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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종단

[‘삼척향교 변상금 부과처분 취소소송 승소’ 특별인터뷰-심재돈 변호사(법무법인 대륙아주)]“장모님(김정자 전 성균관여성유도회중앙회장)의 유지(遺志)를 받든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흥녕
2024.01.05·22분 읽기·조회 66

 

법조계의 소식을 주로 다루는 <법조신문> 기사부터 국내 주요 언론에 관련내용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미 군정기 남한 향교재산은 싯가 5억원 이상인 엄청난 규모였다.(<자유신문> 1948년 5월20일 보도) 

 


 

 

쌀 80kg의 1948, 2024년 시세를 비교하면 향교재산은 현재 가치 43조원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심재돈 변호사는 오랜 법조인 경력에서 묻어나는 자신감으로 쟁점들을 쉽게 설명했다.

 


 

 

심재돈 변호사가 집에서 촬영해온 '1981년 명륜당 결혼식' 사진들을 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1981년 5월6일 성균관 명륜당에서 이재서 성균관장의 주례로 결혼했다.

 


 

 

서양식 결혼식를 치른 후에 혼례복으로 갈아입고 폐백을 드리기 전에 사진촬영했다.

 


 

 

1982년생 외손녀의 계례를 위해 김정자 전 회장의 주선으로 정양완 교수(왼쪽 네 번째) 등이 함께했다.

 


 

 

1997년경 유림회관 지하에서 자녀들의 관례, 계례 후 가족 사진을 촬영했다.

 


 

 

1468년(세조14) 현재 위치로 이전한 삼척향교는 이후로 556년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삼척향교에는 망예례 때 사용하는 석함(石函)이 독특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이번 대법원 판결문은 향후 유사사례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막았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의를 갖는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사정 결과 서울 문묘 성균관 부지도 '나라 국(國)'으로 소유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심재돈 변호사와 삼척향교 관계자들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다.(왼쪽부터 이승근 사무국장, 정수철 원임 전교, 김상하 전교, 심재돈 변호사, 김성수 원임전교, 김영기 성균관유도회 삼척지부 동해지회장)

 

 


 

지난해 2023년 10월18일 대법원 제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 재판장 권영준·이동원 대법관)는 삼척향교(전교 김상하)가 재산관리주체인 재단법인 강원도향교재단(이사장 반종선)을 원고로 하고, 한국자산관리공사(사장 권남주)를 피고로 하여 진행해왔던 변상금부과처분취소소송(사건번호 2023두42584)에서 원고패소했던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내는 중요한 판결을 내렸다.

 

 

이후 피고인 한국자산관리공사가 변상금 부과처분을 스스로 취소하며 판결은 최종 확정되었으며, 그해 10월31일 <법조신문>에 처음으로 ‘100년간 향교 관리했더니 갑자기 “6000만원 변상금 내라”... 대법 “변상금 부과처분 취소”’라는 기사를 필두로 강원일보, 뉴스1, MBN, 뉴시스, 이데일리, 로이슈, 헤럴드경제, 연합뉴스, 여성신문, 파이낸셜뉴스, 아시아경제, YTN, 조선일보, 머니투데이, MBC, 매일경제, 문화일보 등 다수의 언론 보도가 이어졌다.

 

미 군정기인 지난 1948년 5월20일자 <자유신문> 2면 ‘향교재산 5억-각 도를 단위로 재단화’ 기사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부터 체계적으로 관리되었던 향교재산을 남·북한 모든 향교가 아닌 남한 135개소만을 대상으로 파악했는데도 불구하고 시가로 5억원이나 되고 면적은 논 812만 10평, 밭 355만 90평, 임야 3,500만평 등 총 4,667만 100평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는데, 당시 80kg 쌀 한 가마가 3원 가량이었고 지금은 26만원(도매가 기준) 정도임을 감안해 쌀 가격 상승폭으로 단순계산하면 5억원*86,667배=약 43조 3335억원에 이를 정도로 방대했다. 

 

현재는 어느 정도 남았는지 관할 정부부서인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는 물론 유교종단 중앙기관인 성균관(관장 최종수)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만 유림의 공동재산으로 앞으로도 소중히 보존되고 관리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향교 등에서도 삼척향교와 비슷한 사례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기에 이번 판결의 의미는 남다르다고 하겠다.

 

‘들어오는 수입은 한정되어 있고 향교 운영이 어려울 정도로 적은데, 매년 부과되는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 등 각종 비용 납부 때문에 있는 땅도 팔아야 할 형편이다’라는 관계자들의 하소연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번 삼척향교 소송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므로 담당했던 심재돈 변호사를 지난해 12월20일 오후 3시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만나고 근처 까페로 이동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눴다.

 


1.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이름은 심재돈(沈在暾)이고, 1952년 6월23일 본관이기도 한 강원도 삼척군에서 경찰서에 근무하시던 아버님과 현모양처(賢母良妻)셨던 어머님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강릉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유학 와서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해 대학 4학년때인 1974년 사법시험 16회에 합격했는데 58명의 동기 중에서 김성호(金成浩, 1950년생) 전 국정원장·법무부장관, 박주선(朴柱宣, 1949년생) 대한석유협회장·전 민주당 국회의원, 이사철(李思哲, 1952년생) 전 신한국당 국회의원 등이 유명합니다.

 

1976년 사법연수원 6기 수료 후 군법무관을 거쳐 1979년 서울가정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법원에 계속 근무하다가 1997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퇴직해 변호사로 일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형사사건을 전담했는데, 형사사건의 특성상 개인의 인신구속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겪으면서 이후에는 민사사건 위주로 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부동산, 기업, 송무(訟務) 분야를 전문적으로 맡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근무하던 지난 1991년경 검토했던 형사재심사건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데, 1981년 야간에 경기도 시흥군 농협분소에서 발생한 강도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사형선고를 받아 확정된 이가 재심청구를 했고 사형수 교화활동으로 유명했던 박삼중(1942년생) 스님과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이 여러 정황상 범인이 아니라며 구명활동과 기사까지 실었을 정도로 세간의 주목을 받는 사건이어서 열심히 살펴봤습니다만 유죄 확정판결의 재심이유에 관해 형사소송법에서는 ‘유죄 선고를 뒤집고 무죄를 입증할만한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되어야 한다’는 등의 7가지 사유를 제한하고 있으므로 이에 맞는 증거가 새로 발견되어 제시되지 못한 이 사건은 재심사유가 없어 청구를 기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무죄의 판단여하에 따라 사람의 생명이 좌우되는 형사사건은 판사에게도 너무 무거운 짐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70세가 넘은 최근에는 사회에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적은 보수를 받지만 변호사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건을 맡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지난 2021년 63세인 분이 코로나 확진 후 생활치료센터에 입소했다가 제대로된 관리와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사망한 사건에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진행해 승소했고, 메신저 피싱으로 은행 정기예금이 예금주 모르게 인출된 사건에서 은행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해서 역시 승소했습니다.

 

2. 김정자 제3-4대 성균관여성유도회중앙회장님의 큰사위라고 들었습니다. 우연히 알게된 사실인데, 관련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1957년생 집사람과 지난 1981년 5월6일에 성균관 명륜당에서 서양식으로 결혼식을 하면서 이재서(李載瑞) 성균관장님(제15-17대 성균관장, 재임 1980년 8월31일-1984년 12월31일)이 주례를 봐주셨고, 간단한 웨딩케이크 커팅식도 했는데 장모님은 아마 성균관여성유도회장이셨던 것같습니다.

 

명륜당 앞마당에 솥을 걸어두고 국수를 삶아서 하객들을 대접했는데, 마침 점심시간이고 어느새 소문이 났는지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이 잔뜩 와서 국수 한 그릇씩을 먹고 가는 등 시끌벅적했으며, 본식 후에는 성균관에 준비된 관복을 입고 폐백도 했습니다.

 

1997년 정도에는 일종의 시범을 보인다는 의미에서 아마 유림회관 지하에서 저희 아이들만 참석한 가운데 1983년생 아들은 관례(冠禮), 1982년생 딸은 계례(笄禮)를 했는데,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1950) 선생의 4남 4녀 중 3녀인 정양완(鄭良婉, 1929-현재)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께서 주례(主禮, 어질고 예법을 잘 아는 부인), 남편인 강신항(姜信沆, 1930-현재) 전 성균관대 교수께서 주인(主人)을 맡아주셨는데, 자(字)를 지어 수여하는 과정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희 부부가 성균관대를 졸업하지는 않았지만 장모님 덕분에 결혼식부터 아이들 관·계례까지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소중한 경험들을 했던 것같고, 장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이 함께하면서 무척 유쾌하고 즐거웠던 시간이었습니다.

 

3. 삼척향교의 이번 소송을 맡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삼척 출신이라 인연이 된 분이 계셨는지요?

 

고향이 삼척이어서 그런 건 아니고 지난 1980년 삼척군 북평읍이 명주군 묵호읍과 합쳐져 동해시로 분리, 신설되고 1994년 2월 말경에 동해향교가 새로 문을 열었는데, 그렇게 되니 예전부터 삼척향교 소속 유림으로 활동해 온 동해시 북평읍 유림 대부분이 ‘신설된 동해향교에 가지 않고, 역사와 전통을 가진 삼척향교에 계속 출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삼척향교에서도 기존 향교직제에 따라 9명의 북평읍 거주 유림을 장의로 선정하여 성균관에 상신했습니다.

 

그러나 성균관에서는 2000년 5월18일자 공문을 통해 ‘관할지역 거주자에 한하여 장의에 임명될 수 있다’는 향교직제 제16조 규정 위반을 이유로 임명을 거부했고, 이에 성균관유도회 삼척지부 북평지회는 2000년 12월26일경 성균관과 성균관유도회총본부를 상대로 장의 선임권 확인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1심인 서울지방법원은 2001년 11월2일 선고(사건번호 2000가합97125)를 통해 북평지회의 청구를 전부 받아들였으나 2심인 서울고등법원은 2002년 10월17일 선고(사건번호 2001나71776)를 통해 각하했으며 3심인 대법원은 2004년 11월12일 선고(사건번호 2002다65899)를 통해 항소심의 결론을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새로 선출된 삼척향교 전교와 장의에 대한 임명이 성균관에 의해 거부되자 북평읍 거주 유림들이 지난 재판에서 ‘성균관은 재단법인 성균관의 산하기구에 불과해 당사자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던 점이 주요 판결요지임을 의식해 2002년 11월26일경 재단법인 성균관을 상대로 소송을 다시 제기해 1심인 서울지방법원은 2003년 3월25일 선고(사건번호 2002가합76153)를 통해 승소판결을 했으나 2심인 서울고등법원은 2004년 12월29일 선고(사건번호 2003나29014)를 통해 ‘재단법인 성균관은 분쟁의 직접 당사자가 아니어서 확인의 이익이 없다’며 각하했습니다.

 

결국 삼척향교와 성균관유도회 삼척지부 북평읍 유림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이런 결과를 납득하지 못했던 삼척향교 전교님이 친척인 최연희(崔鉛熙, 1944년생) 국회의원(한나라당, 강원 삼척·동해)에게 유능한 변호사 소개를 부탁했고, 최연희 의원님이 같은 강원도 출신 법조인인 저를 소개해 주셔서 재판을 맡게 됐습니다.

 

그래서 1, 2심 판결은 패소했으나 대법원의 2010년 5월27일 선고(사건번호 2006다72109)에서 역전승을 거뒀는데, 당시 원고 중 한 분인 김성수 장의께서 시간이 흐른 뒤에 삼척향교 전교가 되셨고 변상금 부과취소 소송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시니 예전 재판을 승소했던 저를 수소문하신 후 서울까지 찾아와 부탁하셨습니다.

 

4. 이번 삼척향교 소송의 특징은 뭐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소송대상이 된 토지는 향교 경내의 부지여서 필수적이고 핵심적인 재산인데 상당수 면적이 국가 소유로 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이 개국한 직후인 1398년(태조7)에 삼척향교가 창건되고, 몇 번의 이전을 거쳐 1468년(세조14)에 현재 장소에 정착한 후 500년 이상의 역사를 거쳤는데 일제 강점기에 토지조사령을 통한 사정(査定) 당시 대부분의 향교 토지는 향교 재산으로 처리되었으나 몇 군데 향교의 토지는 ‘나라 국(國)’ 표시로 기록되었고, 당시의 나라는 조선이나 대한민국이 아니라 천황이 다스리던 일본국이었으므로 '나라 국'으로 표시하는 자체가 향교의 땅을 빼앗아 가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아서 국가기록원 홈페이지(https://www.archives.go.kr)에서 ‘향교’ 등의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니 조선총독부 문서들이 보였고, 향교재산법의 변천에 관한 자료들까지 확인하니 1910년 4월23일 학부령(學部令)으로 「향교재산관리규정(鄕校財産管理規程)」이 발표되며 오랫동안 당연하게 향교의 재산으로 여겨지던 토지들을 관찰사의 지휘 감독을 받아 부윤(府尹)·군수(郡守)가 관리하게 하며 처음으로 국가재산인 것처럼 취급하기 시작했고, 삼척향교를 비롯한 상당수 향교의 땅에 무단으로 국민학교, 중학교 등을 지어 자연스럽게 향교재산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1916년 강원도지사가 ‘관내 향교부지 중 일부가 관유재산대장에 관유재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나 향교재산으로 취급하는 것이 맞다’는 상신(上申)을 했고 이에 대해 조선총독부에서 동의하는 회답을 했던 공문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1919년 6월18일 각 도 장관에게 ‘토지조사령에 따라 국유로 사정된 토지 중 문묘 부지는 향교재산으로 양여할 것을 지시’하는 공문을 국가기록원에서 찾았습니다.

 

1심과 2심 당시에는 없었던 새로운 자료를 3심 대법원 소송시 제출했고, 경험과 법률지식이 해박한 대법관들께서는 ‘1915년 12월25일 나라 국(國) 명의로 사정된 이후 피고인 한국자산관리공사가 지난 2013년 6월11일 삼척향교를 상대로 하여 변상금 부과처분을 할 때까지 일제와 대한민국은 한 번도 토지의 점유·사용에 대한 사용료, 대부료, 변상금을 요구한 적이 없었으므로 국가는 이 토지에 대한 배타적 점유·사용을 묵시적으로 승인했고, 따라서 이 토지의 점유·사용에 대한 일정한 지위가 부여된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결했습니다.

 

재판진행과정에서 삼척향교 외에도 금산향교, 진산향교, 보성향교, 장기향교에서도 경내 토지가 ‘나라 국(國)’으로 사정되어 있음을 확인했는데 이번 소송의 승소에 따라 이들 향교들도 동일한 지위가 인정되므로 점유·사용에 대한 정당화할 법적 지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자산관리공사는 정부를 대행해서 이런 종류의 토지를 찾아내고 변상금을 부과하며 실적을 쌓고 직원들도 인센티브나 혜택을 받는 것같으므로 그들로서는 당연한 업무이지만 일선 향교에서는 무척 억울하게 여길 수 밖에 없고, 토지 등 재산을 실질적으로는 향교에서 관리하지만 서류상으로는 각 시·도의 향교재단에서 관리하는 듯한 구조도 일반적인 사회단체나 기관에서는 볼 수 없는 아주 특이한 모습입니다.

 

지금도 이중적 구조라 향교가 온전하게 소유권을 회복하지 못한 것이니 앞으로 향교재산법의 유래와 변천과정 및 변동의 계기 등을 정밀하게 살펴보고, 국가기록원 등에서 자료를 찾는다면 당시 성균관과 향교 등 유교권의 위상을 감안할 때 상당한 자료가 보존되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재판과정에서 일정 부분 살펴봤습니다만 너무 방대한 분량이라 미처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

 

한국자산관리공사 등 정부기관도 향교재산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2013년에 처음으로 변상금이 부과될 때는 강원도향교재단이 아니라 곧바로 삼척향교로 부과되기도 했는데, 여러 면에서 합리적인 검토와 시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또 하나 더 언급하자면 삼척향교를 비롯한 향교 내 건물들이 오랜 역사 속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경우가 많은데,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함부로 이전하거나 철거할 수도 없게 국가가 규제를 해놓고 ‘국가 소유의 토지를 마음대로 사용하니 돈을 내라’고 하는 건 어떠한 해소방법도 없이 강제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도 법원에서는 주요 근거로 봤고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입니다.

 

충분히 승소 가능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1, 2심을 패소한 후에는 너무 분해서 ‘보수를 받지 않고 책임지고 하겠다. 인지대만 부담해 주시라’고 김성수 전교님께 이야기했는데, 전교님께서 ‘그럴 수는 없다. 정당한 보수를 드리겠으니 열심히 해달라’고 하셔서 앞서 언급했던 조선총독부 자료 등을 찾아 재판부에 제출하고 최선을 다해 변론해서 결국 역전승을 했습니다. 변호사도 이렇게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사건에서 승소하면 훨씬 더 짜릿합니다.

 

5. 1910년 한·일합방의 부당성 등이 지금도 각종 자료로 제시되고 있습니다만 토지조사령에 의한 사정작업이 지금도 유효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본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재산소유 관계에 대한 혼란을 막고자 일정한 기준을 세워온 선배 법조인들과 정부 당국의 노력 등이 합산된 결과인 것으로 보이는데, 하여간 현재도 우리나라 법원에서는 일제가 시행한 토지조사사업에 의한 사정 결과가 ‘창설적(創設的) 효과를 가진다’고 보고 있으며 그 이전과 단절해서 확정하고 있습니다.

 

토지조사사업 이후 매수나 증여 등으로 소유권이 변동되었다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나라 국’에 대한 국가의 소유를 인정하는 것이 대법원의 판례이고, 그것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1919년 6월18일 각 도 장관에게 토지조사령에 따라 국유로 사정된 토지 중 문묘 부지는 향교재산으로 양여할 것을 지시’한 후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자료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그 정도의 위치에 있는 인물의 지시이므로 그대로 시행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6. 지난 2022년 <유교신문>은 ‘서울 문묘 일원 종합정비계획(2009, 종로구청)의 내용과 문제점’에 대한 시리즈 기획(①13년 전 계획으로 밀어붙이는 문화재청-제1070호(2022.7.1.) 3면, ②‘붕괴 직전·화재 위험’ 숭보사 외면하는 문화재청-제1070호(2022.7.1.) 7면, ③서울 문묘 성균관에 ‘이상한 등기과정을 진행’한 국가와 문화재청-제1072호(2022.8.1.) 3면, ④서울 문묘 성균관에 대한 ‘국가와 문화재청의 소유권 보존등기 합법성’을 지금이라도 따져봐야 한다-제1073호(2022.8.15.) 3면, ⑤서울 문묘 성균관의 각종 오류투성이 서류들에 대한 국가와 문화재청의 설명이 필요하다-제1074호(2022.9.1.) 3면) 기사를 통해 서울 문묘 성균관에 대한 등기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나라 국(國)’으로 토지등기된 성균관에 대한 소유권, 점유·사용권과 관련해 고려할 부분들은 없겠습니까?

 

 

토지와 건물에 대한 등기가 이루어지면 앞서 언급한 표현처럼 ‘창설적(創設的) 효과를 가진다’고 보는 것이 대법원 판례이므로 기존 소유권 관계에 대한 확실한 반박자료를 국가기록원 자료 등에서 확인하고 제시해야 논쟁과 변화의 단초가 마련됩니다.

 

성균관은 조선총독부와 대한민국 정부 모두 아주 중요한 기관으로 다루어졌을 테니 아마도 관련 자료가 다수 존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만 직접 보지 않고서는 단언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어쨌거나 성균관 중앙과 유림들이 노력해야 할 부분일 것입니다.

 

7. 남은 인생동안 꼭 하고 싶은 것이나 꼭 가보고 싶은 곳, 반드시 이뤄졌으면 하는 내용들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떤 할아버지(또는 어른)의 모습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으신지요?

 

바쁜 딸네 부부를 대신해서 어린 외손주를 저희 부부가 키우고 있는데, 요즘은 할아버지를 ‘할빠(할아버지 아빠)’, 할머니를 ‘할마(할머니 엄마)’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외손주 키우는 재미가 쏠쏠한데, 그저 외손주가 예쁘고 건강하게 잘 자라줬으면 하는 바램뿐입니다. 개인적인 욕심은 따로 없습니다.

 

되도록 마음을 편하게 하면서 여행도 종종 다니고 자유롭게 지내려고 합니다.

 

8. 55년의 역사를 가진 <유교신문>에서 이렇게 변호사를 인터뷰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거나 극히 드물었을 것같습니다. 이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자유롭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장모님이 유교와 유교문화에 대한 학문적 접근, 실천적 노력을 굉장히 많이 하셨는데 자녀들은 그쪽에 관심이 적어서 대를 잇거나 하지 못했던 것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전에 장모님이 계실 때부터 집을 다녀가던 분들의 이름과 얼굴이 한 번씩 떠오르곤 했는데 이렇게 우연한 기회에 성균관과 유림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우리 전통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유교문화, 유교정신에 대해 젊은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좋겠고, 저희가 자랄 때가 너무 엄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지금은 요즘에 맞게 부드러우면서도 고급스럽게 방법을 고민해서 천방지축(天方地軸)하거나 예의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이들이 좀 더 나아지도록 했으면 합니다.

 

<유교신문>도 몰랐는데 오늘의 자리를 통해서 보니 오랜 세월 동안 각종 소식을 전국에 전하고, 유림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많은 분들이 노력해오셨을 것같습니다. 유교문화 창달을 위해 앞으로도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른 이들이 가지 않았던 길을 가려 하면 생각하지 못한 난관에 부딪히고 여러 가지로 고통 받기 마련이니 저절로 '어렵다' '힘들다' '괜히 시작했나 보다' 라는 말이 나오기 마련인데, 삼척향교의 역사와 전통을 소중히 여긴 유림들과 전통문화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던 노련한 변호사의 에너지가 합해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만들어졌다.

 

'향교재산에 대한 부당한 변상금 처분을 막아낸 이번 판결' 이후에는 제주향교, 삼척향교, 구례향교, 거창향교 등 전국 곳곳에서 확인되는 '일제시대 또는 해방 이후 무단 혹은 (당시 학교를 지을만한 땅을 구입할 재정여건이 안 되어 향교 옆 토지를 일정 기간 사용하도록 했던) 좋은 뜻으로 제공된 학교 용지에 대해 몇 십년이 흐르는 과정에서 이제는 상당한 규모로 확대된 재정구조를 가진 교육당국과 학교 측이 '원래부터 자신들의 땅이었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며 향교 측을 터부시하거나 아예 대화조차 하지 않는 막무가내 모습을 시정하려는 집단적인 노력도 필요해 보인다.

 

설립 초기인 조선 전기 이후 격변의 시기를 거치며 향교 운영의 바탕이 된 향교재산에는 수많은 선배 유림들의 개인자산 공여(供與)와 노력의 흔적이 오랜 세월동안 담겨졌으므로 그 누구의 개인 소유도 아니고, 특정세력의 전유물(專有物)은 더더욱 아니다. 

 

세계 유일의 유림 세력이 존재하는 대한민국에서 향교재산에 대한 합리적인 검토와 미래 발전을 위한 대안 마련은 전통문화 보존의 초석(礎石, 주춧돌)인 동시에 오늘의 한국 유교를 세계 유교로 도약케 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