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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종단

[창간 54주년 특집] 최종수 성균관장에게 '직접' 듣는다“나라와 민족의 앞길을 밝히는 유교언론이 되길 바랍니다”

오흥녕
2023.04.26·15분 읽기·조회 42

 

 

최종수 성균관장이 <유교신문>과의 추억, 바라는 점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최종수 성균관장이 가족들 이야기, 서울대공원으로 인한 일화 등을 설명하고 있다.

 


 

 

<유교신문>의 전신 <유림월보>에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광고가 게재되어 있다.

 


 

 

'500만 유림'으로 상징되는 유교권의 전국 유일 신문이었던 <유림월보>는 신민당도 광고주였다.

 


 

 

<유림월보(儒林月報)>라는 제호(題號)로 1969년 4월30일 수요일에 창간호를 발행한 <유교신문>이 오는 4월30일로 ‘창간 54주년’을 맞이한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가 지면 곳곳에 반영되었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제는 한자 대신 한글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모습으로 변모했으나 여전히 ‘유교권 유일의 전국신문’으로, 매월 1일과 15일에 어김없이 발행되어 전국 1만여 독자들을 찾아가고 있다.

 

오랜 시간 유교권에서 활동하며 격주로 발행되는 <유교신문>을 접해온 독자이자 전국 유림의 수장인 최종수 성균관장에게 요즘 생각하는 부분, 살아온 인생, <유교신문>에 대한 생각 등을 질문했다.

 

▶지난 제34대 성균관장 선거에서 90%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임기를 시작한 지 한 달 정도된 것같습니다. 소감이 어떠신지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 근처에 위치한 당시 시흥향교(지금의 과천향교)를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유교, 유림, 공자 이런 단어와 분위기에 친숙했고, 여러 직위와 과정들을 거쳐왔습니다만 외부에서 바라볼 때와 직접 성균관에 들어와 당면한 문제들을 접하는 건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같습니다.

 

예를 들어 성균관, 성균관유도회총본부, 향교, 성균관유도회 시도본부 및 지부, 향교재단, 성균관여성유도회, (사)석전대제보존회, 석전교육원, 유교신문사, 유교TV방송 등 유교 관련 각 단체간의 성격과 역할, 규정과 역사를 피상적(皮相的)으로만 알다가 구체적이면서도 정확하게 파악하여 현안에 적용해야 하니 매사가 신중하고 여러 가지 점들을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각종 민원이나 바라는 점들을 얘기하며 빠른 처리를 요청하시는데, 중앙에서는 결정하고 진행하는 것마다 책임이 따르므로 원하시는 정도로 해드리기는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 주셨으면 합니다.

 

코로나19가 많이 완화되면서 행사나 제향 등에 제가 직접 방문하기를 요청하는 경우도 폭증하고 있습니다만 임기 초반에 논의하고 협의하면서 결정하고, 결정을 위해 만나야 하는 분들도 많아서 주말까지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니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지난 선거 과정에서 7대 공약을 전국 유림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어떻게 계획하고 계십니까?

 

선거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과분할 정도로 많은 분들의 격려와 도움을 받았던 점에 대해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모자라는 부분이 가득한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은 수많은 의견과 제안을 주셨던 분들의 덕분이며, 최종적으로 요약한 일곱 가지의 공약도 제 개인의 생각은 물론 전국 유림들의 열망을 반영하여 추스린 것들입니다.

 

지방에서는 향교가 한편이 되고, 유도회 지부가 다른 한편이 되어 갈등하며, 중앙에서도 성균관과 성균관유도회총본부가 여러 사안을 두고 시각을 달리하는 모습이 거듭되며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인식들이 확산되어 이를 극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성균관과 유도회총본부 중앙기구 통합’을 첫 번째 공약으로 약속했습니다.

 

지난 관장 시절에 추진했던 성균관·향교·서원 지원법이 법사위 심사과정이지만 문체위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사라지며 껍데기뿐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데, 앞으로는 유교 관련 지원법 통과를 위한 기구를 운영하여 저희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내용으로 진행하려고 ‘지원법 통과를 위한 조직 구성’을 두 번째 공약으로 제시했습니다.

 

50세, 60세도 젊은이로 취급되는 유림의 상황에서 유교의 미래를 담보하기 위해 젊은 인재가 꼭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인재 육성방안 강구’를 세 번째 공약으로 했으며, 유교를 전공한 학자들의 학문적 연구를 통해 성현들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정기적인 학술대회 개최’를 네 번째 공약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속의 유교 성지를 직접 가보고 느끼자는 취지에서 ‘해외 및 국내 성지 방문 추진’을 다섯 번째 공약으로 정했고, 국민들과 함께하는 유교를 만들기 위해 ‘유교의 현대화 작업 추진’을 여섯 번째 공약으로 했으며, 일무(佾舞) 등 유교의 본질적인 내용들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위상을 반영하여 ‘세계적 유교기구 발족’을 마지막 일곱 번째 공약으로 약속드렸습니다.

 

모든 공약들이 만만치 않고, 쉽게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역량과 열정을 가진 유림들께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실 것으로 믿고 있고, 저도 앞장서서 길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평소 깔끔하고 매너 있는 모습을 보여주셔서인지 ‘금수저로 태어나 편안하게 살아온 분이냐?’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어릴 때 가정환경은 어떠셨습니까?

 

또래들보다 상대적으로 키가 크다 보니 그런 오해를 받곤 했는데, 원래는 저희 조상들께서 『조선왕조실록』이나 『삼강행실도』에서도 언급될 정도로 고위직에 오르셨거나 효행으로 표창을 받으며 상당한 규모의 전답을 받으신 것같습니다만 제가 태어날 무렵에는 남아있는 땅이 얼마 없었습니다.

 

그래서 양반 집안의 종손으로 글공부만 하시던 아버님께서도 책 대신 직접 쟁기를 들고 농사를 지으시고 청계산에 올라가 나무도 지게에 지고 오시고, 저도 나름대로 노력해서 가족들에게 돈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 다시 땅을 사며 살다 보니 형편이 조금 나아지긴 했는데 그래도 대학 갈 상황은 아니어서 당시 가장 취업이 잘 되는 학교로 유명했던 서울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그 안에서도 인쇄과가 100% 취업 되던 곳이라 선택했습니다.

 

1959년 고3 가을에 실습을 나갔다가 바로 취직이 됐고, 고등학교 졸업 후 1년밖에 안 되었는데 부모님이 “장가들어야 한다”고 하도 말씀하셔서 그게 너무 싫어 1961년 5월8일에 지원해서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런데 운명은 피해갈 수가 없는지 군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모병위급급래(母病危急急來, 어머니의 병이 위급하니 급히 오라)’ 전보가 도착하여 빨리 나가고 싶었으나 당시 인사계 담당자가 휴가 나가면서 ‘이건 사실이 아니라 네 얼굴 보고 싶어서 그렇게 보내는 거다’라며 거절했고, 처음 받은 날부터 10여 일 늦게 출발하여 1963년 7월7일 집에 도착해보니 실제로 어머니가 위급하여 임종을 맞이해야할 상황이었고 요양차 경기도 화성시 남양의 외가집에 계시다고 하여 급히 어머니를 뵈러 가니 다행히 기적적으로 고비를 넘기셨고, 그 와중에도 자식 걱정이 되셨는지 ‘훌륭한 규수를 먼저 만나봤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뜻하지 않게 어머니의 소개로 그날 바로 장인어른을 뵈었고 그 분을 따라 갔다가 어린 색시를 처음 보고 맞선을 봤는데, 젊은 혈기가 넘칠 때이니 설레고 좋고 그랬다가 그 색시와 함께 발안 장터에 나가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둘 다 이상하고, 운명적인 만남이었던 것같습니다.

 

그해 10월에 군대 복무 중인데도 휴가 나와서 혼인하고, 1964년 3월7일 전역하며 지금까지 같이 살아왔습니다. 이야기하다 보니 온갖 별일들을 다 말하는 것같습니다.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아버님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을 것같다는 느낌이 있긴 합니다.

 

1973년에 돌아가신 아버님은 무척 엄격하셨고, 한시를 낭송하면서 가르침을 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종가집의 장손으로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애쓰시던 것도 기억이 나고요. 집안 형편이 어렵다 보니 어느 날 저에게 “대학교에 가야 되겠니? 대학 가는 것도 좋겠지만 집에서 농사짓는 것도 먹고 살 만하지 않겠느냐?”고 물으셨는데, 오죽했으면 그러셨을까 싶은 생각이 나이가 들수록 더 들고 저도 세 아이를 키우며 여러 일들을 겪다 보니 예전에는 서운하고 무섭기만 했던 일들이 문득 떠오르며 그때의 아버님 심정이 느껴져 가슴이 먹먹하곤 합니다.

 

저 역시 아버님의 모습을 은연 중에 많이 닮아서 아이들에게 상당히 엄격했었는데, 심지어 1964년생 큰딸 아이가 고3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퍼머 머리를 하고 집에 왔길래 불러서 ‘너가 그렇게 하면 되겠냐?’고 꾸짖었더니 울며 나가서 그걸 다 풀고 들어오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저도 모르게 어느새 마음이 바뀌고, ‘내 고집을 부리기보다는 아이들 의견을 존중해줘야겠다’ 싶어 이제는 애들 말을 비교적 잘 들으려고 합니다.

 

▶경기도 과천에 있는 서울대공원 자리가 관장님 집안분들이 대대로 살던 지역인데, 정부의 정책 때문에 하루 아침에 쫓겨났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지금도 서울대공원에 가면 저희 가족들이 심어놓은 나무가 자라서 크고 무성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난 1977년 1월8일 주요 일간지에 ‘남서울대공원 건설계획’이 대서특필되었는데, 요지는 창경궁의 동물원과 식물원을 서울의 남쪽 지역으로 옮긴다는 것이었고 그해 5월 건설부고시 제89호에 의해 청계산 자락의 막계리(莫溪里) 일대가 서울대공원 지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막계리라는 명칭은 저희 조상인 최유경 어른이 처음 농막을 치고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경지가 작고 토질이 척박해서 논농사는 적고 대신 산에서 나무를 베어 땔나무나 숯으로 만들어 서울에 내다 팔곤 했습니다.

 

600년 동안 그 땅에 살던 전주최씨 판윤공파(判尹公派) 저희 집안은 당시의 시대 분위기가 엄혹하다 보니 지금처럼 정부를 상대로 법적조치 한번 취하지 못하고 강제로 이주해야 했는데, 살던 공간뿐만 아니라 120기에 달하는 선조들의 묘도 한꺼번에 이장해야 하는 엄청난 작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주대책위원회(위원장 박순성)를 만들어 저는 총무를 맡아 서울시 녹지과 등을 뛰어다니며 토지수용과 이주대책을 논의했습니다만 저희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대폭 축소된 규모의 이주가구 토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조상 묘의 집단이장은 대규모 면적의 임야를 필요로 하므로 경기도 곳곳의 문중 어른들을 찾아다닌 끝에 지난 주말에 「생거진천 사거용인」 효 축제가 열렸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 완장리 일대를 겨우 구입할 수 있었고,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라 종손인 제가 진두지휘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장비가 있던 시절도 아니라 일일이 사람이 전통 도구를 사용해서 파묘(破墓)하고, 지게에 짊어져 옮겼으며, 각 시대별로 묘를 만드는 다양한 방법이 적용되어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남은 온전한 형태까지 수습하느라 아주 고생했습니다.

 

상당수는 화장(火葬)을 했고, 소가 끄는 달구지에 52기의 유골과 비석, 상석, 망부석 등을 싣고 용인의 새 이장지로 사흘에 걸쳐 옮겼으며, 보상금이 너무 적어 일부 석물은 옮기지 못하고 서울대공원 자리에 그대로 두기도 했습니다.

 

▶창간 54주년을 맞는 <유교신문>이 처음 발행된 날이 1969년 4월 30일이었는데,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그날쯤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글쎄요. 요즘은 잊어버리는 것들이 늘어나서 제 기억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습니다만 1969년이면 1941년생인 제가 한국 나이로 29세였고, 경기도 시흥의 경화기업에서 때로는 ‘부장’, 때로는 ‘반장’이라고 불리면서 직원들을 데리고 한창 일을 하고 있었던 것같습니다.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많아서 회사를 그만두려고 했는데 저를 잘 봐주신 윗분들이 승진도 시켜주시고, 8만원 정도 월급을 받았는데 2~3만원 받던 말단직원보다는 많이 받았던 것같습니다. 짜장면이 몇 백원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첫째 딸이 여섯 살, 둘째 아들이 네 살, 셋째 딸이 막 태어난 해였는데 회사 업무로 정신이 없어서 집안 살림이나 애들 키우는 것은 전적으로 아내에게 맡겨두고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유교신문>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해주십시오. 그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 바라는 모습, 아쉬운 점 등 뭐든 괜찮습니다.

 

우선 쉽지 않은 환경에서도 전국 유림, 유교에 대한 소식을 정성껏 담아주셔서 잘 보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일 하느라 다른 곳에 눈을 돌릴 틈이 없었는데, 나이가 들고 조금 여유가 생기니 아버님이 해오셨던 모습들이 생각나고 또 아버님이 평생동안 수집해오신 자료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어느 날 과천시의 무슨 국장인가 하는 분이 과천 지역의 전통 있는 집안을 조사하는 일을 하다가 저희 집에도 오셨는데 한쪽에 가득 정리되어 있는 책장을 보시고는 거기에 책 사이에 끼어있는 뭔가를 보시더니 ‘이걸 주시면 수집하는 분께 전달해서 좋은 뜻에 사용하겠다’고 하셔서 그렇게 하시도록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성순보(漢城旬報)> 창간호였습니다. 1883년(고종20) 음력 10월1일에 서울 저동의 통리아문 박문국(統理衙門博文局)에서 발행한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이제는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학교 도서관 등 극소수 기관에서만 소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자료가 그냥 저희 집에 있었으면 보관은 되었겠으나 활용은 못했을 텐데, 이후에 우리나라에서 신문, 잡지 창간호만을 수집하는 분께 전해져서 잘 사용되었다고 하니 다행이더군요.

 

저 역시 모든 것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편이라 지금도 상당량의 자료를 모았습니다만 <유교신문>도 54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아마 누군가의 손에서 수집도 되었을 것이고, 지금도 차곡차곡 정리하면서 애지중지하는 독자들이 계실 것같습니다.

 

처음 접한 후부터 우선은 예절에 관한 내용들은 글자 하나 빠뜨리지 않고 꼼꼼하게 보고 있고,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부분들도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내용들이 많아 역시 잘 읽고 있습니다.

 

그 외에 과천향교에 출입할 때는 역시 향교 소식이나 인근 향교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이 갔고, 성균관과 전국 주요 향교, 유림단체 소식도 눈이 가게 됩니다.

 

앞으로는 향교에 출입하는 40, 50대 젊은 층을 위한 새로운 코너가 있었으면 좋겠고, 어린이와 부모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사자성어(四字成語)를 네 컷 정도의 만화로 표현하되 한글, 한자, 영어까지 넣어 쉽게 설명하면 아무래도 재미있게 볼 것같습니다.

 

<유교신문>이 훌륭하지만 할아버지들만 보는 신문은 아니니 독자의 범위를 넓히는 측면에서도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으면 하고, 앞으로도 나라와 민족의 앞길을 밝히는 유교언론의 모습으로 오랫동안 이어지길 기원합니다.

 

▶바쁘신데 두 번에 걸쳐 긴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너무 강행군을 하고 계신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건강 잘 챙기십시오.

 

예, 고맙습니다. 원래부터 게으르게 사는 편은 아닌데, 취임 이후 각종 회의와 일정들이 많아서 좀 피곤했는지 지금도 목감기 기운이 있어 목이 좀 아프긴 합니다. 걱정 끼치지 않도록 더욱 신경쓰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유림월보> 창간호에 '권중해 성균관장의 창간사'와 '이병철 성균관대학 이사장' 광고가 눈에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