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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종단

<四字論語> ‘將死言善’ 사람이 장차 죽음에 임할 때는 그 말이 선하다

편집부
2018.06.06·4분 읽기·조회 36

 

김용재 / 성신여대 한문교육과 교수

 


 

증자(曾子)가 병환이 있자, 맹경자(孟敬子)가 문병(問病)을 왔다. 증자(曾子)가 말씀하였다. “새가 장차 죽을 때에는 울음소리가 애처롭고, 사람이 장차 죽을 때에는 그 말이 착한 법이다.” 군자(君子)가 귀중히 여기는 도(道)가 세 가지 있으니, “용모를 움직일 때에는 사나움과 태만함을 멀리하며, 얼굴빛을 바룰 때에는 성실(誠實)함에 가깝게 하며, 말과 소리를 낼 때에는 비루함과 도리에 위배되는 것을 멀리하여야 한다. 제기(祭器)를 다루는 등의 소소한 일로 말하면 유사(有司)가 있어 하는 것이다.”(曾子有疾이어시늘 孟敬子問之러니 曾子言曰 鳥之將死에 其鳴也哀하고 人之將死에 其言也善이니라 君子所貴乎道者三이니 動容貌에 斯遠暴慢矣며 正顔色에 斯近信矣며 出辭氣에 斯遠鄙倍矣니 籩豆之事則有司存이니라. 「태백」4)

 

본래 이 經文의 전문은 󰡔논어󰡕에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새도 장차 죽을 때에는 그 울음소리가 구슬프고 애처로우며, 사람도 이 세상을 하직할 때에는 그 말이 착하고 애달프다.” 또 이와 유사한 말을 ‘유비’는 다음과 같은 유언으로 남기며 세상과 이별하였다. “새는 마지막 울음이 가장 아름답고, 사람은 죽기 전의 말이 가장 진실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죽음 앞에서는 왠지 숙연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듯하다.

 

역시 위의 언사에서도 모두 ‘죽음’을 앞둔 상황을 앞두고, 마지막 삶의 무게를 되돌아보는 장면이 오버랩 되고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임종(臨終) 전에 자신이 살아온 삶의 족적(足跡)에 대하여 미련과 아쉬움, 그리고 후회를 갖기 마련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과 속내는 끝내 숨길 수 없나 보다.

 

흔히들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후회하는 몇 가지가 있다고들 한다. 첫째, ‘어차피 이래도 한평생 저래도 한평생’인데, 왜 그렇게도 재미없고 빡빡하게 아등바등 살았을까? 좀 더 (정신적으로) 여유롭고 행복하게 살지 못했던 지난날을 후회한다. 얼마든지 기쁘고 즐겁고 유쾌하게 살 수 있었을 터인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살아가는 나로 인하여 내 주변의 친지와 지인들에게까지 고통을 주었던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둘째, ‘내 비록 풍족하게 살지 못했건 혹은 부유하게 살았건 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왜 베풀어가며 살지 못했을까’ 라는 후회를 갖는다고 한다. 어차피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空手來空手去’인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그렇게 집착하고 움켜쥐며 살아왔을까 라며, 어리석은 자신을 뒤돌아본단다. 그렇다면 마치 ‘내일 나의 生을 마감하는 삶’처럼 살아간다면, 우리네 인생은 좀 더 달라질 수 있을까? 스스로 자문(自問)해 본다.

 

물론 소동파의 “평생을 간교함과 위선으로 살더니, 죽을 때가 되어서야 진성을 보이는구나!”라는 말도 있다. 또한 조조는 임종 전에 이와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내 일생동안 했던 일들 중, 단 한 가지도 후회할만한 일을 한 적도 없고, 누구에게나 미안한 일을 했다고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오직 한 가지, 저승에 간 다음에 ‘자수’가 제 어미를 찾는다면 내 어떻게 답해야할지 그것은 모르겠다.” ‘자수’는 어려서 생모를 잃은 조조의 큰 아들이다. 천륜을 저버린 아픔이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막급(後悔莫及)일 것이니, 이 세상에 부모자식보다 더 소중한 관계가 어디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