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수 전북대 철학과 교수
1. 한국 유림은 전문가인가, 지식인인가? or 한국의 현실과 유림의 위상
20세기 대한민국은 식민지배와 해방, 남북분단과 독재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발전을 이룬 성공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세계인들은 한국을 ‘산업화된 선진 민주주의 국가’로 부르는데 망설이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많은 아픔이 있었지만 우리 국민은 이에 굴하지 않고 한마음이 되어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동북아의 대표 국가를 만들었다.
을사년(乙巳年) 올해는 광복 80주년, 을사늑약 120주년이 되는 해다.
대통령은 구치소에 수감되어 탄핵 심판을 기다리고, 거대양당 주도의 국론 분열은 좀처럼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이룩해 온 한국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인가? 우리 시대의 지식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조선의 선비였다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논어』의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는 공자의 말씀이 더욱 절실해지는 요즘이다.
우리 역사를 보면, 국가적 위기 상황에는 언제나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전국의 유림들이 의병을 조직하는 데 앞장섰으며, 일제 치하에서는 애국적 지식인들이 독립운동과 국민계몽을 위해 온몸을 바쳤다. 해방 후 공산주의와의 전쟁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고귀한 생명들이 산화(散花)했으며, 독재 치하에서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온 국민이 떨쳐 일어났다.
2025년 한국이 직면한 현실에서 우리 시대의 양심적 지식인은 누구인가? 그리고 한국 유림(儒林)은 유교의 전문인(專門人)인가? 아니면 지식인(知識人)인가? 둘 중 하나라면 과연 어떤 사회적 책무를 가지는가?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유림은 과연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가?
2. 전문가와 지식인
현대 한국 사회를 ‘지식정보화사회’라고 말한다. 이 패러다임에서는 지식과 정보가 모든 부가가치 창출의 기본이 된다. 여기에서 지식과 정보를 다루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전문가(專門家)’ 혹은 ‘지식인(知識人)’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전문가와 지식인, 특히 사회지도층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전문가와 지식인들에게 부여된 사회적 책임에 대한 실망으로 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전문가와 지식인들 역시 보통 사람들에 비해 그리 특별한 존재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전적으로 평범한 사람으로 볼 수도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문가와 지식인들은 특별한 존재도 평범한 존재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인가?
먼저 ‘전문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전문가는 흔히 의사・한의사・변호사・회계사・변리사・건축사・요리사・교사 등 대체로 ‘사(師)・사(士)’자로 끝나는 ‘전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사전적 의미로는 ‘어떤 한 가지 일을 전문으로 하거나 한 가지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한편, ‘지식인’은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전문(專門)’이라는 단어와 달리 ‘지식(知識)’이라는 단어는 사용자에 따라 매우 다르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지식’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물에 대한 명료한 인식과 판단’ 혹은 ‘배우거나 연구하여 알고 있는 내용’, ‘인식에 의해 얻어져 객관적으로 확증된 성과’ 등이다. 따라서 지식인이란, ‘지식 계급에 속하는 사람’ ‘일정한 수준의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 그리고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명료하게 인식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명료함’이다. 지식인에게 필요한 명료함이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명확하게 파악한 후 얻어진 ‘진실’에 기초한다. 따라서 지식인은 ‘대상 세계에 대한 명료한 인식과 그것에 근거한 진실성과 진정성을 소유한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 서구 지성을 대표하는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1928-현재) 미국 MIT공대 명예교수는 지식인을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 우리의 관심사와 행동에 대해 숨김없이 말할 수 있는 진실한 존재이다’라고 정의한다.
한편, 프랑스 태생의 철학자로 지식인의 실존적 의미를 강조했던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는 지식인을 ‘사회적으로 중간계층에 속해 있는 가장 불우한 의식(意識)을 가진 존재’라고 정의한다. 왜냐하면 지배계급은 언제나 지식인을 자신의 지배수단을 연구하는 단순한 기능인으로밖에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지배 계급에게 지식인은 불편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일종의 ‘필요악(必要惡)’인 것이다. 반면 피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보면 지식인은 지배계급의 앞잡이로 인식된다. 이처럼 지식인은 어떠한 계급에 의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지식인이 사회의 어떠한 모순에 대해 비판하려고 할 때 그는 ‘자기와 무관한 일에 참견하려고 하는 귀찮은 존재’로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자신의 권한 밖에까지’ 관여하는 데에 지식인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여의 기준에서 그는 (지식) 전문가와 지식인을 구별하고 있다. 즉 (지식) 전문가는 지배계급이 통치수단으로 제시하는 기존 이데올로기의 ‘전문적 연구자’ ‘지배권의 봉사자’ ‘전통의 수호자’로 기능한다. 그러나 자신의 연구 분야에서 보편적 진리를 얻음으로써 자각한 (지식) 전문가가 그것을 사회와 인간 전체에게로 ‘보편화’시킨다면 그는 진정한 지식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때 그가 지향하는 보편성은 지배계급과 자신의 계급적 특수주의를 파괴하려는 경향을 띤다. 따라서 지식인이 빠지게 되는 모순과 갈등은 바로 이와 같은 특수주의와 보편주의의 갈등에서 오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볼 때, 지식인이란 ‘대상 세계에 대한 명료한 인식과 끊임없는 자기반성(Self-reflection)을 통해 주체적으로 실천하는 존재로서 현실의 대립・갈등을 화해(Harmony)로 이끄는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다.
3. 현대 지식인의 책임
팔레스타인 출생의 미국 비평가로 지식인의 책임을 강조했던 사이드(Edward Said, 1935-2003)는 자신의 저서 권력과 지성인에서 지식인의 문제점을 ‘안정적인 경제적 요건을 갖추고 있으면서 자신의 연구실 밖의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폐쇄적인 문학 교수와 같은 태도’에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이러한 유형의 지식인들은 사회변동에 관한 것보다는 주로 학문적 진보만을 목표로 하는 난해하고 비세속적(非世俗的)인 화려한 산문을 쓴다’고 비판한다.
사이드는 현대의 지식인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점을 ‘전문직업인’의 태도 즉, ‘전문직업주의(Professionalism)’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지식인의 ‘아마추어리즘(Amateurism)’을 강조한다. 사이드가 주장하는 아마추어란 단순히 직업적인 전문성을 갖추는 단계를 뛰어넘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해 도덕적・철학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순수한 정신과 태도를 갖춘 사람을 의미한다.
한편 노암 촘스키는 “지식인의 책무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몇 가지 수식어를 덧붙여 지식인의 책무를 밝히고 있다. 그는 지식인의 도덕적 과제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 ‘적합한 대중’에게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진실을 찾아내 알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도덕적 행위자로서 지식인이 갖는 책무는 ‘인간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문제’에 대한 진실을 ‘그 문제에 대해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대중’에게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현대사회의 지식인에게는 이러한 진실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이처럼 지식인의 진실성을 강조한 촘스키는 대중에게 진실을 알리는 이유에 대해 ‘교화(敎化)의 목적’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목적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적인 행동을 촉구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세상의 고통과 슬픔을 줄여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지식인의 책임이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뜻일까?
촘스키는 당대(堂代)에 존경받는 지식인들이 종종 몇 세기가 지난 뒤에 거짓 선지자(先知者) 혹은 간신(奸臣)으로 평가되어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반면 당대에 배척받은 지식인이 몇 세기가 지난 후에 진정한 선구자와 예언자로 존경받는 경우를 상기시킨다. 경우에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정직과 성실의 대가로 당대에 가혹한 처벌을 감수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지식인에 대한 평가가 단시간 내에 이루어질 수 없음과 오직 지식인의 책임과 그에 대한 평가는 진실성 여부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진실을 말하는 지식인이라 하더라도 항상 당대에 사회적 존경과 평가가 수반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언론인·전직 정부 관료·학자로 현대사회의 지식인을 비판했던 레지 드브레(Régis Debray, 1940-현재)는 자신의 저서 지식인의 종말에서 지식인의 언어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 듣기 좋은 소리일 필요는 없으며, 지식인은 우리의 관심사와 행동에 대해 숨김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도덕적 나르시시즘(Moral Narcissism)’이라고 비판하며, “실제로 우리는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보다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에게 더 큰 찬사를 보내고 있지 않았던가!”라고 말한다. 드브레는 이러한 지식인의 허위와 위선・직무유기・무기력함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지식인 스스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드브레의 이러한 비판은 본래 현대 프랑스 지식인들을 겨냥한 것이지만 한국의 현실을 비추어 볼 때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도 그의 비판에서 그리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최근 제기되는 지식인들에 대한 사회적 비판은 사실 드브레의 비판과 전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4. 유교 지식인이란?
유교 지식인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에서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유교인(儒敎人)을 의미하는 ‘유림(儒林)’이라는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유림의 사전적 의미는 ‘유학을 신봉하는 무리’ 혹은 ‘사림(士林)’이다. 역사적으로 사림이란 고려 말부터 조선 초부터 사용되기 시작된 용어로서 두 차례의 사화(士禍)를 겪으며 정치세력화 되었던 유교 진영의 개혁성향의 인물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조선 중기 이후 중앙정계에는 진출하지 않고 당시 중앙권력을 견제하는 세력으로서 지방의 서원(書院)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한말(韓末)에는 의병을 주도하던 유교 지식인이었다.
그렇다면 고려 말~조선조에 유교적 소양을 가지고 활동했던 학자들을 모두 유교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을 해결하고 우리 시대 유교 지식인을 새롭게 정의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중국의 유교 지식인 전통에 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4-1. 중국전통의 유교 지식인
먼저 중국의 유교적 전통에서 지식인 개념의 변화를 살펴보자.
은(殷)・주대(周代)에는 지식인을 ‘다사(多士)’ ‘서사(庶士)’ ‘경사(卿士)’로 불렀다. 당시 ‘사(士)’는 대부분 귀족계급이었다. 특히 은대(殷代)의 복사(卜辭)에 등장하는 ‘복인(卜人)’은 당시 지식인의 대표였다. 한편 주대(周代)에는 주로 육예(六藝) 중심의 교육을 실시했는데, 이러한 교육을 받은 사람은 ‘술사(術士)’ ‘유(儒)’라고 불렀다. 이들 역시 은대(殷代)의 ‘복인(卜人)’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일정한 관직이 있었다. 이처럼 공자 이전의 중국 고대 지식인이란 봉건귀족이거나 관직에 임명된 자로서 육예(六藝)를 겸비한 비교적 신분이 안정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춘추시대에 이르러 봉건질서가 해체되고 신분질서의 변동이 가속화됨으로써 당시 지식인의 사회적 지위도 변화되었다. 특히 ‘선비로서 도(道)에 뜻을 두고서도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자와는 더불어 의논하지 못할 것이다(志於道, 而恥惡衣惡食者, 未足與議也)'라고 하는 공자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특정한 지위 없이 기존의 지배계층인 선비가 된 자가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또한 지식의 내용 역시 육예(六藝)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내면적 초월(Inward transcendence)’ 영역으로 확장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공자 이후부터는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하는 지식인계층이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유사(游士)’이다. 진(秦)・한대(漢代)에 이르러 관리와 백성의 계급 구분이 강화됨으로써 당시 지식인의 주류였던 관리들은 세습적 신분인 ‘사족(士族)’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에 이르러 유교가 쇠퇴하게 되자 도가(道家)의 ‘명사(名士)’와 불교의 ‘고승(高僧)’들이 당대의 지식인 역할을 일정 기간 대체하기도 했다.
한편 수(隋)・당대(唐代)에는 두보(杜甫, 712-770)와 백거이(白居易, 772-846) 등과 같은 시인문사(詩人文士)들이 등장하여 ‘사회적 양심’을 대표하였다. 또한 송대(宋代)에 이르러서는 유교가 다시 부흥하여 범중엄(范仲淹, 989-1052)과 같이 ‘천하를 자기 책임으로 인식하는(以天下爲己任)' 사대부(士大夫)가 등장함으로써 유교 지식인의 새로운 표준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성격을 가진 ‘지식인[士]’의 개념은 명(明)・청대(淸代)까지 지속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 지식인 개념의 변천 과정에서 유교 지식인의 특징을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신분적으로는 사회의 특정한 계급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둘째, 학습 내용은 대체로 고대의 예악(禮樂) 전통을 위주로 하였고 셋째, 내면적으로는 도(道)의 우월성과 가치를 인식하고 있었다.
4-2. 한국전통의 유교 지식인
다음으로 한국의 유교적 전통에서의 지식인 개념을 살펴보자.
한반도에 유교가 전해진 시기는 대체로 한자(漢字) 전래시기와 일치하거나 혹은 그 이전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태학(太學)을 세워 『논어』와 『효경』을 가르친 것으로 보아 이미 유교가 당시 국가의 통치이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역시 신문왕 2년(682)에 국학을 설립하여 『논어』・『효경』을 가르쳤다. 특히 당시 대표적인 국가인재였던 화랑(花郞)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과 신라를 대표하는 유학자인 강수(强首)와 설총(薛聰) 등은 신라의 지식인이 어떠한 성격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백제는 고이왕 62년(285)에 왕인(王仁) 박사(博士)가 『논어』・『천자문』 등을 일본에 전한 것과 중앙정치기구인 남당(南堂) 제도를 통해 유교가 정치・교육 등 사회 전반적인 질서를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국민통합의 중요한 도구였으나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볼 때 여전히 유교가 국가통치의 중요한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통일신라의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계승한 과거제(科擧制) 실시는 이를 반증하는 좋은 예이다.
한편 여말・선초에 전해진 성리학은 정교이념(政敎理念)의 핵심으로서 500여 년간 조선조의 국가통치와 생활문화 전반에 영향을 주었으며, 당시 지식인을 의미하는 사대부・선비는 곧 유교 지식인의 표상이 되었다.
조선조 유교 지식인을 대표하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를 예로 들어보자.
퇴계는 1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를 위해 68세(1568)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바치고 경연(經筵)에서 강의를 하였다. 율곡 역시 40세의 나이(1575)로 『성학집요(聖學輯要)』를 바친다.
퇴계의 『성학십도』는 성리학의 기본 개념을 10개의 그림으로 표현하고 상세하게 설명함으로써 군왕(君王) 스스로가 내적 수양을 통해 성인(聖人)이 되기를 희망하는 책이다. 반면 율곡의 『성학집요』는 『대학』의 수기치인(修己治人) 원리를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책이다. 즉 율곡은 성리학적 이념과 왕도(王道)를 직접 조선의 현실에 실현함으로써 태평성세(太平聖歲)를 만들어 달라는 염원을 담아 이 책을 바친다.
이 두 책은 내외(內外)의 수양(修養)을 통해 이론적인 지식과 실제적인 능력을 겸비한 왕도정치를 지향하고 있는 점에서 동일한 성격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말에 이르러 국권상실을 겪으면서 조선의 유교 지식인들은 크게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척사위정(斥邪衛正) 계열과 개화(開化)・계몽(啓蒙) 계열로 나눠진다. 특히 일제 시기의 신지식인들은 일본의 대표적 어용학자인 타카하시 토오루(高橋亨, 1877-1966)의 왜곡된 유교 인식의 영향으로 유교를 국가패망의 주된 원인이며 청산해야 할 구시대적 유산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5. 우리 시대의 진정한 유교 지식인이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교의 본질적인 의미와 지식인의 정의, 그리고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 등을 통해 우리 시대의 유교 지식인을 새롭게 정의해 보면 대체로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유교 지식인은 유교의 본질을 명료하게 인식한 존재이다.
즉 유교의 본질은 인(仁)이며, 그 핵심윤리는 효제(孝悌)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을 가리킨다. 여기에서의 인(仁)은 ‘절제된 사랑’으로서 ‘나・너’와 ‘선(先)・후(後)’의 엄격한 구분이 있으며, 내성(內聖)의 수양론과 외왕(外王)의 정치학이 합일(合一)되어 있다. 구체적으로는 친소(親疎)의 구분에 따라 인이 실현되어야 함을 인식하며, 이러한 단계적 실천이 인간 행위의 선후(先後) 원칙임을 깨달은 존재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연구와 수양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자각함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개척하고, 궁극적으로는 ‘내면적 초월’을 달성한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유교 지식인은 지식인의 기본적인 자세로서 박학(博學)・심문(審問)・신사(愼思)・명변(明辨)・독행(篤行) 등 끊임없는 하학(下學)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상달(上達)에 이르는 군자(君子)를 지향하는 존재인 것이다.
둘째, 유교 지식인은 유교 윤리를 가족・사회・국가로 확산시키는 존재이다.
즉 유교의 핵심윤리인 효제(孝悌)를 가족 내에서 실천하고 나아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 확산시켜 나가는 사람을 가리킨다. 특히, 유교에서 말하는 가족은 ‘인간의 탄생과 교육의 공간’이며, 개인 윤리를 실천하는 최초의 장(場)임을 자각한다. 따라서 유교 윤리의 핵심은 엄연히 가족과 공동체질서를 중시하는 것이지만 결코 가족주의와 공동체주의에 머물러 그것이 모든 행동원칙을 결정하는 불변의 준거(準據)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오히려 『논어』의 ‘인(仁)으로써 자기 책임을 삼고, 죽은 뒤에야 그친다(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는 말처럼 막중한 윤리적 책임을 자임하는 것이며, 끊임없는 실천과 확산의 과정을 통해 자신을 끊임없이 완성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유교 지식인은 진실을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알리는 존재이다.
즉 자신이 확보한 진실을 개인이 독점하지 않고 건전한 비판의식을 통해 사심(私心) 없이 사회적으로 공개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유교 지식인은 보이는 현실의 이면(裏面)에 존재하는 진실(眞實)의 세계를 인식하고, 이것을 구성원들에게 올바로 알려주며 그들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계몽적 존재이다. 특히 사회계몽은 지식인의 고유임무이기도 하지만 인간계몽을 통한 현실개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유교의 교학이념을 현실사회에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지식인의 기본적인 의무를 ‘계몽(啓蒙)’과 ‘구망(救亡)’이라고 할 때 진실을 전체 구성원에게 확산하는 것은 ‘계몽을 통한 구망[구국(救國)]’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넷째, 유교 지식인은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을 소통하게 하는 존재이다.
즉 유교적 소양을 갖춘 지식인으로서 단순히 ‘전문적 연구자’에 머물러 일정한 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결코 당대(堂代)의 지배 권력에 종속되어 ‘전통의 수호자(守護者)’에 만족하며 자신의 고유한 사회적 책임을 방기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조선 시대에 자기 이익을 위해 정치권력에 몰입하여 유교를 도구화했던 일부 유교 정치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유교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처럼 유교 지식인은 당대의 ‘사회적 양심(良心)’ ‘실천적 지성(知性)’으로서 의연하게 자기의 위상을 정립해야 하며, ‘자신의 권한 밖에까지’ 항상 관여하고, 끊임없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소통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하는 존재인 것이다.
다섯째, 유교 지식인은 유교 이념을 토대로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는 존재이다.
즉 개인의 도덕적 수양의 결과를 가족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세계로 확대시켜 나감으로써 자신과 공동체를 인(仁)의 공동체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대동사회(大同社會)로의 지향(志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처럼 유교 지식인들은 당대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에 머무르지 않고 장래의 이상사회(Utopia) 건설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천하를 자기 책임으로 인식하는- 포부를 가진 존재이다. 이것이 바로 유교 지식인의 역사적 책임인 동시에 2,50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시대를 초월하여 여전히 현실적 대안으로 공맹(孔孟)의 유교에 주목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