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린 국립국악원장은 지난 1972년 5월25일자 <유림월보> 기고를 통해 일무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직단 국왕진향도 병풍>에서 육일무를 위해 서립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국립국악원 홈페이지에서 '1998년 추기석전' 영상을 확인할 수 있으나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지난 2008년 3월5일 주요 언론사들은 성경린 선생의 타계 소식을 일제히 전했다.
서울 문묘 성균관의 석전 봉행과 관련한 논쟁이 벌어질 때면 종종 언급되는 인물인 관재(寬齋) 성경린(成慶麟, 1911-2008) 전 국립국악원장이 <유림월보> 제38호(1972년 5월25일 목요일자) 5면에 게재한 「일무금석(佾舞今昔, 옛날과 지금의 일무에 대하여)」 전문을 옮겨 싣는다.
성경린 전 원장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시대 장악원을 계승한 이왕직(李王職) 아악부원양성소에서 거문고를 익혀 연주자로 활동을 시작한 이래 이왕직아악부 아악수·아악수장 등을 거쳐 해방 및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국립국악원장, 문교부 국악진흥위원, 교육과정 심의위원, 예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며 우리나라 국악 발전의 산증인으로 활동했다.
『조선의 아악』(1947), 『조선음악독본저서』(1947), 『조선의 민요저서』(1949), 『아악저서』(1975), 『국악학논총저서』(1992) 등 수많은 저작을 통해 전통의 음악을 정리하고, 후세들에게 알리는데 주력했으나 생전에 그렇게도 염원했던 ‘문무(文舞), 무무(武舞)의 제대로 된 정립을 통한 일무(佾舞)의 완전한 복원’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국립국악원 홈페이지(https://www.gugak.go.kr)의 ‘연구/자료’-‘국악사전’-‘열문지무’에서는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부터 일본의 강압으로 (나라의) 모든 제사가 폐지되었으나 석전제는 (일제강점기인) 1928년 9월부터 오히려 팔일무(八佾舞)로 확장시켰고, 8·15 광복 이후 문묘제례악 등 음악 연구는 국립국악원으로 계승되었으며, 석전대제를 위한 열문지무는 1976년 이왕직아악부 출신 원로 사범들에 의해 연구가 시작되어 1980년에 재현이 완료되었다. 1981년 봄 석전제부터 팔일무로 연행되었다’고 안내하고 있으나 ‘이미 복원이 끝났으므로 더 이상의 논쟁은 불필요하다’는 국가유산청의 입장과 ‘자신이 주장하는 원형이 뭔지 밝히지 않고, 제대로 된 근거 제시도 못하면서 논쟁 자체를 회피하는 자세는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성균관 및 유림들의 입장이 오랫동안 대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특히 『시경』 「국풍-패풍(邶風)」 간혜(簡兮)에 나오는 ‘좌수집약 우수병적(左手執蘥 右手秉翟, 왼손에 피리를 잡고, 오른손에는 적을 쥠)’으로 상징되는 문무(文舞)와 ‘좌수집간 우수집척(左手執干 右手執戚, 왼손에 방패를 잡고 오른손에 도끼를 쥠)’으로 요약되는 무무(武舞)의 완전한 복원은 문화강국 코리아를 보기 위해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해마다 증가하고,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하는 국민들 역시 우리의 고유한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꼭 필요한 과정이라 하겠다.
이러한 측면에서 오랜 시간동안 일반인들은 물론 전문가들조차 거의 볼 수 없었던 1972년 당시 성경린 국립국악원장의 글이 문제를 풀어가는 단초가 되길 기대한다.
참고로 원문 거의 그대로를 옮기되 불가피하게 손질이 필요한 최소한의 부분에서만 지금의 맞춤법에 맞도록 수정했고, 한글이나 한자로 되어 있으나 한자 병용(倂用) 및 풀이가 이해에 도움이 되는 부분들은 괄호 안에 좀 더 상세하게 설명했다.
일무금석(佾舞今昔, 옛날과 지금의 일무에 대하여)
성경린 국립국악원장
내가 문묘 석전에 처음 참반(參班, 반열에 참여함)한 것은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 1910년 대한제국 멸망 후 궁내부(宮內府) 장예원(掌禮院) 장악과(掌樂課)가 1911년 아악대(雅樂隊)로 이름을 바꿨다가 1913년 다시 명칭을 고침)원 양성소 2, 3학년 학생 때인 듯 기억하고 있다.
이곳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최초의 악곡이 바로 문묘제례악이고 보면 한몫을 하는 차비악수(差備樂手, 임시 연주자)로도 손색이 없었지만 그런 탁용(擢用,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뽑아서 씀)은 바라기 어려웠고, 일반 고입(雇入, 고용)무원과 더불어 일무판에 서는 것이 고작이요, 또 제격이기도 하였다.
당시 제향이라면 문묘의 석전과 종묘의 대제가 있을 뿐이었다. 문묘의 석전은 성균관의 주관이오, 종묘의 제향은 이왕가(李王家)의 행사(行祀)에 속하여 여기 아뢰는 악무가 스스로 다른 만큼이나 서로 같지 않은 바가 많았다. 종묘는 자가(自家)의 제의(祭儀)인 것이지만 문묘의 경우는 이른바 초청악무로서의 봉주(奉奏, 받들어 하는 연주)였던 것이다.
문묘와 종묘는 다 함께 등가악(登歌樂, 뜰 위에 배치되는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과 헌가악(軒架樂, 뜰 아래에 배치되는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 두 개의 악단으로 편성되고 그 밖에 장엄한 일무가 이에 수반하는 것인데 문묘의 일무는 이미 팔일무의 무제로 복원되어 있었으나 종묘는 여전히 육일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일무의 전거(典拠)는 『논어』 「팔일(八佾)」 편이 그 시초가 되는 것으로 중국 고대 아악(雅樂)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무악(舞樂)을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즉 주제자(主祭者, 제례를 주관하는 자)의 지위에 따라 엄격한 무제(舞制, 춤추는 규정)로 되어 있는 바 천자는 팔일무(八佾舞) 8열 8행, 제후는 육일무(六佾舞) 6열 6행, 대부는 사일무(四佾舞) 4열 4행, 사(士)는 이일무(二佾舞) 2열 2행이었다. 그러니까 64인의 팔일무는 천자의 소용(所用)이었고, 36인의 육일무는 제후의 것이요, 사일무는 대부, 그리고 이일무는 일반 선비가 벌일 수 있는 제도였다.
그러나 이 팔일무의 인수(人數, 사람 숫자)에 대하여 종래 이설(異說, 다른 의견)이 없는 게 아니었다.
위에 팔일무의 64인, 육일무의 36인, 4일무의 16인, 2일무의 4인을 주장한 이는 진(晉)나라의 두예(杜預, 222-285)였다.
그러나 후한(後漢)의 복건(服虔, ?-?)은 해석이 좀 달랐다. 팔일의 64인은 같았으나 제후 이하가 틀렸다. 팔일무의 무제는 언제나 1열 8인을 변동할 수 없다는 게 복건의 이론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육일무도 8열 6행의 48인, 사일무도 8열 4행의 32인, 이일무 또한 8열 2행의 16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이렇게 일무의 두 가지 설이 있지만 두예의 주장이 역대 지배적이었던 것같다. 송나라 대에 아악이 우리나라에 처음 수입될 때 일무도 함께 전했는데, 36인 편제의 육일무이던 걸로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그런데 일무는 다시 그 내용상 문무(文舞)와 무무(武舞) 두 가지로 나누고, 이것은 오늘날 문묘석전에 고식공(古式功, 옛날의 법식 및 일)으로 잘 전승되고 있다.
문무는 좌수집약(左手執籥, 왼손에 피리를 잡음)·우수병적(右手秉翟, 오른손에 적(翟, ㄱ자 모양의 막대기 위에 용의 머리가 달렸고, 용의 입에 달린 쇠고리에 새의 깃(羽)으로 장식된 유소(流蘇)가 달린 의식구(儀式具)임)을 쥠)이오, 무무는 좌수집간(左手執干, 왼손에 방패를 잡음)·우수집척(右手執戚, 오른손에 도끼를 쥠)이었다.
약(籥)은 일무 문무에도 사용하지만 원래는 악기로 8음(八音, 아악에 쓰는 금(金)·석(石)·사(絲)·죽(竹)·포(匏)·토(土)·혁(革)·목(木)의 여덟 가지 악기 또는 그 각각의 소리) 중 죽부(竹部, 대나무를 사용하여 만든 악기로 대금·중금·소금·피리·당적(唐笛)·단소·퉁소 등이 속함)에 속하고, 지공삼공(指孔三孔, 피리에 뚫은 구멍이 3개의 구멍)의 횡적(橫笛, 가로로 부는 피리)인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손에 잡고 춤을 추게 되었는가는 자못 궁금하다.
이조지(李조之)는 ‘약은 죽음(竹音)이오, 죽음은 바로 성음지본(聲音之本)이라 문무에 사용하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일설에는 ‘고래(古來)로 사람이 춤을 추면 반드시 반주는 약을 불었다고 하는 고사에서 연유된 것’이라는 풀이도 있다.
적(翟)은 나무로 된 자루 끝에 꿩털 혹은 유소(流蘇, 악기의 틀에 달린 장식품의 일종)를 드리운 것인데, 우리나라의 적은 그 유소를 늘인 적이 되고 있다.
간(干)은 방패요, 척(戚)은 도끼인데 함께 무기의 순부(盾部)를 상징한 것이다. 『주례』에 보이는 ‘주간옥척 이무대무(朱干玉戚 以舞大武, 붉은 칠을 한 큰 방패와 옥으로 손잡이를 장식한 도끼로 대무를 춘다)’가 무무 춤의 남상(濫觴, 기원)이리라 생각한다.
이제는 실제로 일무의 가락이라는 무작(舞作, 춤 동작)을 알아보도록 하자.
내가 일무판에 처음 들어선 50년 전(※이 글이 쓰여진 때가 1972년 5월이므로 50년을 거스르면 1922년 무렵을 말함)에도 문무는 좌방(左方) 중앙, 우방(右方) 중앙, 규칙적인 삼방배(三方拜, 한 자리에서 우러러보고 굽어보며 구부렸다 폈다하는 절)로 시종(始終, 시작하고 끝냄)이오, 무무는 아헌(亞獻, 아헌례)은 선 자리에서, 그리고 종헌(終獻, 종헌례)은 회신(廻身, 몸을 돌림)으로 도끼로 방패를 소리 내어 내려치는 춤사위로 고정되어 있었다. 확실히 원형(原形, 본래 모양), 고형(古形, 옛 모양)은 아닌 매우 단조롭고 아졸(雅拙, 단아하나 융통성이 없음)한 일무로 전락하였다는 인상이다.
종묘의 일무는 종묘제례악의 창제와 더불어 너무 어울리는 문무, 무무가 새로 안무되고 그 무보(舞譜, 춤의 동작을 악보처럼 일정한 기호나 그림으로 기록한 것)가 「시용무보(時用舞譜)」(단일본, 국립국악원 소장)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정작 아악 일무의 정확한 무용(舞容, 춤 모양)에 대해서는 전혀 막막하다.
『반궁예악전서(泮宮禮樂全書, 1656)』 권16, 악무집략(樂舞集略)에 문무 일무 중 문무의 무보가 보이고 있어 아악 일무를 푸는 좋은 관건이 되고 있다. 다만 애석한 것은 여기에 무무를 빠뜨리고 있는 점이다.
그런데 1967년 우리가 대만에 갔을 때 마침 공자탄신일에 제회(際會, 좋은 때를 만남)하여 공자묘의 석전을 배관(拜觀)할 기회가 있었는데 음악은 아악이 못 되는 명청악(明淸樂)의 줄기로 보였으나 일무는 약(籥)·적(翟)을 사용하는 문무가 분명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의문은 간(干)·척(戚)의 무무가 왠지 결여된 일이었다.
실로 아악을 고제(古制, 옛 제도)대로 재현하여 숭고한 예악으로 정립한 것은 오늘날 본 고장인 중국도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오직 우리나라만이 그 전통이 연면(連綿, 이어짐)하다는 자랑을 길이 하였다.
그렇다고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일무의 무용(舞容, 춤 모양)을 바로 잡는 일, 이것을 더는 미루지 말고 바삐 서둘러야 하겠다.
전날 문묘의 석전이든, 종묘의 제향에는 아악부의 정직(定職) 아악수(雅樂手)만으론 부족되어 아악생(雅樂生)과 외부에서 임시로 무원을 고용하여 세우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 제대로의 춤을 익히고 춘다고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그런 삼방배(三方拜)와 간척(干戚)을 뚝딱거리는 간이(簡易, 간단하고 쉬움)한 무작(舞作, 춤 동작)을 안출(案出, 생각해 냄)한 게 아닌가. 이것은 정말 하루 속히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자유중국의 제례악도 근년(近年, 지난 몇 년 사이) 우리나라의 제도를 본 따 많은 변모와 개선이 있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발밑을 내려다 볼 때가 되었다.
일무의 전통을 그 형식에서가 아닌 정신적인 내용에서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간 춘추석전 때마다 설만(褻慢, 무례하고 거만함)한 일무의 무표(舞表, 춤 추는 자리를 나타내는 표)로 하여 얼마나 송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난 춘기석전을 끝으로 나의 문묘봉사(文廟奉仕)도 공적으로는 종막을 고한 셈이다. 나는 곧 정년으로 국악직을 물러나게 된 때문이다.
미안한 그릇이지만 내가 이루고 다하지 못한 숱한 과제를 모두 후임자에게 맡기고 나는 서서히 물러날 차비나 하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