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특집] 388년 전 그날의 아픈 기억,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다)- <승정원일기>를 통해 살펴본 병자호란(丙子胡亂)

「동궐도(東闕圖)」에 그려진 승정원의 모습으로,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동쪽에 위치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기 전까지는 경복궁 근정전의 서남쪽 월화문(月華門) 밖에 있었다. 조선왕조 기록의 산실 『승정원일기』는 국보 및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다. 조선 왕실에서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을 거쳐 지금은 서울대 규장

오흥녕 2025. 1. 20.

 

 

「동궐도(東闕圖)」에 그려진 승정원의 모습으로,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동쪽에 위치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기 전까지는 경복궁 근정전의 서남쪽 월화문(月華門) 밖에 있었다.

 

 


 

 

 

 

 

 

 

조선왕조 기록의 산실 『승정원일기』는 국보 및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다.

 


 

 

조선 왕실에서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을 거쳐 지금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매일의 일기는 도승지 등 6승지의 명단 및 근무현황, 주서(注書)·가주서(假注書)·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 등 기록자의 명단 및 근무현황, 국왕이 어느 장소에 머물렀는지 등의 내용이 앞부분에 기록됐다.

 

 


 

 

『승정원일기』에는 성균관과 관련된 내용도 무수히 많다(1626년 10월27일 정광성이 아뢴 내용 기사).

 


 

 

 

 

2017년 10월에 개봉된 영화 「남한산성」은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묘호란 때와 달리 병자호란에서의 청나라 군대는 조선의 수도인 한양으로 빠르게 진격했다.

 


 

 

『승정원일기』 1637년 1월30일 기사에 인조가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가는 모습이 적혀있다.

 


 

 

인조가 항복하기 위해 나갔던 서문은 남한산성의 4개 대문 중 가장 규모가 작다.

 


 

 

『승정원일기』 1637년 1월30일 기사에 인조가 항복하는 모습 전체가 생생하게 기록됐다.

 


 

 

청 태종이 머물렀던 서울 삼전도에 청나라의 승리를 상징하는 '서울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몇 차례의 이전과 사건들을 거쳐 서울 삼전도비는 현재 잠실 석촌호수 옆에 위치하고 있다.

 


 

 

비석의 앞면은 청나라 황제를 상징하는 용의 문양 아래에 만주어, 몽골어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의 '비석 없는 거북이 모양의 귀부'는 제작되었다가 청의 거부로 미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성득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1. 조선 왕조 기록의 산실 『승정원일기』

 

역사의 시간은 일단 지나가면 당시의 일을 떠올리게 하는 계기나 찾아보려는 노력이 있지 않으면 잊혀 진다.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이후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이나 대부분은 기록되지 않아 흔적이 사라졌고, 그나마 문자를 통해 기록하는 과정이 시작되면서 일부분이 존재했으나 그것도 전쟁이나 화재, 파손 등으로 계속 사라지고 없어지다가 겨우 살아남은 것이 전해지고 있다.

 

한국 기록문화의 우수성은 여러 자료를 소개하는 매체와 언론의 보도를 통해 전세계적으로도 알려졌다. 그러나 의외로 『승정원일기』는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일부 국민들만 인식하고 있을 정도로 덜 알려진 측면이 있다.

 

조선시대 승정원(承政院)은 지금 한국 정부에서 대통령실의 역할을 했던 곳으로, 현재의 대통령실이 국가 최고 수반(首班)인 대통령을 보좌해서 주요 정책을 추진하는 역할을 하는 것에 비해 승정원은 국가 권력의 최고 정점인 국왕의 명령을 출납(出納)했던 직속기관이었으며 정원(政院), 후원(喉院), 후설(喉舌, ‘목구멍과 혀’라는 뜻으로 국왕의 입 기능을 한다는 의미, 『시경』의 ‘왕명을 출납하니 왕의 목이요 혀로다(出納王命 王之喉舌)’에서 유래됨), 은대(銀臺, 은빛 건물이라는 의미로 중국 송나라에서 궁궐 은대문 안에 비변사를 두고 황제에게 올리는 문서를 주관한 데서 유래됨)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도승지(都承旨)가 업무를 총괄하고 좌승지(左承旨), 우승지(右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동부승지(同副承旨) 등 6승지 외에 주서(注書) 2인이 매일 왕명, 각종 행정 사무와 의례(儀禮) 등에 관한 내용들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정리해서 『승정원일기』라는 형태의 기록물을 남겼는데 워낙 업무량이 많아서인지 가주서(假注書) 등을 임명하는 경우도 흔했다.

 

1392년 왕조의 건국과 함께 시작된 기록들을 묶어 국왕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다음 왕의 대에 편찬된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승정원일기』는 승정원이 설치된 1400년(정종 2)부터 초서(草書, 필획을 가장 흘려 쓴 서체로서 획의 생략과 연결이 심하다. 전서(篆書), 예서(隸書)를 간략히 한 것으로 행서(行書)를 더 풀어 점획을 줄여 흘려 쓴 것인데, 초고(草稿) 따위에 씀)로 작성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1592년 5월2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수도였던 한양(漢陽, 지금의 서울 강북지역)이 왜군에게 점령되는 과정에서 경복궁 등 주요 궁궐에 화재가 발생하며 이전의 기록들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1624년(인조 2) 3월에 발생한 이괄(李适)의 난으로 반란군이 수도 한양을 점령하고 국왕 인조가 충남 공주까지 피신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30여 년간의 기록이 사라지면서 현재는 1623년(인조 1) 음력 3월12일부터 1910년(순종 4) 음력 7월25일까지 288년의 내용들이 총 3,243책, 2억2천650만여 자(字)로 정리되어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보관되어 있다.

 

1400년부터 1623년 음력 3월11일까지의 기록이 모두 없어졌고 이후의 기록만 있는데도 『조선왕조실록』의 4배, 명나라 실록의 15배에 이를 정도의 방대한 양으로 지난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가치를 더욱 인정받았다.

 

1965년 11월 설립된 민족문화추진회(民族文化推進會) 시절인 1994년부터 시작된 『승정원일기』 번역사업은 지난 2007년 교육부 산하의 한국고전번역원(韓國古典飜譯院)으로 확대, 개편된 이후인 지금까지 31년 동안 국가의 예산 지원을 받으며 이뤄지고 있지만 워낙 방대한 분량으로 인해 38% 정도만 진행됐고, 지금은 조선 후기의 각종 제도 변화를 꾀했던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대의 번역이 집중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현재 속도를 감안하면 2049년 정도는 되어야 번역이 완료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2.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병자호란의 전개

 

 

지난 2017년 10월 영화 「남한산성」이 개봉되고, 384만 명의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막연하게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들이 저 정도로 비참하고, 현실이 냉정했으며, 이 땅의 아픔이 엄청났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다.

 

필자 역시 당시 유행이던 이 영화를 보며 상당한 정도의 느낌을 받았는데, 한편으로는 ‘『승정원일기』에는 어떻게 묘사되어 있을까?’가 궁금해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역시나 국왕 인조와 조정 신료들이 전쟁과 관련하여 논의했던 내용들을 비롯해 47일간 남한산성에서 버티다가 끝내 굴욕스럽게 항복하던 장면까지도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먼저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해보면 중국의 만주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며 명나라와 패권 다툼을 하던 후금(後金)이 제2대 태종(太宗, 재위 1626-1643)이 통치하던 1636년 4월에 청(淸)으로 국호를 바꾸고 그해 12월2일 약 13만 여명의 군사를 보내 조선 침략을 감행한 것에서 비롯됐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이끄는 6천여 기병이 선봉대로 심양을 출발한 지 약 1주일 만인 12월8일 처음으로 압록강을 건넌 후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지키는 의주의 백마산성을 우회하며 곧바로 남하하여 12월14일에 홍제원(弘濟院 지금의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에 도착하였고, 애초 강화도로 이동하려던 국왕 인조는 길이 막히자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을 홍제원으로 보내 시간을 끌도록 하며 그 틈을 타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으나 상황을 파악한 청의 선봉 부대는 다음 날인 12월15일 남한산성을 완전히 포위했다.

 

『승정원일기』는 매일의 기사 앞부분에 국왕이 어디에 있는지를 표시하고 있는데, 1636년 음력 12월14일에 (국왕 인조를 태운) 대가(大駕)가 남한산성에 도착했음과 12월15일부터 국왕이 남한산성에 머무르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한산성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국왕 인조와 왕실 가족, 신료, 군사 1만 3천여 명 등 총 1만 5천여 명의 관계자들 및 다수의 일반 백성들이 있었으나 남아있는 식량은 약 50여 일을 버틸 수 있는 1만 4천여 석이 전부였고, 국왕을 돕기 위한 근왕병(勤王兵)이 전국 각지에서 오기를 기다렸으나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청나라 군대의 견고함과 강력한 위세 때문에 바라던 근왕병은 거의 오지 못했고 설령 오더라도 가까이 접근조차 할 수 없었는데, 춥고 배고픈 환경에서 시간이 흐르며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자 성 안의 혼란은 극심해졌다.

 

『승정원일기』 1636년 음력 12월17일의 내용을 보면 지난 1623년 음력 3월12일 전격적으로 단행된 인조반정(仁祖反正) 당시의 주요 공신이었던 김류(金瑬, 1571-1648)와 홍서봉(洪瑞鳳, 1572-1645)이 ‘사세가 이미 급박하니, 화친을 청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임금 인조와 신하들이 모두 울면서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인조 : (울면서) 지금 이런 형세가 되었소. 300년간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매우 중한 은혜를 받았는데, 폐조(廢朝, 광해군) 때에도 없었던 일을 하루아침에 당하고 말았으니 경들이여, 이를 어쩐단 말이오? 윤리 기강이 무너진 시절을 만났지만 다행히 당시 절개를 지키던 여러 현인과 난국을 바로잡는 사업(事業)을 거행하여 임금의 자리에 앉아서 임금의 일을 행한 지 이제 14년이 되었소. 그사이 견양(犬羊)과 금수(禽獸) 같은 처지가 될 줄 어찌 짐작이나 했겠소? 그렇지만 경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으리오? 내가 용렬하고 무능해서 이렇게 망극한 변란을 초래하게 된 것이오. 경들이여,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신하들 : (모두 울면서) 신들이 못나서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하늘에 무슨 죄를 지으셨겠습니까」

 

12월18일의 『승정원일기』에서는 영화 「남한산성」에서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崔鳴吉, 1586-1647)과 극명하게 대립하며 싸움을 주장했던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국왕 인조와의 대화 과정에서 ‘오늘날의 형세는 화친으로써 적을 물리쳐야 마땅하다’며 화친을 주장하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다만 그는 ‘반드시 싸우겠다는 태세를 보인 뒤에야 화친이 굳건해질 수 있다’며 무조건적인 화친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성을 지키는 군사가 도망치려다가 잡히고 군병들이 추운 날씨에 얼고 굶주리며(『승정원일기』 1636년 12월20일), 청나라 군대에 대한 소규모 전투에서 군사들은 출전을 원하는데 장수는 한 사람도 출정하지 않는 상황(『승정원일기』 1636년 12월22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사대부의 노비를 뽑아 성을 지키게 하거나(『승정원일기』 1636년 12월24일) 말먹이 풀이 떨어져 굶어 죽기 직전인 말들을 도살해 장수와 군졸들에게 먹이게 하는(『승정원일기』 1636년 12월25일) 등 성 안의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게다가 드디어 다음 해인 1637년 1월1일에는 청 태종이 직접 남한산성에 도착하여 조선의 잘못을 꾸짖는 글을 보내오기까지 하고(『승정원일기』 1637년 1월2일), 이에 대해 화친을 청하는 답서를 보내기도 하였으나(『승정원일기』 1637년 1월3일) 청 태종은 속임수로 기만하지 말고 항복하라는 서신을 보내오며(『승정원일기』 1637년 1월17일) 압박의 강도를 더욱 높였으며, 다음 날에 인조는 청 태종에게 보낼 국서를 작성해 최명길에게 온당하지 못한 곳을 감정하게 하였다(『승정원일기』 1637년 1월18일).

 

청 태종에게 보낼 국서와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조판서 김상헌은 영화 「남한산성」에서 많은 이들의 심금(心琴)을 울렸던 장면의 모습으로 국왕 인조를 극구 만류했다(『승정원일기』 1637년 1월18일).

 

「김상헌 : (국서를 찢고 통곡하면서 청대하여 아뢰기를) 신이 병으로 물러나 밖에 있다가 지금 비국에 도착하여 저들에게 답하는 국서를 보고서 저도 모르게 통곡하였습니다. 명분은 문란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어찌 성상께서 차마 이런 일을 하시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군신 상하가 함께 성을 지키다가 만약 하늘의 보살핌을 입는다면 혹 뭔가 도모해 볼 수 있겠지만 하루아침에 이렇게 하고 나면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군신이 이는 생각하지 않고 지레 문서를 작성하여 스스로 명분을 문란하게 하니 저들이 만약 군신의 의리로써 요구하면 끝내 성을 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염려할 바가 못 됩니다. 국가가 패망하게 되는 길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니 가령 이렇게 해서 겹겹의 포위를 벗어날 수 있다 하더라도 앞으로 명분에 관해 어찌 할 말이 있겠습니까. 신이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서 문서를 찢어 버렸으니 신의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70의 나이에 무슨 더 바랄 것이 있어 구차히 살기를 도모하겠습니까. 속히 죽여 주소서

 

인조 : (한참을 탄식하다가 이르기를) 경이 한 말이 옳기는 옳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李肯翊, 1736-1806,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아들)이 지은 책으로,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담고 있지 못한 많은 야사(野史)를 담고 있어 역사학 등에서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김상헌이 찢은 국서를 화친을 주장하던 최명길이 쓸쓸히 웃으며 주워 모아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데, 『승정원일기』에서는 김상헌이 국서를 찢던 그날 바로 청 태종에게 보낸 인조의 국서 내용이 담겨 있다(『승정원일기』 1637년 1월18일).

 

「조선 국왕은 삼가 대청국(大淸國) 관온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에게 글을 올립니다. 삼가 명지(明旨)를 받들매 거듭 유시해 주시니 호되게 책망한 것은 바로 지극하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추상(秋霜)과 같은 엄함 속에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의 기운이 깃들어 있어서 받들어 읽으매 황공하고 감격스러워 몸 둘 곳이 없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대국의 위덕(威德)이 멀리까지 가해지고 여러 번국(藩國)이 입을 모아 칭송하니, 하늘과 사람이 귀부하여 크나큰 천명이 막 새로워지는 때입니다. 그런데 10년 동안 형제의 나라로 있었던 소방(小邦, 조선)이 오히려 운세가 막 흥기하는 이 때에 죄를 얻었으니 마음에 돌이켜 생각해 보매 때늦은 후회가 막심합니다. 지금 소방이 원하는 것은 오직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구습을 말끔히 씻고 온 나라가 명을 받들어 여러 번국과 나란히 하는 것뿐입니다. 절절한 저희의 심정을 굽어살피시어 자신(自新)하도록 진실로 허락하신다면 문서와 예절에 의당 행해야 할 의식이 있으니 이를 강정하여 행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에서 나오라고 하신 명은 실로 인자하게 감싸 주는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합니다만 생각해 보건대 겹겹으로 둘러싼 포위가 풀리지 않았고 황제께서 한창 노여워하고 계시니 여기에 있어도 죽고 성을 나가도 죽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용정(龍旌)을 우러러보며 죽음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마음을 결정하자니 그 심정이 또한 서글픕니다. 성 위에서 천자에게 절했던 옛사람이 있었던 것은 예는 폐할 수 없지만 군대의 위세 역시 두려워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방이 진정 원하는 바가 이미 앞에서 진달한 것과 같고 보면 이것은 더 할 말이 없는 것이고 정신을 차린 것이며 마음을 다해 귀부하는 것입니다. 황제께서는 지금 만물을 살리는 천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계시니 소방이 어찌 온전히 살려 주고 관대하게 길러 주는 대상에 끼일 수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황제의 덕이 하늘과도 같으시니 꼭 가엽게 여겨 용서하실 것이라 여겨 감히 실정을 토로하며 공손히 은전(恩典)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이 국서는 청나라 측의 수신 거부로 전달되지 못하고, 1월21일에야 전달되었으며, 청나라 진영을 오가는 최명길에게 인조는 ‘성을 나가는 것을 억지로 요구해서는 안 되고,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면 죽기를 각오하겠다’는 뜻을 전하게 했으나(『승정원일기』 1637년 1월21일) 강화도로 피신한 왕족들이 모두 청나라 군대에게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승정원일기』 1637년 1월26일) 더 이상의 항전이 불가능함을 파악한 조선 조정은 성을 나가 항복하기로 결정했고 여기에 대한 관료들의 반대가 이어지는 가운데 최명길이 작성한 인조의 국서가 청 태종에게 전해졌다(『승정원일기』 1637년 1월27일).

 

 

 

3. 1637년 음력 1월30일, 그날의 모습을 전한 『승정원일기』

 

청 태종이 머무르는 군대 본진이 삼전도(三田渡,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승정원일기』 1637년 1월29일) 가운데 ‘성을 나갈 때 시위하는 사람을 500명을 넘지 말라’는 청나라의 요구로 인해 국왕 인조는 진시(辰時, 오전 7시-9시)에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와 관료, 시종 등 50여 명만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다.

 

산에서 내려간 인조가 형초(荊草, 가시풀)를 깔고 앉아 있자 용골대와 마부대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 수백 명이 도착해 좌우에서 호위하다가 옛 광주(廣州) 앞에 이르러서는 시위대도 물리친 채 인조와 소현세자, 극소수 관료 및 호위 인원만 나아갈 수 있었는데 당시 분위기를 『승정원일기』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비석 앞에 이르러 멀리 바라보니 황제가 마전포(麻田浦)에 단을 설치하고서 위에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주 차림에 궁검을 찬 자가 각각 방진(方陣)을 치고 옹립하였으며, 깃발과 창검이 사방에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하였는데, 대략 중국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동쪽 작문(作門) 밖에 머물렀던 인조는 (그동안 오랑캐로 치부했던) 청나라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했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신하가 황제를 만날 때 갖추는 예의로 세 번 무릎 꿇고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으며 야사에서는 인조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얼마나 처참하고 치욕스러웠을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용골대 등이 들어가서 청 태종에게 보고하고 나와서 인조를 인도해 동쪽 작문을 지나서 단 아래에 북쪽을 향해 마련된 (신하의) 자리에 나아가게 하였고, 인조는 다시 (북쪽에 앉은 청 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례를 행했으며 이후 인조는 단의 동쪽,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의 효종(孝宗, 재위 1649-1659)) 등 강화도에서 잡힌 이들은 단의 서쪽에 자리했다.

 

영화 「남한산성」에서는 삼배구고두를 한 차례 한 것으로만 나오지만 『승정원일기』에는 황제가 있는 곳에 도착해서 한 번, 의식이 진행될 단상에 오르기 전에 다시 한번을 한 것으로 기록되는 점이 차이가 있다.

 

그러다가 청 태종이 용골대 등을 통해 인조가 단에 오를 것을 청하였는데, 청 태종은 북쪽에 좌정(坐定, 앉음)하고 인조는 동북쪽 윗자리에서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들과 조선의 왕자들도 서쪽과 동쪽을 향해 앉되 청나라 왕자들보다 아래에 조선 왕자들이 앉았다.

 

이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인조는 또 한 번의 굴욕을 경험하는데, 청 태종이 갑자기 단에서 내려가 소변을 보는 바람에 인조도 단에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는 일을 겪었다. 삼배구고두례를 두 번 하고, 의식 도중 황제가 소변을 보러 가는 황당한 일까지 겪으며 인조는 어떤 심정이 들었을까?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으니 활쏘기 솜씨를 보이라’는 청 태종의 명령에 따라 조선의 시위군이 활을 쏘았으나 다섯 발 모두 빗나갔고, 청나라의 왕자와 장수들은 한꺼번에 몰려들어 활솜씨를 뽐내는 가운데 술상을 내오게 하여 세 번 돌린 후 청나라 군사들이 끌고 온 큰 개들에게 청 태종이 직접 고기를 잘라서 던져주는 모습도 연출되었다.

 

의식이 끝난 후 밭가에 머무르다가 유시(酉時, 오후 5시-7시)가 되어서야 청 태종의 환궁(還宮) 명령을 받고 송파나루로 향한 일행은 나루를 지키던 군졸들이 거의 다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정박되어 있자 ‘백관들이 앞을 다투며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며’ 배에 올랐다.

 

인조가 한강을 건너자 청 태종 일행이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을 통해 건너서 장막(帳幕)으로 나아갔고, 용골대 등이 군병을 이끌고 길의 좌우에 도열해 인조 일행을 인도했는데 길 양옆에서 울부짖는 백성들이 1만 명을 헤아렸으며, 일행은 초경(初更, 오후 7시-9시)에 도성인 한양의 창경궁(昌慶宮)에 도착했다.

 

청 태종은 2월2일에 삼전도에서 철군하여 북쪽으로 향했는데(『인조실록』 15년(1637) 2월2일) 인조는 전곶장(箭串場, 사복시(司僕寺)이 관리하던 살곶이목장으로 지금의 서울시 성동구·동대문구·중랑구 일대에 있었음)까지 나가서 환송했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는 볼모가 되어 2월8일 청나라를 향해 출발하고(『인조실록』 15년(1637) 2월8일), 용골대 등이 이끄는 마지막 청나라 군대는 2월13일에 철수했다(『승정원일기』 1637년 2월11일).

 

 

 

4. 병자호란의 교훈

 

2개월 여의 짧은 전쟁이었지만 병자호란이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국왕 인조는 두 아들과 며느리들을 강제로 볼모로 보냈고, 5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전쟁을 초래한 책임 소재를 가리는 문제뿐만 아니라 청나라에서 도망쳐 오거나 속환(贖還)되어 온 이들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할지에 대한 문제 등에도 봉착했다.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의 북벌론(北伐論)이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되며 많은 양반 사대부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었던 최명길 등의 주화론(主和論, 현실적인 역량상 대적이 불가능하므로 청나라와의 화친으로 훗날을 도모하자는 주장)을 내세웠던 이들은 이후 내내 마치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다뤄졌으나 오히려 현대에 이르러 역할이 재조명되고 있고, 김상헌 등의 주전론(主戰論, 오랑캐인 청나라와의 싸움을 통해 명분과 절의를 지키자는 주장)을 내세웠던 이들은 이후의 역사에서 매우 존숭되었고 그들의 애국심에 대한 평가도 상당하나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당시 조선이 청나라에 맞서는 것이 과연 가능했는가?’와 ‘인조 정권의 친명배금(親明排金,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후금(청나라)을 멸시한 정책)이 나라를 망하게 하고 국민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을 수도 있었다’는 평가들이 나오는 가운데 최근에는 더욱 다양한 논의들이 전개되고 있다.

 

어제의 우방(友邦)이 더 이상 미래의 우방이 되지 못하고, 점점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냉혹한 현실에서 388년 전에 이곳 대한민국의 땅에서 전개되었던 일련의 사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사회와 개인들에게 질문과 교훈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같다.

 

어느 조직이나 기관이든 ‘우물 안의 개구리’ ‘우리끼리만 칭찬하고 박수 치는 자화자찬(自畵自讚)’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고,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와 ‘더 나은 모습을 만드는 사례 및 그 이유는 무엇인가?’를 찾는 노력을 끊임없이 전개할 때 굴욕과 패배 대신 명예와 승리의 역사가 펼쳐질 것임을 병자호란은 알려주고 있다.

 

선조들이 『승정원일기』 기록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창간 56주년의 역사를 가진 유교권 유일의 전국신문’ <유교신문>도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우리나라 유교권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정론직필(正論直筆)의 자세를 견지(堅持)해줄 것을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