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창간 55주년 기념 5대 특별기획 ❹지난날 유교신문 다시 보기] ⑦안의향교 보수(補修)-재일교포 이종세씨 8백만원을 희사(喜捨)

창건 551년의 역사를 가진 안의향교는 경남 함양군과 거창군이 맞닿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김종직(金宗直) 선생이 쓴 『안음현신창향교(安陰縣新創鄕校)』 기문(記文)이 『점필재집』 등에서 전한다. 2023년 8월26일 개최한 '창건 550주년 기념식'에서 유림의 헌성으로 제작한 기념비를 제막하고 있다. 안의향교 창건 550주년 기념식에서 김경두 전교가 기념사

오흥녕 2024. 11. 19.

 

 

창건 551년의 역사를 가진 안의향교는 경남 함양군과 거창군이 맞닿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김종직(金宗直) 선생이 쓴 『안음현신창향교(安陰縣新創鄕校)』 기문(記文)이 『점필재집』 등에서 전한다.

 


 

 

2023년 8월26일 개최한 '창건 550주년 기념식'에서 유림의 헌성으로 제작한 기념비를 제막하고 있다.

 


 

 

안의향교 창건 550주년 기념식에서 김경두 전교가 기념사를 하고 있다.

 


 

 

성균관유교문화활성화사업단 공모사업인 유교아카데미 등 각종 프로그램을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다.

 


 

 

 

 

『유림월보』 제126호(1979.9.28.) 2면에 이종세 선배유림의 선행을 알리는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

 


 

 

1979년 서울 은마아파트의 분양가와 비교하면 이때 800만원은 지금 가치로 10억원에 맞먹는다. 

 


 

 

안의향교 홈페이지(www.auhg.co.kr)에도 이종세 선배유림의 헌성 내용이 올려져 있다.

 


 

 

 

이종세 선배유림은 일본에서 자수성가하여 이룬 재력을 고향 안의와 한국을 위해 아낌없이 쏟았다.

 


 

 

1979년 안의향교 추기석전에서 초헌관을 맡아 음복수조례를 하고 있다. (초헌관에게 제물의 내용을 설명하는 집례로 추정되는 인물의 팔꿈치를 꿰맨 모습이 인상적이다)

 

 

 

 

1979년 안의향교 추기석전 봉행 후 헌관 및 제집사, 참례자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1979년 세워진 첫번째 공적비의 글은 당시 박성수 성균관장이 썼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자식만 생각하셨던 부모님 묘소를 새로 단장하고 예를 올리는 자리에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아들은 물론 일가 친척, 동네 이웃들까지 초청해서 함께했다.

 


 

 

(오른쪽부터) 이종세 선배유림 부부, 큰딸 부부 등이 함께한 모습이다.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아름다운 꽃나무와 석등(石燈) 등으로 구성된 정원이 있는 대저택을 소유했다.

 


 

 

 다른 나라에서 주로 생활했으나 제례 등 우리의 전통과 예법을 지켜나갔다.

 


 

 

당시 박동진 외무부장관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성균관(成均館) 전학(典學) 이종세(李鍾世) 공적비(功績碑)」 글은 당시 김경수 성균관장이 직접 썼다.

 

 


 

 

지난 2003년 세상을 떠난 이종세 선생은 부인과 함께 고향 땅에 묻혀 있다.

 


 

 

성균관과 향교 등 우리나라의 유교 관련 시설은 창건 당시는 국가나 지방 수령 등의 지원을 받았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공적 영역에서의 지원은 미미하거나 거의 끊기고, 대신 성현의 뜻을 전하는 공간이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며 잘 보존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수많은 유림의 물적, 재정적 지원이 더해져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다.

 

 

이런 과정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대표적인 관찬(官撰) 서적과 주요 관직을 역임한 인물들의 문집, 향교의 각종 기록과 지역에서 발행한 읍지(邑誌) 등까지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성균관을 비롯한 주요 시설들이 오랜 역사를 거쳐오는 동안 화재나 전란(戰亂)의 피해 등으로 창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한 곳이 거의 없으나 유림의 힘으로 복구하고 복원해왔다.

 

지난 1969년 4월30일 창간되어 55년간 유림을 비롯한 국민들과 함께해온 본지에는 전신이었던 『유림월보』, 『유교신보』 등의 시절부터 최근까지 선배유림들의 헌신과 노력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 중 지난 1979년 9월28일 발행된 『유림월보』 제126호 2면에 게재된 「안의향교(安義鄕校) 보수(補修), 재일동포 이종세(李鍾世)씨 8백만원을 희사(喜捨)」 기사를 소개한다.

 

안의향교는 조선시대에는 안음현(安陰縣)으로 불렸던 큰 고을에 위치한 향교로, 1473년(성종 4) 현감 최영(崔英)에 의해 창건되어 역시 현감을 역임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선생이 쓴 『안음현신창향교(安陰縣新創鄕校)』 기문(記文)이 지금도 전하고 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의 전소(全燒)와 이후 복원 및 행정구역 개편 등을 거치며 지금은 경남 함양군 안의면 교북리(校北里)에 위치하고 있으나 함양군 안의면, 서상면, 서하면 등 3개 면과 거창군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 등 3개 면까지 총 6개 면의 유림들이 함께 운영하며 향교 전교와 성균관유도회 안의지부 회장을 교대로 맡고, 성균관유도회 안의지부 회장을 역임한 이가 이후에 향교 전교에 취임하도록 시스템화하여 분란 없이 화합과 조화 속에서 ‘작지만 강한 향교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다.

 

지난 2023년 8월26일에는 최영갑 성균관유도회총본부 회장, 김윤수 성균관유도회총본부 부회장, 한기인 경남향교재단 이사장, 정웅 경남향교전교협의회 회장, 김경두 안의향교 전교, 진재상 함양향교 전교 등 경남지역 향교 전교, 신용희 성균관유도회 안의지부 회장, 노봉희 성균관유도회 함양지부 회장 등의 유림과 김태호 국회의원, 진병영 함양군수, 박용운 함양군의회 의장과 군의원, 김재웅 도의원, 정상기 함양문화원 원장, 임영신 전 성균관 부관장, 천상규 유교TV방송 대표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건 550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개최했고, 올해는 광풍루 주련차운 전국한시지상백일장, 유교아카데미 교육, 도덕성 회복교육, 명사초청 특강, 한시강좌 운영 등을 통해 전국 향교의 모범이 되어 왔다.

 

안의향교의 보수(補修)를 위해 1979년 당시 매우 큰 금액이었던 8백만 원을 희사(喜捨, 어떤 목적을 위하여 기꺼이 돈이나 물건을 내놓음)했던 고(故) 이종세(李鍾世) 선배유림은 자는 수헌(秀憲), 호는 해은(海隱), 본관은 합천(陜川)으로 1919년 12월11일 경남 함양군 안의면 대대리(大垈里) 990번지에서 부친 이필기(李馝基), 모친 함안조씨(咸安趙氏)의 4남 중 막내로 태어나 1935년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갖은 고생 끝에 자리 잡기 시작했고 1963년 8월7일 오사카(大阪)에서 창립한 ㈜동풍흥산(東豊興産)을 경영하며 상당한 재력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재일동포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을 많이 하다가 지난 2003년 7월28일 일본에서 세상을 떠났다. 가족으로는 정인옥(鄭仁玉, 1929-1992, 본관 해주) 여사와의 사이에 1남(이행원(李幸源, 족보상 이름이고 보통 때는 이행일(李幸一)로 사용) 2녀(이행순(李幸順)-사위 이극칙(李克則), 이순애(李順愛))를 두었다.

 

1979년 7월 고향 안의를 방문했다가 안의향교 대성전에 봉심한 후 향교가 돈이 없어 제대로된 수리를 못하고 있음을 알고 8백만 원을 희사했고, 그 외에 재단법인 종세육영재단(鍾世育英財團, 1989년 11월29일 창립) 등을 통한 장학사업으로 2003년 1학기까지 1,208명의 중고등학생 및 대학생들에게 졸업 때까지 장학금을 전액 지급했으며, 이웃돕기 등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남겨 유림들의 공의(公議)로 공적비를 건립했는데, 당시 비문은 박성수(朴性洙, 1897-1989, 호 일송(一松)) 제13·14대 성균관장(재임 1976.07.25.-1980.08.30.)이 지었다.

 

이 외에도 재일거류민단 간부로서 재일교포 인권옹호와 법적 지위 확보를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7년 8월 박동진(朴東鎭, 1922-2013) 17대 외무부장관(재임 1975.12.19.-1980.09.02)으로부터 받은 표창장과 1979년 9월28일 봉행된 안의향교 추기석전에서 초헌관으로 배례(拜禮)하는 모습 등을 합천이씨 가보(家譜)에서 볼 수 있는데, 성공한 재일동포 실업가로서 고향을 위한 일뿐만 아니라 재일동포 사회와 한국 정부를 위한 일도 활발하게 전개하여 두루 인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본지에 실린 것은 아니지만 지난 1989년 안의향교 앞에 세워진 「성균관(成均館) 전학(典學) 이종세(李鍾世) 공적비(功績碑)」의 내용도 소개한다. 

 

1979년 세워진 공적비와는 또 다른 공적비로, 당시 김경수(1920-2009) 제21·22대 성균관장(재임 1987.09.13.-1994.04.30.)이 지은 글은 신문에서도 한자를 더 많이 사용할 정도로 한자, 한문이 통용되던 분위기를 반영해 대부분 한자로 되어 있지만 지금의 독자들을 위해 되도록 한글로 표기하되 내용의 이해를 위해 필요한 부분은 한자를 병행 표기했다.

 

이런 내용들은 고(故) 이종세 님의 가족 및 선배유림들로부터 다양한 자료를 확보해 전달하고, 사실관계 확인에 적극 나선 김경두 안의향교 전교와 이필원 안의향교 장의(이종세 선배유림의 조카)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참고로 1979년 7월에 희사했다는 8백만 원의 가치를 파악하기 위해 1979년 분양한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31평형(전용 76㎡)의 분양가를 찾아보니 2,092만원이었고, 2024년 11월 현재 시세가 26억 원 정도이니 여러 비교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칠게나마 이렇게 계산해보면 대략 지금 가치로도 10억 원 가량이나 되는 매우 큰 돈으로 추산된다.

 

 

 

안의향교(安義鄕校) 보수(補修), 재일동포 이종세(李鍾世)씨 8백만원을 희사(喜捨)

 

[『유림월보』 제126호(1979.9.28.) 2면 기사]

 

 

 

안의향교에서는 4년 계획으로 향교를 보수단청(補修丹靑)할 것을 시공 중에 있다고 한다.

 

지난 7월에는 재일동포 이종세씨가 모국을 방문하여 향교 대성전을 봉심하고, 향교 보수비로 8백만원을 희사하였다.

 

이종세씨는 모성지심(慕聖之心)이 투철하여 향교 사업에 정성뿐 아니라 자기 선대(先代)의 사적비도 건립하고, 이웃돕기도 많이 하였으므로 유림들의 칭송이 자자(藉藉)하다.

 

그의 호성위도(護聖衛道)의 정성을 기리는 공적찬양비를 향중공의(鄕中公議)로 건립하는데 비문은 박성수(朴性洙) 관장이 지었다.

 

 

 

성균관(成均館) 전학(典學) 이종세(李鍾世) 공적비(功績碑)

 

◯ 위치 : 경남 함양군 안의면 교북리(校北里) 안의향교 앞

 

◯ 행적자(行蹟者) : 합천(陜川) 이종세(李種世) ◯ 연대(年代) : 1989년

 

◯ 건립일 : 공부자탄강(孔夫子誕降) 2540년(1989) 기사(己巳) 7월

 

<개요(槪要)>

 

향교가 창건 이후로 세구월심(歲久月深, 세월이 오래됨)하니 풍우소침(風雨所浸, 비·바람이 침범함)과 일광소폭(日光所曝, 햇볕에 쬠)으로 기와는 삭고 지붕이 비가 새며 단청(丹靑)이 퇴색하여 태불능지(殆不能支, 거의 지탱할 수 없음)인데 재력 부족을 고민하던 중 마침 향유(鄕儒, 고향 유림) 이종세씨(李種世氏)가 해외에서 귀국하여 봉심차(奉審次) 내방, 그 정상(情狀)을 보고 개연장탄(慨然長嘆)하여 독단으로 거화(巨貨, 큰 돈) 칠백만금(七百萬金)을 헌성(獻誠), 교궁(校宮)을 중수(重修)하니 전유림 고유낙성(告由落成)하고 모성숭유(慕聖崇儒)의 정신을 기리고 그 공적(功績)을 찬양하며 아름다운 자취를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함

 


 

성균관 전학 이종세 공적비

 

덕유산(德裕山) 기슭 안의아경(安義雅境, 안의의 아름다운 풍경)에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루었고, 그 남단(南端)에 웅장수려(雄壯秀麗)한 지리산이 창공에 용립(聳立, 우뚝 솟음)하였으며 옥류(玉旒)가 산간을 누원(淚湲)이 흘러 산자수려(山紫水麗)한 승지명구(勝地名區)가 형성된 곳에 명현달사(名賢達士)가 계세배출(繼世輩出)하였다.

 

안의향교(安義鄕校)는 조선조 성종(成宗) 4년에 현감 최영(崔榮)이 창건하였으며 동방의 유종(儒宗)인 점필재(佔畢齊)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창교기문(創校記文)이 선명하게 게시되어 있다. 역사의 변천은 어언간 오백여 년이 경과하니 강론경전(講論經傳)하고 궁행도의(躬行道義)한 선비가 다수양명(多數揚名) 하였다.

 

본 향교는 창건이후로 세구월심(歲久月深)하니 풍우소침(風雨所浸)과 일광소폭(日光所曝)으로 맹우(甍宇, 용마루와 서까래)가 파루(破漏)하고 단청이 퇴색하여 태불능지(殆不能支)이므로 향중제장보(鄕中諸章甫)가 중수를 숙의하였으나 재력 부족으로 실현치 못하던 중 전교(典校) 백우종(白祐鍾)과 (유도회) 지부장 전태식(全泰植)과 장의 정태준(鄭泰俊)과 이정원(李貞源)이 재임시인 기미년(己未年, 1979)에 마침 향유(鄕儒) 이종세씨(李鍾世氏)가 해외에서 귀국하여 대성전 봉심차 내방하였으므로 이 정상을 보이고 중수 필요성을 말한 바 개연장탄(慨然長嘆)하고 독단으로 거화(巨貨) 칠백만금(七百萬金)을 헌성하여 교궁(校宮)을 중수하니 경내가 환연일신(煥然一新)케 되었으므로 유림이 합동하여 고유낙성(告由落成)하나니 전유림의 긍지로다.

 

공은 타국이역(他國異域)에서 행산(幸酸)과 고초를 극복하고 성공한 실업가로서 선대는 합천이공(陜川 李公) 강양군(江陽君) 휘(諱) 개(開)와 문질공(文質公) 강천선생(薑川先生) 휘(諱) 예(芮)와 숭정대부(崇政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휘(諱) 위(瑋)는 모두 현조(顯祖)시니 화벌(華閥)의 후예(後裔)라. 품성이 의연하고 천자성근(天資誠勤)하며 모성숭유(慕聖崇儒)의 정신과 그 성의가 참으로 가상하도다.

 

이 공적을 찬양하기 위하여 향중 공의(公議)로 공적비를 건립케 되니 공은 유림의 귀감으로 덕유산의 위용과 화림(花林), 심진(尋眞), 원학(猿鶴)의 청류(淸流)가 영원히 존재하듯이 방탁(芳躅, 훌륭한 행적)도 길이 후세에 영전(永傳)하리로다.

 

이에 유교발전을 위해 기여한 공의 공로에 사의를 표하며 그 내용을 간추려 비문으로 찬(撰)하노라.

 

공부자탄강(孔夫子誕降) 2540년 기사(己巳, 1989) 7월  일

 

성균관장(成均館長) 김경수(金敬洙) 찬(撰)

 

진양(晉陽) 정대갑(鄭大甲) 서(書)

 

 

 

안의향중(安義鄕中) 건(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