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후 1970년대까지 석전대제 일무는 성균관대 학생들이 단과대학별로 돌아가며 춤을 췄다. 이 사진은 1958년 석전대제에 참여해 일무를 춘 성균관대 약학대학 신입생들이 석전대제를 마치고 촬영한 기념사진으로 양주향교의 남정현 유림이 임학선 성균관대 석좌교수에게 기증한 것이다.
문화재청 무형문화재과는 지난 8월9일 성균관과 (사)국가무형문화재 석전대제보존회 앞으로 공문을 보내 2018년 제9차 무형문화재위원회(9월14일 개최 예정)에 일무 검증위원회의 검토 결과를 안건으로 상정하겠다고 밝혔다.
(사)석전대제보존회가 2007년 8월 석전대제 일무의 원형을 복원해 개선된 일무의 심의를 문화재청에 공식 요청하고 별첨으로 21종의 심사 첨부자료를 보낸 지 11년만의 일이다.
성균관과 문화재청은 지난해 8월28일과 10월24일 두 차례에 걸쳐 전통 계승에 최선을 다하기로 뜻을 모으고 일무 원형 고증에 적합한 전문가들을 초빙해 검증위원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성균관과 문화재청은 석전대제 일무 검증위원회를 구성해 지난해 12월20일, 올해 2월2일과 13일 3차례 회의를 개최했다.
석전대제 일무 검증위원회에는 성균관 측에서 추천한 교수 3인과 문화재청에서 추천한 전문가 3인, 참관인으로 석전대제보존회 방동민 사무국장, 신은옥 과장, 이상호 유교신문사 사장, 문화재청 담당 과장과 사무관, 주무관이 참여했다.
(사)석전대제보존회에서는 지난 5월 이와 관련해 ‘석전대제 일무 검증위 보고서에 대한 성균관의 입장’을 발표하고 문화재청에 원형 복원에 따른 조속한 조치를 요구했다.
반면 문화재청은 7개월이 넘도록 검증위 보고서에 대해 어떠한 입장도 내놓지 않고 지정 당시 내용대로 2018년 추기석전이 봉행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는 요구만 되풀이하고 있다.
성균관은 보고서에 대한 입장에서 “석전대제는 성균관과 전국 향교에서 봉행하는 유교의례이며, 성균관과 석전대제보존회가 원형과 행례에 대해 선택과 판단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문화재청은 무형문화재가 잘 계승되고 보다 많은 국민이 문화적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성균관의 검증 및 석전 봉행에 협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석전이 유교의례가 아니라 궁중의례다?
“문묘제례는 유교의례가 아니었으며 궁중의례였다.” 유림들이 들으면 기가 막힐 얘기지만 실제 전문가라는 자가 한 말이다.
문화재청과 성균관 (사)석전대제보존회가 공동으로 주관한 ‘석전대제 일무 검증위원회’에서 문화재청이 추천한 인사의 이 발언으로 당시 검증위원회에서는 한 차례 소란이 일었다.
또한 이 인사는 ‘문묘제례 일무 검토 의견서’에서도 “문묘제례 일무를 포함한 문묘제례(석전대제)는 본래 궁중제례의 하나였다. 유교의례가 아니었다. 일무는 궁중제례에 수반되는 궁중무용이다”, “현재 석전대제보존회는 문묘제례를 유교의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문묘제례가 유교의례라면 문묘제례악과 일무가 포함되어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유교제사를 궁중의례라고 주장하다니 상상을 초월하는 발언이다. 성균관과 전국 234개 향교에서 행하는 석전이 궁중의례라니? 그렇다면 유림들은 궁중관리인인가? 향교에서 궁중의례를 하나? 조선의 궁중예법이 유교식이라는 말은 가능해도 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모시는 유교제사를 궁중의례라고 할 수는 없다.
유교권 최대 행사인 석전대제를 유교의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유교를 부정하는 것에 다름없다.
게다가 참관인으로 참석한 문화재청 무형문화재과장은 “지금이 어느 때인데 현대를 살아가면서 중국 것인 명청시대의 의식을 왜 고집하는가”라고 망언을 쏟아내 검증위원들의 지탄을 받고 회의가 중단되기도 했다.
유교 의례의 전거는 다수가 중국의 고전이다. 석전대제의 원형을 찾기 위해 근거를 찾다보면 당연히 조선의 예서뿐만 아니라 중국의 예서들을 살피게 된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이런 노력을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중국 운운하며 격하하는 것은 유교를 조롱하는 행위다.
성균관은 유교의례인 석전대제 일무의 원형을 복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의무이기도 하다. 여기에 무슨 이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유교와 관련 없는 이들이 왜 이러는 걸까.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의혹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무형문화재 지정조사보고서 제144호
문화재청 무형문화재과는 성균관에 무형문화재 지정 당시의 내용대로 석전을 봉행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문화재청이 지정 당시의 내용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1981년의 ‘무형문화재 지정조사보고서 제144호’와 1998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간한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 석전대제』 에 부록으로 실린 문묘일무보이다.
그런데 이 문묘일무보는 무형문화재 지정 당시의 것이 아니라고 이미 밝혀졌다. 원형이 아니라 창작무인 것이다.
석전대제는 1986년 11월 1일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됐다. 이에 앞서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해 열린 문화재위원회는 1986년 10월 8일 문화재관리국 회의실에서 성경린, 예용해, 유희경, 이두현, 정병호 등 5명의 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석전대제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함과 동시 보유단체를 인정할지의 여부를 의결하는 회의였다. 이때 제안 사항과 제안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〇 제안사항 : 석전대제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그 보유단체를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자 부의하오니 심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〇 제안사유 : 석전대제는 신라 이래 고려 조선조를 이어 전해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정중한 예속으로 그 전통음악인 문묘악과 팔일무 및 고전적인 의식절차가 화려하고 장중하여 예술적 가치고 크므로 이를 중묘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전승 보존하고자 함.
〇 보유단체 인정 :
·보유단체 명칭 : 중요무형문화재 석전대제보존회
·소재지 : 서울 종로구 명륜동 3가 53
·대표자 : 박중훈(남, 71세, 성균관장)
·보유자 신청대상자 : 박중훈(남, 71세), 최성환(남, 42세)
·지정조사자 : 성경린(문화재위원), 유승국(전 성균관대 유학대학장)
·참고사항 : 조사보고서 별첨
이 회의에서는 원안대로 의결하되 보유자 인정은 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때 별첨된 조사보고서가 무형문화재 지정보고서 제144호이다.
이 지정보고서에서 지정조사자인 성경린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四. 其他(81年 秋祭 參觀) <중략> 8.15 이전까지 석전행례에 여자는 전무하였는데 제관에 여집사가 등장하고 일무판에 남자의 문무, 무무이던 8일무가 현재는 국악고등학교 여학생으로 대체된 것들이 석일과는 크게 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일무의 내용은 종래 안이하고 간략하던 춤사위를 지양하고 ‘반궁예악서’에 빙거하여 문묘일무의 옛 모습을 돌이킨 것은 가위 획일적인 개선이오 장거라고 이를 것이다. 다만 춘추 석전에 성균관에 보관되고 있는 악기와 의상으로는 부족해서 국립국악원에서 그 부족분을 매양 보충하여 주악에 당하고 있는데 이의 보완 제작도 바삐 서둘러야 할 것으로 보았다. 1981. 9. 23.”
여기서 ‘석전 일무 원형’ 문제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점은 ‘그 일무의 내용은 종래 안이하고 간략하던 춤사위를 지양했다’는 부분과 ‘반궁예악서에 빙거하여 문묘일무의 옛 모습을 돌이킨 것은 가위 획일적인 개선이오 장거라고 이를 것이다’라고 한 부분이다.
이보다 앞서 성경린은 1972년 5월25일자 「유림월보」에 기고한 ‘일무금석(佾舞今昔)’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佾舞版에 처음 들어선 五十年前에도 文舞는 左方 中央 右方 中央 規則的인 三方拜로 始終이오 武舞는 亞獻은 선 자리에서 그리고 終獻은 廻身으로 도끼로 방패(干)을 소리내어 치는 춤사위로 固定되어 있었다. 확실히 原形 古形은 아닌 매우 單調롭고 雅拙한 佾舞로 轉落하였다는 印象이다. 종묘의 佾舞는 종묘제예악의 창제와 더불어 너무 어울리는 文舞 武舞가 새로 안무되고 그 舞譜가 「時用舞譜」(單一本國立國樂院所藏)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정작 아악 佾舞의 정확한 舞容에 대해서는 전혀 막막하다. <중략> 佾舞의 舞容을 바로잡는 일 이것을 더는 미루지 말고 바삐 서둘러야 하겠다. 전날의 文廟의 석전이든 宗廟의 祭享에는 雅樂部의 定職 雅樂手만으론 不足되어 雅樂生과 外部에서 임시로 무원을 고용하여 세우고 있었다. 그러니 自然 제대로의 춤을 익히고 춘달 수가 없다. 그래서 窮餘之策으로 그런 三方拜와 干戚을 뚝딱거리는 簡易한 舞作이 案出된 게 아닌가. 이것은 정말 하루 速히 止揚되어야 할 것이다.”
이로 보면 지정보고서에서 ‘종래 안이하고 간략하던 춤사위를 지양했다’는 것은 ‘삼방배’를 지양했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지정조사보고서의 기준은 두 가지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삼방배’를 지양하고, 둘째는 『반궁예악서』(원래 이름은 『반궁예악전서』이다)를 빙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의 1998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간한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 석전대제』 에 부록으로 실린 문묘일무보는 일제의 잔재인 ‘삼방배’를 그대로 인정하고 있고 『반궁예악서』와도 다르다.
해당 무보를 만든 당사자는 ‘삼방배’가 우리나라 고유의 일무이며 자신이 만든 일무는 『반궁예악서』와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형문화재 지정보고서 제144호’에 맞지 않는 ‘석전 일무’는 석전에서 춰서는 안 된다.
문화재청은 자신들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지켜라
문화재청은 2006년 11월 「중요무형문화재 원형보존과 재창조 가이드라인」(이하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성균관이 한·중 문헌을 비교 연구하는 고증을 거쳐 문묘 일무의 춤사위를 원형으로 복원해 석전에서 실행한 때와 같은 해이다.
가이드라인은 ‘중요무형문화재에 있어 원형’, ‘중요무형문화재 예능종목 음악분야 원형기준과 재창조’, ‘무형문화재 춤의 원형과 보존계승 방안’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문화재청은 이 가이드라인에서 원형의 정의와 기준 등을 제시하고 있어 원형 논란의 해결에 여전히 유의미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가이드라인에서는 문화재보호법 그 어디에도 무형문화재의 원형 개념에 대한 설명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정재의 경우 원형의 개념은 보다 특수하게 적용되어야 하고, ‘본디 모습’으로서의 원형 전승에 보다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새로운 원형의 기준이 필요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11쪽)
“무형문화재를 관리하는 공무원은 무형문화재 지정 당시의 조사보고서를 기준으로 원형보호를 말하고 있다. 원형 훼손의 문제가 생기면 지정당시의 보고서를 통해 시정을 권고하기도 한다. 첫 지정 당시 당해 문화재가 원형을 갖춘 것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원형의 기준이 된다는 논리이다. <중략> 이러한 논리는 문화재위원들의 의견이 결합하여 무형문화재 정책의 기본근간이 되는 원형보존의 기본적인 논리로 오랫동안 지지를 받아왔다. 그러나 이제 변화를 인정하는 무형문화재라는 공감대가 형성이 되면서 새로운 원형의 기준이 필요하다.”
한편, 가이드라인에서는 당시 원형 논란이 제기된 ‘종묘제례 일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82쪽)
“현행 일무는 재현 당시 김기수 선생이 「시용무보」를 중심으로 복원한 것이다. 오늘날 일무의 원형 훼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쪽에서도 이 문제는 잘 알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원형문제는 무형문화재 모든 지정 종목이 일무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지정 종목은 지정 당시의 것을 원형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무형문화재의 원형문제를 심층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다. 일부 연구자들이 연구한 단편적인 몇 개의 논문을 바탕으로 원형의 시점과 기준이 달라지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보다 심층적으로 이루어지고 학계와 관련분야 전문가들에 의해 검증이 되어 인정될 때 그 시점에 이르러 종묘일무의 전승주체인 종묘제례악보존회에서 이를 참작하여 수용하면 되는 것이다.”
이 가이드라인에서 제시하고 있는 기준은 여러 면에서 타당하다. 그렇다면 문화재청은 이 같은 가이드라인을 일관성 있게 지켜야 하고, 이는 ‘석전 일무 원형 논란’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석전 일무 원형’에 관한 연구는 오랫동안 여러 부문에서 심층적으로 이루어졌고, ‘석전 일무’의 전승주체인 석전대제보존회가 그 같은 연구 결과들을 참작해 수용하면 된다.
‘석전대제’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1986년 보유단체로 성균관의 ‘석전대제보존회’가 지정됐다. 이 석전대제보존회는 2008년 ‘사단법인 중요무형문화재 제86호 석전대제보존회’로 법인화됐고, 지난해에는 지침에 따라 ‘사단법인 국가무형문화재 석전대제보존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문화재청이 자신들이 정한 가이드라인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전승주체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유교의례에는 언제나 전거가 있다
유교의례는 어느 개인이 함부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임의로 바꿀 수도 없다. 모든 절차가 나라의 법으로 정해 전해져 왔다. 유교의례인 석전대제에 포함된 ‘석전 일무’ 역시 마찬가지다.
‘석전 일무’의 원형은 유교의례의 전승 원칙에 의거 복원되고 전승되어야 한다. 이 원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말할 수 있다.
첫째, 전거 없는 유교의례는 없다. 유교의례에는 모두 전거가 있으며, 여기에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구분이 없다. 이는 공자 이래 변함없이 지켜져 온 유교의례의 원칙이다.
이는 유교의 경서인 『논어』에서 비롯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은나라는 하나라의 예를 따랐으니 그 빼고 더한 것을 알 수 있고, 주나라는 은나라의 예를 따랐으니 그 빼고 더한 것을 알 수 있다. 혹시 주나라를 계승하는 나라가 있다면 비록 백세의 뒤라도 알 수 있다.’”(子曰 殷因於夏禮 所損益 可知也 周因於殷禮 所損益 可知也 其或繼周者 雖百世 可知也 『논어』 「위정」)
“자공이 초하루에 고유하면서 희생으로 바치는 양을 없애고자 하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야, 너는 그 양을 아까워하지만 나는 그 예를 아까워한다.’”(子貢 欲去告朔之餼羊 子曰 賜也 爾愛其羊 我愛其禮 『논어』 「팔일」)
둘째, 석전대제의 원형 복원은 석전대제 봉행 주체인 성균관의 역사와 의식을 기록한 『태학지(太學志)』에서 출발해야 한다.
『태학지』는 성균관의 제도, 교과, 학생 생활 등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책으로 정조 9년(1785) 성균관 대사성 민종현(閔鍾顯)이 왕명에 의해 편찬했다.
정조는 『태학지』 저술을 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글을 내렸다.
“이전에는 태학(太學)에 장고(掌故)를 다룬 책이 없어서 고증해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그저 전문(傳聞)에 의할 뿐이었다. 태학은 예악(禮樂)이 일어나는 곳이고 풍화(風化)의 바탕이 되는 곳이며 마땅히 행해야 할 도(道)를 연구하고 재능 있는 이를 가려내는 일이 이루어지는 곳인데도 이에 관한 한 부의 문헌이 없는 것은 너무도 엉성한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서둘러 대사성(大司成) 민종현(閔鍾顯)에게 지시하여 널리 자료를 수집하여 전지(全志)를 편찬하도록 하였다.”(太學舊無掌故之書 每有考稽 徒憑傳聞 夫以禮樂之所由興也 風化之所由本也 考道辨材之所由作也 而尙闕一部文獻者 不亦觕陋之甚者乎 亟命大司成閔鍾顯廣蒐博采 編成全志)
석전대제는 성현들에 의해 갖추어진 예법이며 기록으로 전수되었다. 따라서 『태학지』를 비롯한 예서(禮書)와 전거(典據)에 의거해 원형을 찾고 복원해야 한다.
셋째, 실준중화지제(悉遵中華之制) 혹은 실준전대지제(悉遵前代之制)이다. 즉 “모두 중화의 제도를 따른다” 혹은 “모두 전대의 제도를 따른다”는 것이다. 석전대제는 고려 때 전래된 이후 여러 번 유실되었으며, 그때마다 중국으로부터 예법을 가져왔다.
“처음 태학에 들어온 사람은 반드시 선성선사에게 석전을 올렸으니 이것이 향사의 시작이다. 옛날에는 요, 순, 우, 탕, 문왕을 선성으로 삼고 예악시서를 가르친 사람을 선사로 삼아 유관들이 각각 그 시기에 제사를 지냈다.
한나라 명제 때인 영평 연간(58~75) 이후부터 비로소 공자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오직 노나라 궐리에서만 제사를 지냈다. 위진시대에 비로서 공자를 태학에서 제사지내고 당나라 건국 후에는 주공을 아울러 제사지냈다. 당 태종 정관 연간(627~649)에 이르러 여러 신하의 건의로 선성과 선사의 위차르 바로잡았다. 이때부터 송나라와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배유(配侑)의 예와 이증(貤贈)의 전범이 왕조를 거듭하면서 점차 갖추어졌다. 그 다스려짐과 피폐함을 관찰하면 왕조의 교화가 잘되고 못됨을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조선조의 문묘에서 제사하는 전거(典據)는 모두 중화를 따랐다. 덕을 높이고 공에 보답하는 예가 그러했다. 비록 그 이어받고 개혁하고, 보태고 덜어내는 사이에 할 말이 없지는 않으나 중요한 것은 모두 묻고 의논하여 다 같이 동의한 것이니 취한 근거들이 있는 것이다. 유신들의 의논을 채택하여 송나라 현인들을 대성전으로 올려 종향한 것은 가정(명나라 세종, 1522~1567)의 제도에 근거한 것이다. 제유(諸儒)의 남측(濫廁:뒤섞여 넘침)을 출향(黜享:향사에서 뺌)한 것과 우리나라 여러 현인들을 앞뒤로 배향한 것은 덕풍을 교화해서 우러러보고 듣도록 함이다. 성인의 도를 지키고 바른 학문을 숭상하여 선비들로 하여금 추창하여 미혹되지 않게 함이다. 아! 기록해 두지 않으면 그 어디에서 예법을 볼 것인가? 이에 향사 제2를 지었다.”(始入學者 必釋奠于先聖先師 此享祀之始也 古者 以舜禹湯文王爲先聖 以禮樂詩書之所受敎爲先師 儒官各以其時祭之 自漢永平以後 始專祀孔子 然獨於魯之闕里祭焉 魏晉之間 始祀孔子於太學 唐興又幷祀周公 至貞觀中 諸臣建議乃正先聖先師之位 自玆以逮乎宋明 配侑之禮 貤贈之典 以代寢備 觀乎其修廢而徵王化之升降焉 本朝文廟祀典 悉遵中華 崇德報功 禮則然矣 雖其因革損益之間 不無可言 而要皆詢謀咸同 援據有自 至若採儒臣之議 而陞宋賢於殿內 倣嘉靖之制 而黜諸儒之濫廁 以及我東群賢 後先躋配 樹之風聲 以聳觀聽 所以衛聖道 崇正學 俾士趨弗迷也 於乎不有述焉 其何以觀禮 作享祀第二 『태학지』 향사)
‘석전 일무 원형 복원’과 관련해 성균관과 석전대제보존회는 이런 원칙을 지켜 제대로 된 ‘석전 일무 원형’을 복원해야 한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
석전과 관련된 모든 사항은 성균관장의 책임이며 의무이다. ‘석전 일무 원형’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즉 성균관의 제사인 석전의 유일무이한 제사장은 성균관장이며 제사에 대한 모든 권한은 성균관장이 갖는다.
문화재청은 유교문화의 정수인 석전을 잘 전승 보존할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해야 하는 곳이다. 무형문화재라는 이유로 유교의 종교의식을 관리 감독하려는 것은 종교탄압에 다름 아니다. 더욱이 잘못된 주장으로 원형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유교의 최대행사인 석전의 일무가 유림도 아니고 모성지심도 없는 특정 인맥으로 얽힌 이익 집단의 이권 대상으로 전락해서 안 된다. 이들에게는 석전의 일무도 돈을 낳고 사업비를 챙길 수 있는 문화상품일 뿐이다. 지난 11년 동안 벌어진 논란 속의 많은 정황들은 이를 의심케 하고 있다. 이 문제는 지면을 달리해 다시 다룰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