙溪水] 인품은 만 길 높은 산처럼 엄밀하네[峨峨萬仞嚴] 젊었을 때 사문(斯文)의 불운을 만났으나 흔연히 은둔하여 근심하며 보냈네[喜遯失心日] 옛 용문선생의 푸른 옥돌에 의지하여[依舊龍門碧] 선생의 후손이 나에게 이야기 하네[雲孫向我譚]”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