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도, 원망도 없어요. 그리움만 남았을 뿐
<span style="color: rgb(255, 0, 0);">65년째 성균관 생활하는 '작은 거인' 김인겸 여사</span>
수복 집안에 전해지는 해방 전후 시기 사진으로 가운데에 정인보, 김구, 김창숙 선생이 자리했다.
시집올 때 가져온 자개농 옆에 김 여사가 서 있다. 당시 집 몇 채 가격이었다.
온 가족이 생활했던 대학당(戴學堂, 일명 수복청) 앞에서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몇 년도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남편 이정우 수복과 제주도로 여행도 갔었다.
매일 쌓이는 엄청난 양의 낙엽을 불태워 없애는 것도 수복의 몫이었다.
명륜당 앞에서 큰 아들(이태형, 왼쪽), 막내 아들(이욱 수복, 오른쪽)과 가족사진을 촬영했다.
성균관에서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2015년)
오랜만에 성균관을 찾는 이들이 ‘김인겸 여사님 잘 계시냐?’ 또는 ‘수복 어머니 안녕하세요?’라고 안부를 묻는 걸 보면 그동안의 추억과 쌓인 정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궁금해하는 이들을 대신하여 지나온 삶에 대해 물었다.
▶ 혼례식 후 남산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니 무척 미인이십니다. 부자집 딸이 아무 것도 없는 집에 와서 생고생을 한 셈인데, 결혼을 주선한 할아버지를 탓하진 않으셨나요?
그때가 지금처럼 대놓고 연애하고 그러지는 못했잖아.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셔서 안 계셨고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형제자매들과 몇 백평짜리 큰 한옥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할아버지가 서울로 시집을 가라고 하시대. 이런 집에 못 보낸다고 할머니가 엄청 반대하셨는데 결국은 할아버지 고집대로 됐지 뭐. 할아버지는 손녀딸 혼인 시키고 얼마 안 돼서 세상 떠나셨는데, 그래도 서울로 간다니까 다들 ‘그래도 웬만큼은 살겠지’라고 생각했고 나도 우리집보다는 좀 작아도 비슷할 꺼라 여겼지. 할아버지 따라 돌고 돌아 서울로 와서 그때는 도착한 날에 바로 혼인하는 게 아니라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에 혼인례를 했는데, 뭐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서 식을 마친 거지. 지금처럼 불만을 가지거나 뭘 생각하고 그럴 수가 없었어.
▶ 그래도 큰딸을 보내는 어머니는 걱정하지 않으셨나요? 저도 딸을 키우고 있습니다만 제 딸이 어디 가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이왕이면 잘 사는 집안의 며느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마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어머니는 당시의 보통 어머니였으니까 시부모님 말씀 잘 따르고, 딸을 시집보내면 그걸로 끝인가보다라고 생각하셨던 것같아. 나는 집안일도 거의 해본 적이 없는데, 어머니가 ‘그저 딴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해라. 본분만 지키면 된다’고 당부하셨어.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딸이 어떻게 사는지 한 번도 보러 오질 않으셨는데, 하긴 안 보신 게 나았을 거야. 아마 내가 사는 모습 봤으면 마음이 아파서 너무 힘드셨을 거야.
▶ 그러면 반대로 어머니 보러는 자주 가셨는지요?
아휴, 어떻게 자주 가. 성균관은 항상 해야 할 일이 잔뜩이고, 또 여기서 전철 타고 가려면 차비로 20원인가를 내야 했는데 그 돈도 구하기가 쉽지 않았어. 어떻게 해서 막내는 등에 업고 둘째는 내 손 잡고, 첫째는 애들 아버지 손 잡고 그렇게 한 번씩 친정 나들이는 했지. 어머니한테는 겨우 차비 구해서 왔다는 얘기는 못했어. 그런 소리 들어서 뭐 기분이 좋겠어?
▶ 그렇게 고생하셨으면 남편인 이정우 수복은 이해하고 챙겨주셨나요?
다른 집 남자들도 그랬던 것처럼 무뚝뚝했지. 그래도 나이 드니까 미안했는지 제주도도 데려가 주더라고. 천성으로 공자님 받들고, 어른들을 모셨던 양반이야. 옛날에 성균관 각 건물에 유림 할아버지들이 계신데, 난방도 안 되고 겨울이 오지게 추울 때면 그 양반이 성대에 리어카 끌고 올라가서 교직원들한테 석탄 얻어와서 각 방마다 난로 지펴서 따뜻하게 해주고 그랬어. 한겨울에 눈 맞으며 리어카 끌고 왔다갔다하는 모습 보면 불쌍하고 애잔하고 그렇더라고. 그때는 낙엽 쓸고 불태우는 것도 애 아버지 일이었는데, 성균관 곳곳에 나무와 풀이 많아서 그 사이를 헤치면서 낙엽 모은다는 게 쉽지가 않았어. 젊을 때야 그래도 했겠지만 나이 들어 허연 머리를 해가지고 죽는 날까지 자기 일은 어찌나 정성을 다했는지 말도 못해.
▶ 아드님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성균관에 대한 애정과 수복 집안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나지만 한편으로는 불만족한 부분들도 있는 것같습니다. 평소에 그런 얘기를 종종 나누나요?
애들은 셋 다 성균관 안에서 태어났고 여기서 뛰어놀며 자랐지만 애 아버지나 나나 모두 바빠서 다른 집처럼 가족끼리 놀러 다니고 그러질 못했어. 그래서 바로 옆이지만 창경궁도 가족끼리 가본 적이 없고, 가족사진이라는 게 아예 없어. 그런 건 불쌍한 거지. 보통 집에서 자랐으면 얼마나 좋은 추억을 많이 했겠어. 애미로서 마음이 아파. 그나마 성균관 안에서 살면서 밥이라도 같이 먹곤 했는데, 남대문 불 나고 갑자기 다 나가라고 하니까 애들도 황당했지. 하지만 나라에서 하라는데 안 할 수 있어? 살아본 적도 없는 바깥에서 집 얻어서 살게 되고, 제집처럼 드나들던 건물들도 문화재청에서 죄다 자물쇠로 잠궈 버리니 분향 같은 거 할 때도 일일이 얘기하고 키를 받아서 하니 짜증이 안 나겠어? 여기 건물들은 모두 옛날 사람들이 최고 실력으로 지었을 것이고, 사람이 살면서 불도 때고 기운이 스며야 오래 가는 법인데 무조건 닫아놓고 쓰지 말라고 하면 계속 상해. 나도 답답한데 애들은 혈기가 더하니 환장하려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 집안이 공자님 모시면서 이 정도로 먹고 살았다. 웬만하면 문제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살자’고 계속 말해. 어떤 때는 유림 할아버지들 중에 애들을 함부로 하는 경우가 있어서 흥분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도 내가 다독거려. 나쁜 분들은 적고, 좋은 분들이 더 많으니까.
▶ 여사님의 연세를 감안하면 앞으로 ‘성균관 제주(祭酒)’ 만드는 법과 석전대제 때 제수 준비하는 법 등을 누군가가 이어야할 것같은데, 어떻게 준비가 되고 있습니까?
막내 욱이가 원래는 밖에서 다른 일을 했는데, 아버지가 ‘너가 내 뒤를 이어라’는 말을 듣고 하던 일도 그만두고 9년을 돕다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다시 10년째 수복을 하고 있어. 나도 나이드니 힘들어서 혼자하기 어렵게 되니 욱이가 많이 도와주곤 하는데, 지가 할 일도 있으니 완전하게는 못해. 욱이 마누라가 필요하면 와서 돕고 하는데, 이게 뭐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고 성균관도 (재정적으로) 어려워서 뭘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니 걔네들이 잘 의논해서 해줬으면 싶은데, 내 마음으로 될지 모르겠어. 나야 타고난 운명이 이랬으니 그냥 소처럼 일만 하다가 이제 떠나면 그만이지만 우리 아들, 며느리는 무슨 후계자 같은 걸로 뽑아서 나라에서 좀 챙겨줬으면 해. 성균관 사람들 얘기 들으면 수복이든, 제주든 여기가 유일하다고 하는데 욱이네가 안 한다고 하면 영영 끊기는 거잖아? 없는 것도 만들어서 좋다고 하는 세상인데, 수백 년 내려온 걸 왜 없어지게 하는지 이해가 안 돼.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이 있으면 전해주십시오. 한국 나이로 여든 여덟이신데, 그동안 살아보니 어떠셨는지요?
한 것도 없는데 이제는 시집올 때 어머니, 할머니 나이까지 넘어버렸어. 요즘은 여기서 나가라고 하니 더 옛날 생각이 나곤 해. 친정어머니 얼굴이 자꾸 떠오르고, 먼저 간 애 아버지도 그립고. 답답하고 화날 때도 많은데, 미워하고 원망해봐야 뭐하겠어. 이게 내 팔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해야 그나마 편하지. 내가 시집 왔을 때 심산(心山, 성균관대 설립자 金昌淑, 1879-1962) 선생이 왜놈들 고문 때문에 다리가 망가져 걷질 못하시니 애 아버지가 업고 다니곤 했는데, 요새는 그 기억도 떠올라. 나는 우리나라도, 성균관도 잘 되었으면 좋겠고, 문화재라고 꽁꽁 닫지만 말고 불국사처럼 사람이 살고 문을 열고 행사도 하고 그랬으면 해. 여기는 문화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데 그러면 다른 데는 왜 살게 해주고 쓰게 해주냐고. 나야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애 아버지 곁으로 가고, 시어른들 보러 가겠지. 내가 없어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여기 성균관은 있을 거 아냐? 정부도 바뀌고, 대통령도 덩치 크고 사람 좋아 보이던데 절하고 성당에만 가지 말고 여기도 와서 좀 봤으면 좋겠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실제로 봐야 제대로 알 거 아니냐고. 죽기 전에 예전에 살았던 성균관 안에서 살고 싶어. 몇 십년동안 유림 어른들과 동재, 서재 학생들 밥 챙겨주던 진사식당 옆에 방이 있는데 예전에 애 아버지와 거기서 지냈어. 늙은이가 돈이나 욕심이 뭐 필요하겠어? 오래 전에 세상 떠난 친정어머니, 애 아버지 생각하며 거기서 살다가 죽게 해줘.
시집온 해부터 65년째 성균관을 지키며 사는 ‘작은 거인’은 오늘도 명륜당과 부속 건물 곳곳을 다니며 어디 부러진 곳은 없는지, 계속 자라는 나뭇가지가 해를 주지는 않는지 살펴본다. 누가 시키지 않지만 그게 일상이고, 삶이다.
성균관 명륜당 앞의 6백년 이상된 은행나무가 건강하게 살도록 막걸리를 부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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