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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종단

심산 김창숙 선생 54주기 추모제전 봉행

이지은 기자
2016.05.10·8분 읽기·조회 20

 

제례 헌관(왼쪽부터 황병근 성균관장 직무대행, 정순광 회장, 김봉구 회장)

 


 

 

초헌관이 초헌례를 봉행하고 있다.

 


 

 

축관이 독축을 하고 있다.

 


 

 

아헌관이 아헌례를 봉행하고 있다.

 


 

 

종헌관이 종헌례를 봉행하고 있다.

 


 

 

집례를 맡은 김병인 성균관 전례위원장

 


 

 

참석 내빈들

 


 

 

황병근 성균관장 직무대행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영근 성균관유도회총본부 회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문태선 지청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김창환 회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제집사가 제례 봉행에 앞서 대기하고 있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이 인사하고 있다.

 


성균관과 (사)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심산 김창숙 선생 54주기 추모제전’이 5월10일 11시 심산 선생 묘역에서 황병근 성균관장 직무대행, 김영근 성균관유도회총본부 회장, 문태선 서울북부보훈지청장, 박겸수 강북구청장, 김창환 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회장, 강대봉 유림원로회 의장, 방한수 성균관 부관장, 고석상 전 성균관 부관장, 이병준 도봉서원 원장, 김경림 의성김씨대종회장, 김웅대 장학회 이사장, 김명렬 전 의성김씨대종회장, 이성섭 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도원회 성주문화사업후원회장 등 유림과 유족, 문중 회원 130여 명의 참례자가 모인 가운데 봉행됐다.

 

우중에 봉행된 이날 행사는 성균관유도회총본부, 성균관대, 서울북부보훈지청, 강북구청, 서초구청, 광복회, 의성김씨대종회가 후원했다.

 

박광영 성균관 의례부장이 사회를 본 이날 행사는 ▶개식 ▶국민의례 ▶제례 봉행 ▶내빈 소개 ▶황병근 성균관장 직무대행 인사 ▶김영근 회장, 문태선 지청장, 김창환 회장 추모사 ▶폐식의 순서로 진행됐다.

 

제례는 초헌관 황병근 성균관장 직무대행, 아헌관 정순광 유교교육원총동문회장, 종헌관 김봉구 의성김씨수도권 회장, 집례 김병인 성균관 전례위원장, 축관 서정택 성균관 전례부위원장, 알자 육철희 성균관유도회 서울시본부 총무국장, 좌집사 맹강현 성균관 교무부장, 우집사 김광수 성균관 전례위원이 맡아 봉행했다.

 

황병근 성균관장 직무대행은 인사말에서 참석 내빈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선생의 독실한 유가 정신을 되새기며 망가져 가는 사회정의 실현의 선도적 역할에 진력해야 할 때이다. 우리 인간의 타고난 인의예지가 살아 숨 쉬는 새로운 도덕사회 구현에 앞장 서 주기를 기원해 마지않는다”고 말했다.

 

김영근 회장은 추모사에서 “선생께서 광복 후 유림단체를 통합하여 성균관유도회를 창립하신 지 70주년이 된다. 나라와 민족의 밝은 미래를 설계하고자 했던 선생의 큰 뜻을 후학들이 올바르게 유지 계승하고 있는지 다시 되돌아보아야 할 시점이다. 평생을 선비의 지조로 올곧게 보내신 선생을 추모하며 선생의 뜻과 실천적 행동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문태선 지청장은 추모사에서 “심산 선생은 일생을 일관된 자세로 불의와 독재에 맞서 조국독립과 정의를 위해 싸우신 진정한 선비이자 우리 민족의 참 스승이다.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새로운 세기를 번영의 시대로 만들어 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고 말했다.

 

김창환 회장은 추모사에서 “민족의 스승인 선생의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 애국애족의 마음은 54년이란 긴 세월이 지났어도 우리 후학들의 가슴속에 그대로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현재를 살아갈 우리들이 나아갈 길을 밝히는 횃불이 될 것이다. 행동하는 지성으로 모범을 보이셨던 선생을 다시 한 번 기억하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자”고 말했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 연보

 

1879년(1세) 8월27일(음력 7월10일)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사월리에서 아버지 의성 김씨 김호림과 어머니 인동 장씨의 외아들로 출생.

 

1905년(27세) 스승 이승희 선생과 함께 을사오적 처단 상소를 올림.

 

1909년(31세) 반민족단체인 일진회의 한일합병론을 성토하는 글을 발표하고 검거되어 옥고를 치름.

 

1919년(41세) 유림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파리평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영어로 번역하여 김규식 박사에게 보내 회의에 제출케 함. 이 일로 국내의 유림 500여 명이 검거됨. (파리장서운동)

 

1920년(42세) 박은식, 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 탄핵. 박은식 선생과 한중 혁명운동지 <사민일보> 발간. 신채호 선생과 독립운동 잡지 <천고(天鼓)> 발간.

 

1926년(48세) 상해에서 김구 선생과 함께 의열단원 나석주를 국내에 밀파하여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을 폭파케 함.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모금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킴. 이 일로 유림 600여 명이 검거됨. (독립군자금 모금운동) 임시정부 의정원 부원장(의장 이동녕)에 선출됨.

 

1927년(49세) 상해 공동조계병원에서 일경에 검거되어 대구로 압송됨. 장남 환기 국내에서 일경에 검거되어 고문 끝에 순국.

 

1928년(50세) 일제의 법 자체를 부인, 변호를 거절하고 14년 형을 받음. 2년간의 모진 고문으로 두 다리가 불구가 되고 신병도 악화됨.

 

1934년(56세) 병세 악화로 가출옥하고 한용운, 홍명희, 정인보 선생 등과 접촉함.

 

1940년(62세) 일제의 창씨개명을 단호히 거부함. 어머니 별세 후 21년만에 귀향하여 묘막에서 시묘살이를 함.

 

1943년(65세) 차남 찬기를 중경 임시정부에 밀파함.

 

1944년(66세) 고향에서 독립운동 추진하여 비밀결사체인 건국동맹 남한 책임자로 추대됨. (중앙책 여운형, 북부책 조만식)

 

1945년(67세) 건국동맹 일로 일경에 검거되었으나, 광복을 맞아 출감. 어느 정당에도 불참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환영대회 부회장에 추대됨.

 

1946년(68세) 신탁통치 반대투쟁 전개. 성균관장과 유도회총본부 위원장에 추대됨.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여 초대학장에 취임.

 

1948년(70세) 김구, 김규식, 홍명희,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선생 등과 7거두 공동성명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함.

 

1950년(72세) 6.25 때 서울에서 북측의 사상 전향 요구를 거부함.

 

1951년(73세) 1.4후퇴로 부산 피란. 이승만 대통령 하야 경고문 발표로 부산형무소에 투옥됨.

 

1952년(74세) 이시영 부통령, 신익희, 서상일 선생 등과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호헌구국 선언대회를 주도하고 옥고를 치름.

 

1953년(75세) 성균관대학이 종합대학교로 승격. 초대 총장으로 취임.

 

1956년(78세) 효창원 7열사 묘소 이장 반대투쟁위원장으로 투쟁함. 이승만 박사 3선 취임 반대 경고문 발표.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에서 사퇴.

 

1957년(79세) 자유당 정권의 압력과 술수로 성균관, 유도회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남.

 

1959년(81세) 반독재민권쟁취 구국운동을 거국적으로 전개. 이승만 대통령 사퇴 권고 서한을 발송함.

 

1960년(82세) 4.19혁명 이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 추대.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 회장 추대.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회장 선출.

 

1961년(83세) 백범 김구 선생 시해진상규명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1962년(84세) 3.1절에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을 받음. 5월10일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서거. 5월18일 사회장으로 수유동 산 127-4 묘지에 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