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인제읍 합강리에 인북천과 내린천이 합쳐져 맑은 물과 울창한 숲의 풍광을 볼 수 있는 곳에 합강정(合江亭)이 건립되었다. 숙종 2년(1676)에 이세억(李世億) 현감에 의해 건립되어 영조 32년(1756) 중수(重修)되었다. 당시 5칸 규모의 누각이었으나 1865년 6칸 규모로 건립되고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고, 1998년 정면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건립되었다. 합강정중수상량문(合江亭重修上樑文)에 “합강정은 관동(關東)에 있는 월송정(越松亭) 망양정(望洋亭) 청간정(淸澗亭) 경포대(鏡浦臺)보다 어찌 뒤진다 하겠는가? 청명직절(淸名直節)함은 멀리 오세암(五歲菴) 옛터와 버금가고, 못 그림자와 여울의 물소리는 오래도록 삼연옹(三淵翁: 金昌翕)의 시인 양 빼어났다”라고 하여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과 도암(陶菴) 이재(李縡) 등의 명현들의 시문을 남겼다.
인제(麟蹄)는 고구려의 저족현(猪足縣)으로 오사회(烏斯回)라고 불렀고 신라 때 희제(狶蹄)로 고쳤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원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조선 태종(太宗) 13년에 현감을 두었다. 동쪽으로 양양(襄陽), 남쪽으로 홍천(洪川), 서쪽으로 양구(楊口)와 춘천(春川), 북쪽으로 간성(杆城)과 인접해 있다. 북쪽은 휴전선과 맞닿아 있고, 향로봉(香爐峰) 설악산(雪嶽山) 점봉산(點鳳山) 대암산(大巖山) 등 1천여미터가 넘는 험준한 산이 솟아 있다. 또한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 등이 동서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 “한계산(寒溪山) 고을의 동쪽 50여리에 있다. 한계산은 높고 크며 기이하고 풍광이 빼어나 영동(嶺東)의 으뜸이다”라고 적혀 있다.
인제향교(麟蹄鄕校) 동쪽에 내린천과 인북천이 합류하는 곳에 이름난 정자가 있으니 합강정(合江亭)이다. 인제팔경(麟蹄八景)의 하나인 합강정은 이세억(李世億) 현감에 의해 숙종 2년(1676)에 건립되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의하면 ‘합강정은 고을 동쪽으로 5리쯤 서화(瑞和)와 기린(基獜)의 두 하천이 합류하는 곳에 있다’라고 했다. 동쪽의 오대산과 방태산에서 발원한 내린천과 설악산 서화에서 발원한 인북천이 홍진포(옛 합강나루) 용소(龍沼)에서 합류되어 뛰어난 지세와 풍광을 볼 수 있는 곳에 합강정을 세웠다.
그 후 화재로 소실되어 영조 32년(1756) 김선재 현감에 의해 중수(重修)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합강정은 십자각(十字閣) 형태의 누각으로 5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규장각(奎章閣) 검서관(檢書官)을 역임하고 철종(哲宗) 14년(1863) 인제현감으로 부임한 박종영(朴宗永)의 합강정기문(合江亭記文)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계해(癸亥)년에 내가 인제의 수령이 되었다. 인제 고을은 험한 고을로 땅이 좁고 백성은 가난하였다. 대야의 움푹한 밑바닥처럼 사방이 가려져 노닐며 볼만한 즐거움이 없었다. 읍의 동쪽으로 수 리 쯤 되는 곳의 물가 바위에 정자가 있으니 합강정(合江亭)이라 불렀다. 옛 정자는 기울어 무너지고 썩어 없어 져 고을의 승경(勝景)으로 전해 질 것이 없게 되었다. 내가 부임한 이듬해 봄에 중수(重修)의 논의가 있었다.”
기문에 박 현감은 “일찍이 괴이하게도 글을 가까이 하기보다 누정(樓亭)을 좋아하였는데, 누정을 좋아하는 까닭에 놀러 다니고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놀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여 풍소(風騷)에 발동하니 폐단이 되었다”라고 했다.
또한 “합강(合江)은 좌우가 옷고름을 당겨 맨 듯이 한 갈래로 정자 아래를 가로질러 도도히 흐르며 쉼 없이 밤낮으로 흘러간다. 정자가 세워지고 훼손됨은 서로 되풀이 되겠지만 강물은 변함없이 저절로 흘러가니 이것은 문인(文人)과 지사(志士)가 함께 즐거워하는 바이다. 내가 흥기하고 탄식하는 것은 현관(縣官)은 한 번 지나가는 나그네일 따름이니 서로 왕래(往來)함이 끊어지니 어찌 정자의 세워짐과 무너짐과 다르겠는가. 만일 새로운 정자라 해도 백성이 새롭게 여기지 않는다면 이 정자에 올라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만일 또한 남긴 은택이 백성에게 있지 않다면 떠난 뒤에 생각하는 것이 오래지 않아 잊게 될 것이니, 이 강을 보아 부러워함이 없지 않겠는가?”라고 기문에 기록되어 있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46세 때 숙종 22년(1696) 강원도 원주(原州)를 거쳐 한계산(寒溪山)을 유람한 동정기(東征記)에 “8월 28일 오후에 한계(寒溪)를 향해 출발하여 5리를 가서 합강정에 올랐다. 두 줄기 물이 앞에서 합쳐지고 흰모래와 맑은 여울이 깨끗하고 호젓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농암의 아우인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도 합강정을 유람하며 이렇게 풍광을 읊었다. “ 두 물이 서로 만나는 곳에[邂逅相逢水] 절로 우뚝 솟은 정자[岹嶢自起亭] 단청은 구름 속에 아득하고[丹靑雲縹緲] 풍악소리는 여울에 맑고 시원하네[琴筑瀨淸泠] 봄 골짜기에는 멀리 꽃이 흘러 나오고[春洞遙花出] 가을 물가에는 조각달이 멈추었네[秋沙片月停] 초연하게 선계에 올라온 듯한 마음[超然上皇意] 시 읊기를 마치니 물가 넓도다[嘯罷但虗汀]”
농암의 문인인 도암(陶庵) 이재(李縡)는 정자에 올라 “두 강이 만나는 이 높은 누대에서[二江交處此高臺] 오월에 물결 보니 참으로 장관이네[五月觀濤何壯哉] 붉은 정자에서 솟구치는 물결 기쁘지만[且喜紅亭猶聳出] 설악이 갑자기 떠내려 올까 걱정이네[還愁雪岳忽浮來] 많은 나무 쓰러지니 산은 어찌 되었을까[千章顚倒何山木] 백 리 길 쾅광 지축을 울리네[百道砰訇出地雷] 노인이 보고도 물을 말하기 어려워[老子眼中難語水] 예전에 본 바다 생각하며 술잔을 든다네[曾看滄海一泓盃]” 큰 물결의 장관을 노래했다.
도암의 문인인 강한(江漢) 황경원(黃景源)은 정자에 올라 “그저 산수의 아취를 구할 뿐이요[秪求林壑趣] 길 위의 고생 따윈 아무렇지 않네[不憚道途囏] 말쑥하게 솟은 외로운 정자에[蕭灑孤亭聳] 빙 둘러 두 개의 물줄기가 흘러가는 구나[紆縈二水環] 떠돌이새는 골 어귀로 돌아가고[覊禽歸谷口] 잠자는 사슴은 소나무 사이에 엎드려 있네[眠鹿偃松間] 자줏빛 노을이 저 은하수로 통하니[霞氣通辰漢] 멀리서도 설악산인 줄 알겠네[遙知雪嶽山]”라고 노래했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