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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역 문화재를 소개합니다]철원 포충사, 요동백 김응하 장군 묘정비오랑캐마저 감복한 용맹과 기백 ‘柳下將軍’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곡암산(曲巖山) 기슭에는 요동백 김응하장군(遼東伯 金應河將軍)을 주향(主享)하는 포충사(褒忠祀)가 있다. 이 포충사는 조선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을 면한 전국 47개 사우 중 하나로서, 경내에는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대형 묘정비(廟庭碑)가 함께 모셔져 있다. 묘정비문을 보면, 김응하 장군은 조선 선조 13년(1580년)

김영칠 기자 2014. 7. 8.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곡암산(曲巖山) 기슭에는 요동백 김응하장군(遼東伯 金應河將軍)을 주향(主享)하는 포충사(褒忠祀)가 있다.

 

이 포충사는 조선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을 면한 전국 47개 사우 중 하나로서, 경내에는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대형 묘정비(廟庭碑)가 함께 모셔져 있다.

 

묘정비문을 보면, 김응하 장군은 조선 선조 13년(1580년) 철원군 어운면 하갈리에서 출생하여, 광해군 11년(1619년)까지 활약한 조선의 명장이다.

 

자는 경희(景羲), 시호는 충무(忠武), 본관은 안동이며 고려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다.

 

그의 나이 14세에 부모를 여의고 아우 응해와 우애가 지극하여 향리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25세에 무과에 급제, 병조판서 박승종(朴承宗)에게 선발되어 선전관이 되었고, 도원판관과 삼수군수, 복우후(伏虞侯)로 있으면서 국경지대의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당시의 시대상황은 명·청 교체기로서, 명나라가 쇠진하고 후금(후에 청으로 개칭)의 누루하치가 발흥하던 때였다.

 

광해군10년(1618년) 여진족인 건주위(建州衛)가 명나라에 반란을 일으키자 명에서 우리나라에 도움을 청함에, 김응하 장군은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의 좌영장으로 명에 들어가서 명장 유정(劉綎)과 합세하여 건주위 정벌에 종군하였다.

 

그러나 오합지졸의 명군은 건주위의 세력에 밀려 유정은 자살하고, 도원수 강홍립마저 건주위에 투항해 버리니, 김응하 장군은 홀로 부하 3천명을 거느리고 적군 6만과 대치하여 치열하게 싸우던 중, 중과부적으로 적의 포위에 갇히게 되었다.

 

적군은 그에게 항복을 강요하고 회유하였으나, 김응하 장군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버드나무를 등에 지고 단기필마로 분전하였다. 좁혀지는 포위망 속에서 비 오듯 날아드는 수백 대의 화살과 수십 개의 창검이 장군의 목숨을 난도질하였다.

 

오랑캐들은 장군의 용맹과 충절에 감격하여 그를 버드나무 밑에 묻고 '유하장군(柳下將軍)'이라는 푯말을 세워 주었다.

 

광해군 12년(1620년) 명나라 신종황제는 장군에게 요동백(遼東伯)을 봉하고 처자에게 백금(白金)을 하사하였으며, 우리조정에서도 충무공(忠武公)의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그 후 현종 7년(1666년)에 조정의 명으로 사당을 짓고 사액(賜額)하였으며 '포충사'라 칭하였다.

 

경내의 묘정비는 숙종9년(1683년)에 세운 것으로, 좌의정 송시열(宋時烈)의 글과 사헌부지평 박태유(朴泰維)의 글씨에,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전서제자를 곁들여 만들었다.

 

화강암 석재의 귀부(龜趺)는 무게 5톤의 대형 조각물로서, 300여 년이 지났음에도 사실감이 생생하다. 높이 2.5m의 비신은 오석이며, 그 위에 팔작지붕의 덮개를 올렸다.

 

현재 포충사는 지방비 10억을 들여 확충공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