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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종단

성균관, 심산 김창숙 선생 55주기 추모제전 봉행

손경수 기자
2017.05.11·7분 읽기·조회 24

참석 내빈들

 

초헌관이 삼상향을 하고 있다.

 

김영근 성균관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나종화 광복회 부회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구남신 서울북부보훈지청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김창환 (사)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성균관은 지난 5월10일 오후 2시 서울시 강북구 수유리 소재 심산 선생 묘역에서 ‘심산 김창숙 선생 55주기 추모제전’을 봉행했다.

성균관·(사)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주최, 광복회·국가보훈처·강북구청·서초구청·의성김씨대종회 후원, 성균관·성균관유도회총본부·성균관대학교·(사)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김영근 성균관장을 비롯해 박유철 광복회장, 구남신 서울북부보훈지청장, 박겸수 서울시 강북구청장, 김창환 (사)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장, 김시명 순국선열유족회장, 김형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장, 김진우 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장, 송두섭 송학선의사기념사업회장, 안응모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박철수 성균관 총무처장, 김병인 성균관 전례위원장, 이덕호·방한수·정순광·고석상 성균관 원임 부관장, 유족, 관내 유림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추모제향의 초헌관은 박겸수 서울시 강북구청장, 아헌관은 방한수 원임 성균관 부관장, 종헌관은 김경림 의성김씨대종회 회장, 집례는 김병인 성균관 전례위원장, 축관은 송좌영 유교교육원동문회 부회장, 알자는 육철희 유도회서울시본부 총무국장, 좌집사는 맹강현 성균관 교무부장, 우집사는 이천복 유도회서울시본부 상무위원이 맡았다.

김영근 성균관장은 인사말에서 “오늘은 심산 김창숙 선생께서 서거하신 지 55주기가 되는 날이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은 풍요로워진 대신 정신은 점점 메말라가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도덕적 해이로 인한 국가적 참사를 겪었으며, 국외적으로는 북한의 정세불안과 일본의 우경화로 인한 위협이 가중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일수록 우리 유림은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인의예지가 살아 숨 쉬는 도덕사회 구현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유철 광복회장은 추모사에서 “우리 모두는 김창숙 선생님 제55주기를 맞이하여 선생님을 기리고 본받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지금 우리나라는 장기적인 경기침체에 더해져 무분별한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이 원인이 되어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제 새로 선출된 대통령을 중심으로 합심해 지난날 서슬 퍼런 일제의 법정에서도 결코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의지가 꺾이지 않았던 선생님처럼 힘과 지혜를 모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구남신 서울북부보훈처장은 추모사에서 “심산 선생은 불의와 독재에 맞서 조국독립과 정의를 위해 싸우신 진정한 선비이자 우리 민족의 참 스승이다.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계승·발전시켜 이를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 나가는 것이 오늘을 사는 후손들이 해야 할 당연한 도리이다”라고 말했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추모사에서 “심산 선생께서 보여주신 애국의 정신은 순국하신 지 55년이 지난 지금도 퇴색되지 않고 후학들의 가슴속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그 뿌리를 양분 삼아 줄기를 키우고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 후손들이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 통일된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누리고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고인의 업적과 희생을 한시도 잊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 연보

 

1879년(1세) 8월27일(음력 7월10일)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사월리에서 아버지 의성 김씨 김호림과 어머니 인동 장씨의 외아들로 출생.

1905년(27세) 스승 이승희 선생과 함께 을사오적 처단 상소를 올림.

1909년(31세) 반민족단체인 일진회의 한일합병론을 성토하는 글을 발표하고 검거되어 옥고를 치름.

1919년(41세) 유림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파리평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영어로 번역하여 김규식 박사에게 보내 회의에 제출케 함. 이 일로 국내의 유림 500여 명이 검거됨. (파리장서운동)

1920년(42세) 박은식, 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 탄핵. 박은식 선생과 한중 혁명운동지 <사민일보> 발간. 신채호 선생과 독립운동 잡지 <천고(天鼓)> 발간.

1926년(48세) 상해에서 김구 선생과 함께 의열단원 나석주를 국내에 밀파하여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을 폭파케 함.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모금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킴. 이 일로 유림 600여 명이 검거됨. (독립군자금 모금운동) 임시정부 의정원 부원장(의장 이동녕)에 선출됨.

1927년(49세) 상해 공동조계병원에서 일경에 검거되어 대구로 압송됨. 장남 환기 국내에서 일경에 검거되어 고문 끝에 순국.

1928년(50세) 일제의 법 자체를 부인, 변호를 거절하고 14년 형을 받음. 2년간의 모진 고문으로 두 다리가 불구가 되고 신병도 악화됨.

1934년(56세) 병세 악화로 가출옥하고 한용운, 홍명희, 정인보 선생 등과 접촉함.

1940년(62세) 일제의 창씨개명을 단호히 거부함. 어머니 별세 후 21년만에 귀향하여 묘막에서 시묘살이를 함.

1943년(65세) 차남 찬기를 중경 임시정부에 밀파함.

1944년(66세) 고향에서 독립운동 추진하여 비밀결사체인 건국동맹 남한 책임자로 추대됨. (중앙책 여운형, 북부책 조만식)

1945년(67세) 건국동맹 일로 일경에 검거되었으나, 광복을 맞아 출감. 어느 정당에도 불참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환영대회 부회장에 추대됨.

1946년(68세) 신탁통치 반대투쟁 전개. 성균관장과 유도회총본부 위원장에 추대됨.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여 초대학장에 취임.

1948년(70세) 김구, 김규식, 홍명희,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선생 등과 7거두 공동성명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함.

1950년(72세) 6.25 때 서울에서 북측의 사상 전향 요구를 거부함.

1951년(73세) 1.4후퇴로 부산 피란. 이승만 대통령 하야 경고문 발표로 부산형무소에 투옥됨.

1952년(74세) 이시영 부통령, 신익희, 서상일 선생 등과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호헌구국 선언대회를 주도하고 옥고를 치름.

1953년(75세) 성균관대학이 종합대학교로 승격. 초대 총장으로 취임.

1956년(78세) 효창원 7열사 묘소 이장 반대투쟁위원장으로 투쟁함. 이승만 박사 3선 취임 반대 경고문 발표.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에서 사퇴.

1957년(79세) 자유당 정권의 압력과 술수로 성균관, 유도회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남.

1959년(81세) 반독재민권쟁취 구국운동을 거국적으로 전개. 이승만 대통령 사퇴 권고 서한을 발송함.

1960년(82세) 4.19혁명 이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 추대.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 회장 추대.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회장 선출.

1961년(83세) 백범 김구 선생 시해진상규명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1962년(84세) 3.1절에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을 받음. 5월10일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서거. 5월18일 사회장으로 수유동 산 127-4 묘지에 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