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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종단

위법(違法)과 편법(便法)으로 운영되는 성균관에 대해 말한다- <(성균관장에게 발송한) 취재질의서>의 질문과 답변 내용을 통해 살펴본 '성균관 위기론 1'

오흥녕
2024.10.29·24분 읽기·조회 236

 

 

 

 

『선조실록』 선조 29년(1596) 5월20일 기사에 '성균관 유생들이 문묘 중수를 위해 애쓴 모습'이 보인다.

 


 

 

 

 

137인의 선배유림들은 목숨을 걸고 파리장서(巴里長書) 운동을 전개하며 일제에 저항했다.

 


 

 

한국통감부가 1910년 4월23일 「향교재산관리규정(鄕校財産管理規程)」을 발표·시행하면서 향교재산에 대한 국가 권력의 간섭이 처음으로 시작됐다.

 


 

 

 

 

1948년 (미)군정법령 제194호 「향교재산관리에 관한 건」 제정으로 시도 향교재단 설립이 시작됐다.

 


 

 

미군정이 1948년 5월 '남한 135개 향교'만을 대상으로 파악한 재산규모는 5억원에 이르는 거액이었다.

 


 

 

심산 김창숙 선생이 성균관대학 학장 시절인 1948년 명륜당 앞에서 제자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1950년 한국전쟁에서 서울을 점령하다 철수한 북한군에 의해 불 탄 비천당은 1988년에야 복원됐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의 무리한 개헌 추진으로 발생한 '부산정치파동'에서 경찰들의 폭력이 행사되어 심산 김창숙 선생이 얼굴에 피를 흘리고 있다.

 


 

 

 

 

1960년 4·19 혁명이후 성균관을 되찾은 심산 김창숙 선생과 유림들이 함께하고 있다.(출처: 한겨레21)

 


 

 

성락서(成樂緖, 1905-1988) 제10-12대 성균관장은 제헌의원, 충남도지사 등 다양한 경험을 거쳤다.

 


 

 

국고와 유림들의 헌성금으로 완성된 성균관 유림회관은 지난 1990년 1월12일부터 업무를 개시했다.

 


 

 

국가를 믿고 '30년 사용 기부채납'을 약정한 선배유림의 뜻대로 성균관 유림회관은 국가 소유가 됐다.

 


 

 

성균관의 거의 유일한 재산인 '성북동 토지'는 성북동 가장 위쪽, 뛰어난 전망을 가진 곳에 위치해있다.

 


 

 

성균관 소유의 '성북동 토지' 2필지는 선배 유림의 자금과 노력으로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

 


 

 

성균관 '성북동 토지'와  우리옛돌박물관(330-605)의 1㎡당 개별공시지가는 약 42.6배의 차이가 있다.

 


 

 

우리옛돌박물관 개별공시지가의 변화를 보면 '성북동 토지'도 충분한 상승여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정법사는 성균관 소유 '성북동 토지'의 상당 부분을 무단 점유하고 있다.

 


 

 

 

 

이상호 유교신문사 대표(성균관유도회총본부 수석부회장)가 실무를 맡아 진행한 정법사와의 1심 소송에서 지난 2월15일 성균관이 상당 부분에서 승소한 재판 결과가 나왔다.

 


 

 

1심 판결에 대해 곧바로 항소했던 정법사 측은 올해 6월 갑자기 항소를 취하했다.

 


 

 

지금의 성균관 현안들에 대한 내용을 담은 취재질의서를 지난 10월4일 성균관장 앞으로 발송했다.

 


 

 

지난 10월15일 작성된 답변서가 다음날인 10월16일에 본사로 도착했다.

 


 

1. 선배 유림의 피와 땀으로 지켜온 ‘성균관(成均館)’

 

유교를 국가통치와 사회 운영의 기본원리로 채택한 조선왕조에서 세종대왕을 비롯한 국왕들과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 우리 국민 누구나 아는 대표적인 인물들이 공부하고 대사성(大司成) 등 주요 직위를 거쳐 갔던 성균관은 임진왜란 등으로 여러 차례 불에 타고 다시 짓기를 거듭하는 와중에 국가의 물력(物力)이 부족할 때는 전국의 유림들이 쌀과 베 등의 물건을 거두며 모으거나(『선조실록』 권75, 선조 29년(1596) 5월20일) 모아둔 쌀과 베 등이 조선에 머물고 있는 명나라 군대에게 전용되는 것을 재고해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는(『선조실록』 권90, 선조 30년(1597) 7월8일) 등으로 각고의 노력 속에 보존되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경학원(經學院), 명륜학원(明倫學院), 명륜전문학원(明倫專門學院),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 등으로 강등되며 겨우 명맥을 유지했으나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9월에는 그마저 폐교되어 청년연성소(靑年鍊成所)로 사용되었다.

 

국권을 빼앗겼으나 일제에 협력한 일부 권력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림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1919년 3·1 만세운동의 지역 확산을 이끈 지도자로 활약했고,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 선생을 비롯한 137인의 유림은 제1차 세계대전의 수습을 위해 열린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차라리 머리를 나란히 하고 죽을지언정 맹세코 일본의 노예가 되지는 않겠다’는 뜻을 천명하며 공동 서명한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보내며 대의를 세웠다가 일제에 의해 대부분의 참여자가 체포, 투옥, 구속되는 고초를 겪었으나 정부 수립 이후 상당수가 건국훈장·건국포장 수여 및 서울현충원·대전현충원 안장 등으로 공적을 인정받았다.

 

건국훈장 최고 등급으로, 정부 수립 이후 현재까지 61명에게만 수여된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을 받은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선생은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두 아들을 잃고 본인도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앉은뱅이 신세가 되었으나 1945년 해방이 되자 ‘친일유림을 숙청하고, 혼란한 유림조직을 정비하기 위해’ 그해 11월30일 서울 성균관 명륜당에서 남·북 유림 1천여 명이 참석한 전국유림대회를 개최해 ‘민족고유문화의 근간인 유교도의의 혁신과 향상, 성균관대학의 설치, 이를 위한 재단의 완성’을 결의했고, 다음 해인 1946년 3월13일 2,500여 명의 유림지도자가 성균관 명륜당에 모인 가운데 전국유림대표자대회를 열어 유도회총본부를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조선시대의 유일한 국립대학이었던 성균관의 역할을 변화된 시대에 맞는 성균관대학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충분한 재정이 필요했으나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로 체결한 후 일제에 의해 1906년 2월1일 설치된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강력한 힘을 가진 집단이었던 유림세력을 약화시키고 조만간 예정된 자신들의 통치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한·일합방 직전인 1910년 4월23일 학부령(學部令) 제2호로 「향교재산관리규정(鄕校財産管理規程)」(전문 8조와 부칙으로 구성)을 발표·시행하며 오랜 세월 동안 유림들이 자율적으로 관리해 왔던 향교의 재산을 마치 국가의 재산인 것처럼 취급하기 시작했다.(향교재산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많지만 국가 정치세력이 향교재산을 유림에게서 빼앗은 것은 이때가 시발점이었다)

 

이 규정을 근거로 일제는 1910년 8월29일 한·일 강제병합을 진행한 후 수많은 지역의 향교 소유토지를 각급 학교 건설을 위한 땅으로 사용함으로써 지금까지도 전국 시·군의 구(舊) 도심지에 위치하며 오랜 역사를 가진 학교 대부분이 이렇게 세워졌는데, 1945년 해방 후 남한 지역에 들어선 미군정에서도 같은 상태가 지속되자 ‘성균관대학의 설립에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해서는 재단을 설립하고, 관에 빼앗긴 향교재산을 되찾아와야겠다’고 판단한 심산 김창숙 선생은 1946년 6월 유도회총본부 고문이었던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 선생과 미 군정청을 방문해 유억겸(兪億兼, 1896-1947) 문교부장에게서 ‘남한 9도에 각각 향교재단법인을 설치하고, 성균관에서 통할 감독하여 교육문화사업을 일으키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에 따라 하지(John Reed Hodge, 1893-1963) 중장이 지휘하던 미군정 당국은 1948년 5월17일 군정법령 제194호 「향교재산관리에 관한 건」을 제정·시행하며 ‘(제4조) 도별 향교재단 설립’과 ‘(제6조) 향교재산에서 생기는 수입은 ①성균관과 성균관대학의 유지 ②도내 각 문묘의 유지 ③교육 기타 교화사업의 경영에만 사용할 수 있음’과 ‘(제7조) 향교재단의 매년도 수입에서 10%는 성균관, 20%는 성균관대학에 납부해야함’을 최초로 명시하며, 불완전하게나마 향교재산을 되찾는 방향으로 극적인 전환이 이뤄졌다.

 

참고로 <자유신문> 1948년 5월20일자 2면에 보도된 ‘향교재산 5억-각 도를 단위로 재단화’ 기사를 보면 군정법령 제194호 「향교재산관리에 관한 건」이 시행됨을 알리면서 당시 남한 지역 (모든 향교를 대상으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라 그나마 파악이 된) 135개 향교의 재산 총액이 5억 원, 소유 면적은 논 812만 10평, 밭 355만 90평, 임야 3500만 평이나 됨을 밝히고 있는데, 지난 1971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과학분야 종합정책연구소로 국가에 의해 설립된 KDI(한국개발연구원) 경제정보센터의 자료 ‘쌀 한 가마 3.86원→20만 원’의 내용을 참고해 1946년의 80kg 쌀 한 가마의 가격이 3.86원이었다고 하니 계산하기 편하도록 1948년은 4원이라고 가정하고, 2024년 10월 말 현재의 20kg 한 포대의 가격이 5만 원 내외이니 80kg으로 환산해 20만 원으로 하면 지난 76년간 쌀 가격은 5만 배가 오른 셈이고, 이런 경향을 거칠게나마 화폐 가치로 옮겨보면 1948년 남한 135개 향교재산 총액 5억 원*5만 배=25조 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으로 확인할 수 있고 만약 지금처럼 234개 향교 전체를 대상으로 했으면 그보다 훨씬 더 큰 규모가 우리 유림의 자산으로 파악되었을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성균관도 성균관대학과 함께 임시수도였던 부산으로 이전했고, 성균관에 보관되어 오던 제기 등은 당시 이완산(李完山, 1902-1969, 52년 재직) 수복의 가족들에 의해 우물 속에 숨겨 보존됐으며, 서울 시내 중심위치였던 성균관에 주둔한 북한군은 군수물자를 저장했다가 1950년 9월15일 단행된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시 비천당(丕闡堂) 등을 불 태우고, 급한 나머지 총탄 등을 그대로 바닥에 파묻어 지난해 2023년 12월12일과 13일 이틀 연속 폭탄 불발탄과 총탄 불발탄이 대성전 입구 신삼문 담장 아래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1948년 제헌의회가 구성되고, 간접선거 방식으로 초대 대통령을 선출할 때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부 의원들로부터 득표하기도 했던 심산 김창숙 선생은 과거 독립운동 시절부터 임시정부와 해외에서 보였던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대통령의 독단적이고 불화를 야기하는 행보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에 대한 무능력 및 부산정치파동(釜山政治波動, 간선제였던 대통령 선출방식을 직선제로 바꿔 대통령직을 연임하려는 이승만 대통령측에 의해 1952년 5월25일의 계엄령 선포부터 같은 해 7월7일의 제1차 개정헌법 공포에 이르기까지 전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소요사건) 등에서의 위법적 모습에 대해 강력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까지 주장했는데, 정적(政敵) 제거와 독재체제 연장을 꾀하던 정권 및 자유당 세력에 의해 유도회총본부·성균관·성균관대학교·재단법인 성균관에서 모두 쫓아내기 위한 온갖 공작들이 시행되었다.

 

중앙은 물론 지역의 향교와 유도회 지부를 ‘이승만 대통령·이기붕 부통령후보 선거대책위원회’로 변모시키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고, 일제 강점기에 권력을 누렸던 친일유림들까지 가세하며 결국 심산 선생은 말년에 이르러 유도회총본부 위원장, 성균관장, 성균관대학교 총장, 재단법인 성균관 이사장 등 모든 직위에서 쫓겨난 채 본인 명의의 집 한 채도 소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1962년 5월10일 서울 국립중앙의료원에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는데, 지난 1957년 성균관 수복 가문으로 시집와 67년째 성균관과 함께 하는 김인겸(金仁謙, 1936-현재) 여사는 ‘(일제의 고문으로) 앉은뱅이였던 심산 선생을 남편인 고(故) 이정우(李楨雨, 1932-2012, 수복으로 43년 재직)이 업고 여기 저기 다녔고, 높은 분들부터 지역의 어른들까지 끊임없이 손님들이 찾아오셔서 그분들을 대접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불교의 동국대, 천주교의 가톨릭대, 기독교의 여러 대학교, 원불교의 원광대 등 한국을 대표하는 7대 종단 대부분이 운영하는 대학을 지금도 가지고 있는데 비해 유림들의 재원과 노력으로 설립된 성균관대학교는 지금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불투명한 과정을 거쳐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에 유교 종단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지금은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의 이사회에 성균관이나 유림 대표가 1명도 들어가 있지 않다.

 

한편 격동의 한국현대사 속에서 지난 1970,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현직 국회의원이나 장관, 도지사, 성공한 사업가 정도의 쟁쟁한 경력을 가진 이들이 재단법인 성균관 이사장, 유도회총본부 회장, 성균관장 및 부관장 등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고, 지역의 향교재단 이사장들도 그에 못지 않을 정도의 대단한 약력을 자랑했는데 그 과정들은 창간 55년의 역사를 가진 <유교신문>과 전신(前身)인 <유림월보> <유교신보> 등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고 성균관장으로 취임했던 고(故) 김경수(金敬洙, 1920-2009) 제21·22대 관장(재임 1987.9.13.-1994.4.30.) 시절인 지난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당시 노태우(盧泰愚, 1932-2021) 민정당 후보의 대선공약의 일환으로 제기됐다는 ‘성균관 유림회관 건립’은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가 분리된 후 유림기관의 업무를 위한 공간이 변변치 않아 서울 문묘 성균관 안의 명륜당, 정록청, 존경각 등의 오래된 건물들을 사용해 온 유림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1987년 11월 말부터 30억여 원의 국고 및 유림의 헌성금이 투입되어 완공된 후 지난 1990년 1월12일 첫 업무를 개시한 성균관 유림회관에는 성균관장실·유도회총본부 위원장실·재단법인 성균관 이사장실·성균관 총무처·유도회총본부·유도회 서울시지부·재단법인 성균관 사무국·전례 및 교화위원회·고전강좌강의실·유교사전편찬실·청년유도회·(본지의 전신인) 유교신보사가 입주했으며, ‘유교 발전과 도의 선양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라’는 당시 유림 어른들의 뜻에 따라 운영을 맡았던 재단법인 성균관은 유림기관들에 대해서는 임대료 및 관리비를 받지 않았고, 이런 전통은 지난 1990년대 중반부터 유림들의 헌성금이 보태지며 완공된 지역의 유림회관 운영기관에서도 동일하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건립을 주도했던 어른들은 ‘나라에 맡기면 이후에도 우리들을 도와줄 것이다’라는 선의의 뜻으로 성균관 유림회관 건물이 한창 공사 중이던 지난 1988년 12월15일 ‘30년 사용 후 국가에 기부 채납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에 따라 지난 2018년 기간 종료에 따라 등기부등본의 내용이 ‘소유자-국(國), 관리청-문화재청(현재의 국가유산청)’으로 변경되었다.

 

‘문묘 수호와 각종 의례 봉행은 성균관, 유림과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교화 및 교육은 유도회총본부, 재산관리 및 운영은 재단법인 성균관으로 한다’는 심산 김창숙 선생과 초창기 어른들의 뜻에 따라 해방 이후부터 지난 2015년까지 성균관, 유도회총본부, 심지어 본지 직원들에 대한 급여와 각종 운영비를 책임지고 유림회관도 관리했던 재단법인 성균관은 천안향교 소유의 토지에 건립하던 유림연수원 건설이 과다한 비용 지출로 좌초되면서 최소 몇십억 원에 달했던 보유 재산, 정부로부터 받은 국고 건설지원금 50억 원, 유림회관 입주업체들로부터 받은 임대보증금 14억 1천만 원, 기타 금액까지 모두 소진하고 4대 보험료 연체액 등 부채만 가득 가진 채 이름만 존재하는 기관으로 있다가 지난 8월21일 신임 이사장을 선출하며 재건을 추진하고 있다.

 

다만 파산상태에 이르렀던 재단법인 성균관을 대신해 지난 2016년 1월부터는 성균관이 유림회관의 수탁기관으로 지정되어 건물을 관리하고 있다.

 

2. 선배 유림의 자금과 노력으로 만들어져 보존된 ‘성북동 토지’

 

복잡한 현안들로 인해 2013년부터 성균관장 직무대행이 연이어 선임되고, 새로 선출된 관장들도 유교가 아닌 기타 종교 추구, 학력 위조, 각종 거짓말 논란에 휩싸이며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여파가 지속되는 가운데 성균관을 출입하던 유림지도자들은 재단법인 성균관의 부실화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진 중앙종단의 재산 마련, 오래된 유림회관의 대체 건물 건설, 유교박물관 건립 등을 염두에 두고 지난 2013년 7월2일 한국자산관리공사의 공매를 통해 교보생명보험이 소유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소재 3필지의 토지(산25-59/산25-106/산25-117, 면적 38,760㎡-약 11,745평, 지목(地目)-임야)를 8억 2,090만원에 낙찰(1평당 약 7만 원으로 책정된 셈임)받고 부관장들이 모은 1억 2천만 원, 박남호 성균관유도회총본부 회장이 헌성한 1억 원, 최근덕 원임 성균관장이 성균관에 입금한 6억 원으로 자금을 마련해 계약을 체결했고, 그해 10월18일 성균관으로 소유권이 이전됐다.

 

내부 논의와 성균관 정기총회 등을 거쳐 2013년 9월28일에는 성균관유교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이하 건립추진위원회)가 발족되며 기존에 언급되던 유림회관의 기능까지 포함해 건립을 진행하기로 했으나 예정부지 중 1필지인 산25-59번지의 토지 5,220㎡(약 1,582평)가 성북구의 ‘북악산도시자연공원(정법사지구 조성사업)’ 부지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11월에 지급된 보상금 5억 1,600만원(1평당 약 32만 6200원으로 책정된 셈임)이 건립추진위원회 정관 제19조(재정) 2항 ‘재정은 유교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의 발전기금에 포함하여 관리하되 타 재산에 편입되지 않도록 위원회에서 별도 관리해야 한다’고 명시된 대로 건립추진위원회의 계좌에 입금되어 보관되어야 했으나 2014년 10월7일 열린 성균관 임시총회에서 ‘성북구와의 협의 또는 수용에 관한 성균관의 권한 일체를 관장에게 위임한다’는 안건을 두고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격한 대립이 있었고, 이후에는 ‘당장 운용자금이 없어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성균관장 직무대행과 성균관 총무처에서 직원 급여, 법인카드 결제 비용 등으로 모두 사용하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

 

2013년 매입 당시 1㎡당 개별공시지가는 산25-59(5,220㎡, 약 1,582평)가 4만 7400원, 산25-106(33,210㎡, 약 10,060평)이 4만 6500원, 산25-117(330㎡, 100평)이 4만 9500원이었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산25-59 토지는 성북구의 공원 부지로 편입되어 현재는 서울시 소유이며, 나머지인 산25-106과 산25-117 토지가 성균관 소유로 남아 있는데 지금의 임야대장을 통해 확인하면 2024년 1월1일자 기준 각각의 1㎡당 개별공시지가는 5만 1600원, 5만 4500원이다.

 

이를 다시 계산해 보면 산25-106은 면적이 33,210㎡이니 1㎡당 개별공시지가 5만 1600원을 곱하면 17억 1363만 6천 원이고, 산25-117은 면적이 330㎡이니 1㎡당 개별공시지가 5만 4500원을 곱하면 1798만 5천 원이니 두 곳의 개별공시지가 합은 17억 3162만 1천 원에 달한다.

 

이 토지들은 보전산지, 공익용산지, 토지거래계약에관한허가구역, 도시자연공원구역,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 도시지역, 자연녹지지역, 비오톱1등급, 개발제한구역, 제한보호구역(후방지역:500m), 대공방어협조구역 등 각종 규제들로 겹겹이 묶여 있어 개발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인데도 역대 성균관장들은 ‘내가 규제를 다 없애겠다’고 큰소리를 쳤다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소중한 성균관 자금만 소위 ‘개발추진비용’으로 허비해 유림들의 원성을 일으켰고, 현재의 성균관 총무처장은 ‘전임 관장 시절에 발생한 부당해고자 3인에 대한 각종 비용 마련을 위해 거래 은행에 대출가능 여부를 문의했으나 담보가치가 없다고 평가되어 활용할 방법이 없다’는 내용을 중앙종무회의 등 각종 회의에서 보고했다.

 

그러나 두 지번(산25-106, 산25-117)의 2024년 1월1일자 1㎡당 개별공시지가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인 1평(3.3㎡)으로 환산하면 산25-106(33,210㎡, 약 10,060평)은 (1㎡*51,600원)*3.3=170,280원이고, 산25-117(330㎡, 100평)은 (1㎡*54,500원)*3.3=179,850원이어서 매우 싼 땅으로 이해되기 쉬우나 이들 토지의 바로 옆에 국내 최초의 석조유물 전문박물관으로 1㎡당 개별공시지가가 2,133,000원에 달하는 우리옛돌박물관이 있고, 조금 떨어진 건너편에 한국가구박물관이 있으며, 독일대사관저와 네덜란드대사관저 등 최고급 주택들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최상위 입지이다.

 

아울러 바로 옆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계단으로 된 나무데크를 올라가 보면 성북동의 가장 위쪽 지역이라 광화문을 비롯한 서울 시내 주요 지역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최고급 위치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고, 근처 부동산 중개소에서는 ‘각종 규제들이 묶여 있기는 하지만 지금 거래하더라도 최소 1평당 1,300만원 이상은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추산되고, 만약 대통령실이 계속 용산에 있게 되어 청와대 주변에 대한 각종 규제가 풀릴 경우에는 부르는 게 값이 될 것이다’ ‘스타벅스 등 대표적인 브랜드 카페를 유치할 수 있으면 위치나 전망 등을 볼 때 아마 국내 최고의 입지를 가진 명소가 될 것이다’라고 평가하는 점으로 볼 때 단순하게 가정하여 1평당 1,300만원을 성균관 소유 2필지 토지 면적인 10,160평으로 곱하면 1,320억 8천만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에 이른다.

 

당장 모든 규제가 풀릴 수는 없겠으나 전임 성균관장 시절에 정법사 소유주인 재단법인 선학원과의 소송 과정에서 전체 10,160평 중 최소 3,000평 정도는 개발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확인되었는데, 3000평*1,300만원=390억 원이 지금의 잠재 가치로 추산된다.

 

한편 이들 토지 상당수 범위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정법사(서울 성북구 대사관로13길 44, 성북동 330)라는 절이 무단점유하고 있는데, 그들은 ‘지난 20년간 평온하게 점유해 민법 제245조 제1항에 의거하여 점유취득시효가 완성되었다’ ‘승려 및 직원 숙소, 산신각 등은 원래 소유했던 부지에 위치해 있다’ 등을 주장하며 비록 소유권을 성균관이 가지고 있더라도 자신들이 사용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버텨왔다.

 

이에 대해 성균관에서는 측량을 실시하여 ‘산신각, 숙소, 저장창고, 정자각(휴게실), 화장실, 불상 등이 성균관 소유 부지에 불법 건축되었으니 즉시 철거 및 원상회복하고, 만약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불법점유에 대해 법에서 규정하는 변상금을 납부하라’는 내용의 소송(사건번호 2021가단112441(본소)-토지인도, 2023가단148796(반소)-소유권이전등기)을 제기해 올해 2월15일 서울북부지방법원 민사12단독 재판부(재판장 김철환)의 1심 판결에서 ‘정법사의 소유자인 재단법인 선학원은 성균관에게 상당 부분의 토지, 약 1,670만원의 일시금과 지연이자, 철거완료일까지의 지연금을 지급하고, 성균관은 취득시효 완성을 원인으로 한 소유권이전등기절차를 이행하라’고 판결해 성균관의 손을 들어줬다.

 

해당 소송은 이상호 유교신문사 대표(원임 성균관 부관장, 현 성균관유도회총본부 수석부회장)가 실무를 맡고 지난 10년 동안 성균관의 소송을 전담해 왔던 변호사가 진행했다.

 

재단법인 선학원은 이에 불복해 3월14일 항소(사건번호 2024나33397)했다가 6월17일에 항소를 취하했는데, 알려진 바로는 성균관 총무처와 합의를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총무처는 중앙종무회의, 총회를 비롯한 각종 회의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전혀 공개하지 않고 있어 어떻게 합의가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이다.

 

3. 특정 개인이나 몇몇 사람 마음대로 운영되는 성균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성균관’과 ‘성북동 토지’는 선배 유림들의 피와 땀, 자금과 노력으로 만들어져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딛고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소중히 지켜지고, 가장 가치 있는 일에 활용되어야 하며, 특정 개인이나 몇몇 사람들이 마음대로 운영하거나 처리할 수 없는 우리 유림들의 귀중한 자산이다.

 

지난 1969년 4월30일 창간되어 올해 55주년을 맞이한 본지 역시 선배 유림들의 피와 땀, 자금과 노력으로 지금까지 존재했고 그들의 모습이 지면과 인터넷판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성균관장 및 성균관 총무처와 불편한 관계가 형성될 것을 각오하고 시리즈 기사를 통해 「(성균관장에게 발송한) 취재질의서」의 질문과 답변을 모두 공개하고, 답변의 허구성을 폭로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정론직필(正論直筆, 바른 주장을 펴고 사실을 그대로 전함)과 유교수호(儒敎守護)가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사명(使命)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