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법(禮法)
궁중(宮中)에서는 절을 하지 않는다.
▣논쟁(論爭)
조정 의식에 절을 하는 예법은 없다. 다만 벼슬을 제수할 때에만 절을 한다. 무릇 입시하는 자가 출입할 때에만 곡배(曲拜)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 곡배는 엄밀한 의미에서 절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궁중에서는 절을 하지 않는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해설(解說)
궁중에서 임금께 올리는 곡배는 서향배(西向拜)와 동향배(東向拜)가 있으며, 성균관의 대성전과 같이 궁궐이 정남향에 위치할 경우에는 서향배(西向拜)와는 정반대의 형태인 동향배(東向拜)를 한다고 왕조실록에 전하고 있다. 따라서 대성전의 배례를 군주의 예법을 따르는 곡배라고 할 경우 절의 위치도 동향배가 옳다.
▣예법(禮法)의 근거
1.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별집 제10권 관직전고(官職典故) 조참(朝叅)
세종이 예조 판서 허조(許稠)에게 이르기를, “내 들으니 중국의 사대부는 황제 앞에 진퇴할 때에 절대로 부복하는 예가 없다고 하는데…” 하니, 답하기를, “중국의 일은 천하의 정무를 모두 황제가 재결하니 사람이 많고 일이 번거로운데, 어느 겨를에 예절을 찾겠사옵니까.” 하였다. 「명신록」
“임금 앞에서 부복하는 예는 실상 지성을 다하는 도리가 아니므로, 조종조에서는 으레 편히 앉는 것을 허용하였는데, 정희왕후(貞熹王后)께서 수렴하심으로 말미암아 여러 신하가 감히 쳐다보지 못한 뒤로부터 이내 상례가 되어 명군과 양신(良臣)이 서로 만났음에도 한결 같이 부복하고 있사오나, 명종께옵서도 당연히 경연에 당하시면 일찍이 매양 편히 앉는 것을 허용하셨사옵니다” 하였다. 「조헌(趙憲)의 상소」
조광조(趙光祖)의 경연에서의 진달도 이와 대략 같았는데 경연전고(經筵典故)에 들어 있다.
인조조에 김장생(金長生)이 아뢰기를, “옛날의 제도에 신하들이 임금 앞에서 부복하는 예(禮)가 없었사오니, 옛 의절같이 하실 것을 청하옵니다” 하여 임금이 윤허하였으나, 대신들이 황공하여 감히 변경하지 못하니, 장생도 혼자서 행할 수 없어 물러와 한탄하였다. 『국조보감』
○ 정해년에 특진관(特進官)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신하가 임금께 단배(單拜)를 하는 예가 없사온데, 입시한 제신들의 곡배(曲拜)는 원래 절하는 예가 아니오니, 이는 감히 곧게 서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부복하여 엄숙히 경의를 표할 따름입니다. 선왕께옵서 일찍이 곡배가 옛 규칙을 잃었다는 하교를 내렸사온데, 수상(首相) 정태화(鄭太和)가 대답하기를, ‘곡배는 예가 아니오나 근래에 제신들이 전후에 읍하던 것을 모두 절을 하니, 이는 실례이옵니다. 마땅히 이제부터 신칙하옵소서’ 하여 선왕께서 그 아룀을 윤허하셨던 것이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곡배는 다만 부복만 하였다가 일어나는 것이 마땅하니 이렇게 방식을 정하라” 하였다.
2.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8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숙종 33년에 특진관(特進官)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신하는 임금에 대해 단배(單拜)하는 예가 없습니다. 입시하는 신하들이 곡배하는 것은 원래 예에 맞는 절이 아니고 감히 곧장 들어올 수 없어서 부복(俯伏)하고 엄숙히 공경을 표하는 것일 뿐입니다. 선왕께서 일찍이 곡배는 옛 규례를 잃은 것이라고 하교하신 바 있었는데, 수상 정태화(鄭太和)가 대답하기를, ‘곡배는 예에 어긋나는데 근래 신하들이 앞뒤로 읍(揖)을 하여 절을 갖추니 이것은 예를 잃은 것입니다. 지금부터 신칙하여야 마땅합니다’ 하니, 선왕께서 윤허하셨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곡배는 부복만 하고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로써 법식을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석전대제보존회 의례연구원(방동민·김학경·홍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