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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종단

성균관 대성전 지붕공사 현장에서 상량묵서 및 옛 단청 발견

- 국가유산청, 보도자료에 ‘만력 29년(1601)’을 1602년으로 잘못 기재해 배포<br>- 종도리에 적힌 목수 편수 김순억(金順億)·김몽송(金夢松)·강향(姜香), 『선조국장도감의궤』·『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에서 추가 확인

오흥녕
2024.07.29·8분 읽기·조회 46

 

 

지난 7월25일 열린 '성균관 제3차 고문회의 간담회' 전에 대성전 지붕 보수공사 현장을 살폈다.

 


 

 

 

 

 

서울 문묘 성균관 지붕 보수공사 현장에는 해체 과정을 설명하는 사진들이 게시돼 있다.

 


 

 

보수공사 중인 성균관 대성전의 지붕이 현재 이와 같이 해체돼 있다.

 


 

 

이번에 새롭게 발견된 상량묵서가 보이고 있다.

 


 

 

상량묵서의 방향을 바꿔보면 훨씬 보기가 편해진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홈페이지에서 목수 편수 '김순억'의 한자이름 '金順億'으로 검색했다.

 


 

 

『선조소경대왕 국장도감의궤』에서 '목수 김순억(木手 金順億)'이 뚜렷하게 확인된다.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에 '목수 편수(木手邊首) 강향(姜香)'이라는 내용이 보인다.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에 '목수(木手)' '김무응송(金無應松)'과 '강향(姜香)'의 이름이 등장한다.

 

 

 


 

 

지붕 맨 윗부분의 희미한 단청이 그동안 한번도 공개되거나 노출되지 않았던 상태를 보이고 있다.

 


 

국가유산청(청장 최응천)은 지난 7월25일 홈페이지(https://www.khs.go.kr)의 ‘새소식’-‘보도/설명’-‘「서울 문묘 및 성균관」 대성전 수리공사 중 1602년 상량묵서 발견’ 공고를 통해 ‘지난해(2023년) 9월부터 실시 중인 서울 문묘 성균관 대성전 지붕 보수공사 현장에서 상량일(上梁日, 목조 건물의 골재가 거의 완성된 단계에서 대들보 위에 대공을 세운 후에 최상부 부재인 종도리를 올리고, 공사와 관련된 기록과 축원문이 적힌 상량문을 봉안하는 의식을 거행한 날)과 목수 이름 등이 기록된 상량묵서(上梁墨書)가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대성전 지붕을 구성하고 있는 자재들을 하나씩 분리하여 순서대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종도리(서까래 밑에 가로로 길게 놓이는 도리 부재 중 제일 높은 곳에 놓이는 부재) 하부에 적힌 ‘만력이십구년시월이십육일상량목수편수김순억김몽송강향(萬曆二十九年十月二十六日上樑木手邊首金順億金夢松姜香)’이라는 글이 드러난 것인데, 그 뜻은 ‘(중국 명나라 제13대 황제 만력제(萬曆帝, 재위 1572-1620)의 연호인) 만력 29년(1601, ※즉위한 해를 곧바로 1년으로 간주하지 않는 전통에 따라 1573년부터 만력 1년이므로 1601년이 만력 29년인데, 국가유산청의 공고자료에는 1602년으로 잘못 표시되어 있음) (음력) 10월26일 상량함. 목수 편수(邊首, 원래의 음은 ’변수‘이지만 이런 경우에는 ’편수‘로 읽음, 공장(工匠, 수공업 종사 장인)의 우두머리) 김순억·김몽송·강향’이라는 내용이다.

 

옛날부터 지금까지도 특히 한옥 건축물에는 반드시 상량문이나 상량묵서를 기재해 그것으로 건물의 제작연도와 주요 참여자들을 파악할 수 있는데, 한문 실력이 조금만 있다면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쉬운 글자를 사용하되 양반이 아닌 일반 평민이나 노비 등은 경우에 따라 발음되는 소리대로 표기하다 보니 평소 사용되지 않는 글자나 이두(吏讀, 삼국시대부터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식으로 적기도 했다.

 

국가유산청은 보도자료에서 '목수와 관련해서도 당대 국가적 건축공사를 담당했던 숙련된 솜씨의 장인들임에도 아직까지 다른 기록에는 같은 이름을 발견할 수 없어 향후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으나 성균관 대성전 지붕의 가장 윗부분이자 핵심을 이루는 종도리에 적힌 김순억(金順億)·김몽송(金夢松)·강향(姜香)에 대해 좀 더 파악하기 위해 한국고전번역원(원장 김언종)이 운영하는 한국고전종합DB(https://db.itkc.or.kr)에서 각각의 이름을 검색했고, 여기서는 특별한 자료가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귀중서가 다수 보관되어 있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원장 정긍식) 홈페이지(https://kyu.snu.ac.kr)에서 이들의 이름을 검색하니 먼저 김순억(金順億)이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 작성된 『선조소경대왕 국장도감의궤(宣宗昭敬大王 國葬都監儀軌)』에 나타난다.

 

조선 제14대 국왕으로 붕어(崩御, 임금이 세상을 떠남) 후 종묘에 처음 부묘(祔廟, 몇 년에 걸친 상(喪)을 마치고 신주를 옮김)될 때의 묘호(廟號, 임금의 시호)가 선종(宣宗)이었던 선조(宣祖, 재위 1567-1608)가 1608년(선조41) 음력 2월1일 정릉동 행궁(지금의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이 아니라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의 집터에 위치한 덕수궁이다. 임진왜란으로 한양 내 모든 궁궐이 불타서 어쩔 수 없이 선조는 이곳에 머물렀다)에서 세상을 떠나자 즉시 전날 작성된 유서가 세자인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에게 전달되며 왕위 계승 사실이 전파되었고, 세상을 떠난 왕의 묘호(廟號)가 선종(宣宗)으로 정해졌으며,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수릉관(守陵官)이 되었다.

 

김몽송(金夢松)은 그 이름으로는 검색되지 않으나 또 다른 목수 편수인 강향(姜香)이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懿仁王后山陵都監儀軌)』에서 검색되는 두 군데 기록 중 한 군데 기록에서 ‘강향’ 이름 바로 앞에 있는 김무응송(金無應松)이 그 사람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시대 여러 기록에서 동일인의 이름에 대한 한자가 부분적으로 다르거나 비슷한 발음으로 적힌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의인왕후(懿仁王后, 1555-1600)는 본관이 반남(潘南, 전남 나주군 반남면)인 반성부원군 박응순(朴應順, 1526-1580)과 본관이 전주(全州)인 어머니 완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태어나 1569년(선조2) 선조 임금의 첫 번째 왕비가 되었으나 직접 낳은 자녀 없이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피난길에 얻은 병이 원인이 되어 1600년(선조33) 음력 6월27일 훙(薨)했으며 좌의정 이헌국(李憲國)이 총호사(摠護使), 유영경(柳永慶)·황진(黃璡)·이호민(李好閔)이 빈전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 이충원(李忠元)·윤자신(尹自新)·한준겸(韓浚謙)이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이정구(李廷龜)·김수(金睟)·노직(盧稷)이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 윤형(尹洞)이 수릉관(守陵官), 이덕장(李德章)이 시릉관(侍陵官)으로 국장에 종사했다.

 

이처럼 현재 확인되는 자료만 살펴보더라도 성균관 대성전 지붕 상량묵서에 기재된 김순억·김몽송·강향이라는 목수 편수들은 국왕과 왕비의 능을 조성하는 데도 투입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던 당대 최고의 목수들로 보이며, 국가의 통치이념이자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체계였던 유교를 상징하는 서울 문묘 성균관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로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대성전을 새로 만드는데 투입된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성균관을 다시 짓는 문제는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조정에서 논의가 계속되었는데, 특히 성균관 유생들은 지방 유생들에게서 쌀과 베 등의 물건을 거두며 모았고(『선조실록』 권75, 선조29년(1596) 5월20일), 모아둔 쌀과 베 등이 조선에 머물고 있는 명나라 군대에게 전용되는 것을 재고해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선조실록』 권90, 선조30년(1597) 7월8일)

 

이후에도 계속해서 서울 문묘 성균관의 복구를 청하는 상소와 논의가 계속되다가 드디어 1602년(선조35) 7월에 ‘대성전의 역사(役事)를 완료했으나 동무(東廡)·서무(西廡)·신문(神門)은 물력의 부족으로 동시에 중건하지를 못했다’는 성균관의 아룀(『선조실록』 권152, 선조35년(1602) 7월21일)이 있는 것을 보면 이번에 발견된 상량묵서에 표시된 ‘만력 29년(1601) 10월26일’ 이후에도 최소한 9개월 정도의 시간이 더 지나간 것을 볼 때 상량을 한 이후에도 조기에 대성전 공사가 끝나지 못한 정확한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더 발견되어야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대성전의 내부 천장에서는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희미한 색의 단청(丹靑, 대궐 등의 벽·천장·기둥 등에 여러 가지 빛깔로 입힌 그림과 무늬)이 발견되어 조선시대 전통단청 안료와 문양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