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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41景濂亭, 마음을 한결같이[惟心惟一] 공경을 지녀[持敬]’ 생각하고 공경하라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內竹里)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정문 바깥 동쪽 절벽 위에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건립한 경렴정(景濂亭)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누각으로, 바깥 전면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해서체 편액이 있고, 내부에 퇴계의 제자인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의 초서체 편액이 걸려 있다. 풍기읍에 건립된 군

편집부 2017. 11. 15.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內竹里)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정문 바깥 동쪽 절벽 위에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건립한 경렴정(景濂亭)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누각으로, 바깥 전면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해서체 편액이 있고, 내부에 퇴계의 제자인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의 초서체 편액이 걸려 있다. 풍기읍에 건립된 군수주공선정비(郡守周公善政碑)에 “천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학행이 순수하였다. 노인을 공경하고 착한 일을 존대하며 가르침을 앞세우고 형벌을 뒤로하고 용서를 미루어 은혜를 베풀었다. 부로(父老)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나라 개국 이래로 군수로 온 사람이 이런 이가 없었다”라며 신재의 선정을 칭송하고 있다.

 

풍기(豐基)는 신라의 기목진(基木鎭)이다. 고려 태조 23년(940) 기주(基州)라 부르다가 현종(顯宗) 9년(1018) 길주(吉州: 안동)에 귀속시키고, 명종(明宗) 2년(1172) 감무(監務)를 두었고, 공양왕(恭讓王) 때 안동부의 속현(屬縣)이었던 은풍현(殷豐縣)을 예속시켰다. 조선조 기천현(基川縣)으로 고치고, 문종(文宗)의 태(胎)를 은풍현(殷豐縣)에 안치하여 두 현(縣)의 이름을 따서 풍기로 고치고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고을 북쪽에 소백산맥(小白山脈)이 자리 잡고 있어 동쪽은 봉화(奉化), 남쪽은 예천(醴泉), 서쪽은 단양(丹陽)과 인접하고 있다. 고을의 별칭으로 기천(基川), 안정(安定)으로 불렀다. 예로부터 풍기는 산천이 수려한 고을로 이름났다. 좌죽계(左竹溪) 우금계(右金溪)로 불리며 소백산(小白山)에서 발원한 금계(金溪)는 풍기 고을을 감싸 흐르고 죽계(竹溪)는 순흥(順興) 고을을 감싸 흐른다. 관풍안(觀風案)에 “풍속이 근면하고 검소함을 숭상한다”라고 했다.

순흥은 고려 태조 23년(940) 흥주(興州), 충목왕(忠穆王) 4년(1348)에 순흥부(順興府)로 승격했다가, 조선 태종 13년(1413)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로 승격시켰다. 세조(世祖) 3년(1457) 단종(端宗) 복위사건으로 혁파되었고, 숙종 9년(1683)에 순흥도호부로 복설(復設)되었다.

조선 중종(中宗) 36년(1541) 풍기군수로 부임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이듬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묘우(廟宇)를 창건하고,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영정을 봉안했으니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의거하여 건물과 제도에 따른 것으로, 우리나라 서원이 이곳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명종(明宗) 4년(1549)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풍기군수에 부임하여 경상감사(慶尙監司)에게 편액(扁額)과 서적을 청했다. 감사 심통원(沈通源)이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의 편액과 서적을 하사하였다.

풍기향교(豊基鄕校) 동북쪽 30여리 순흥향교(順興鄕校) 남쪽 10여리에 위치한 소수서원 문 바깥 동쪽 절벽 위에 유서 깊은 정자가 있으니 경렴정(景濂亭)이다. 정자의 명칭은 성리학(性理學)의 기틀을 마련한 염계(濂溪) 주돈이(周惇頤)를 경모(景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소수서원잡록(紹修書院雜錄)에 “경렴정은 신재 주(周) 선생이 창건하였으니 바로 가정(嘉靖) 24년 을사년(명종 원년,1545)이다”고 밝히고 있다.

퇴계는 “소백산 남쪽 옛날 순흥 고을[小白南墟古順興] 죽계 찬 냇물 위에 흰 구름 드리웠네[竹溪寒瀉白雲層] 인재 기르고 도를 밝힌 기풍 한없이 우뚝하고[生材衛道風何遠] 사당 세워 현자를 높임은 우리나라 효시였네[立廟尊賢事豈曾] 우러르고 사모하며 모여드는 저 인재들[景仰自多來俊碩] 학문 닦는 것이 출세를 위함이 아니라네[藏修非爲慕騫騰] 고인(古人) 볼 수 없어도 그 마음 오히려 볼 수 있으니[古人不見心猶見] 차고 맑은 저 연못에 달빛이 비치네[月照方塘冷欲氷]”라는 시를 소수서원에 남겼다.

경렴정에 수많은 이들의 시가 편액 되어 있다. 신재는 “산은 경건한 빛으로 서 있고[山立祗祗色] 시내는 끊임없이 소리 내어 흐르네[溪行亹亹聲] 한가히 노니는 이 느끼는 바 있어[幽人心有會] 한밤중에 외로운 정자에 기대어 서네[半夜倚孤亭]”라고 읊었다. 퇴계는 “풀도 사람의 뜻과 일반이고[草有一般意] 시내는 끊임없이 흐르는 물소리[溪含不盡聲] 유람객들 믿지 못한다면[遊人如未信] 시원한 빈 정자에 올라 보게나[蕭洒一虛亭]”라고 차운(次韻)했다.

신재의 시문을 모은 무릉잡고(武陵雜稿)에 경렴정을 읊은 시가 남아 있다. “팔월의 계당 밤 기운 차가운데[八月溪堂夜氣寒] 뜰에서 천지조화를 살펴보네[中庭俯仰二儀寬] 만일 태극과 음양이 없어 쉰다면[若無太極乾坤息] 누가 소옹(邵雍, 邵康節)의 재주를 알아 주리요[誰似堯夫解弄丸] 벼랑을 깎아 백운동이라 하여 세기니[磨崖題刻白雲名] 밝은 날 흰 구름 백석에 피어나네[白日白雲生白石] 내가 백운을 사랑하여 자주 찾으니[太守頻來愛白雲] 눈처럼 하얀 머리에 눈은 푸르다네[白頭如雪眼藍碧]”

정자 건너편 석벽에 ‘백운동(白雲洞)’과 ‘경(敬)’ 자를 새겨져 있다. 죽계지(竹溪志)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문성공(文成公)의 사당 앞 깎아지른 석벽에 ‘경(敬)’ 자를 새기려고 하니, 서원의 모든 벗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괴이하게 여김만 당할 뿐이라고 경계하고 ‘마땅히 스스로 마음속으로 공경할 것이지 어찌 굳이 이것을 돌에 새겨야만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나도 감히 강행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회옹(晦翁, 朱子)의 말을 찾게 되어 벗들 앞에 보이고서, ‘선천(先天)의 모든 그림도 새겼는데 유독 경(敬)자를 새기는 것만 안 된단 말인가? 일찍이 이르기를, ‘경(敬)은 구차함의 반대[敬者苟之反]이니, 잠깐이라도 구차하면 이는 곧 불경(不敬)이다’ 하였으니, 이는 실로 우리 회헌(晦軒, 安裕)이 회옹의 뜻과 부합되는 것이니, 더욱 새기지 않을 수 없다. 묘원(廟院)은 비록 오래 보존되지 못하더라도 이 각석(刻石)이 마멸되지 않아 1천 년 후에 이것을 일컬어 경석(敬石)이라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라고 말하니 모두 좋다고 하여 드디어 글자를 새겼다.”

명종 15년(嘉靖39년 庚申)에 남강(南岡) 최옹(崔顒)은 “산은 끝없이 푸르고[山擁無窮翠] 죽계수는 쉼없이 흐르네[溪含不盡聲] 찾아온 손님 가을 생각이 더욱 깊어져[客來秋思緊] 구름이는 정자에 기대 외롭게 휘파람부네[孤嘯倚雲亭]”라는 시를 남겼다.

명종 17년(壬戌)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퇴계의 문인인 덕계(德溪) 오건(吳健)은 “죽계수 맑은 물은 옥색을 띠고[溪淸含玉色] 노송은 바람에 쇠 두드리는 소리 일으키네[松老戛金聲] 앉아 기다리는 가을밤은 깊어가고[坐待秋宵半] 정자에 달빛 가득하니 산이 절로 밝아지네[山明月滿亭]”라고 읊었다.

관찰사(觀察使) 안현(安玹)은 “달빛은 오늘밤 휘영청 밝은데[月色今宵白] 죽계 웅덩이에서 옛날 소리울리네[川科舊日聲] 봄바람 은행나무 아래로 불어오니[春風來杏樹] 이곳으로 나아가 높은 정자에 앉았네[卽此坐高亭]”라고 시를 남겼다.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을 역임한 황효공(黃孝恭)은 “땅은 신령하여 걸출한 인재를 낳게 하고[地靈人出傑] 천체(天體)는 신묘(神妙)하여 소리가 없네[天體妙無聲] 우러러보니 솔개가 날고 굽어보니 물고기 노는 듯[瞻仰鳶魚字] 항상 찿아와 주자를 배알하네[尋常拜考亭]”라고 읊었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