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공기 2576년 춘기석전 봉행- 본지, 창간 56년만에 처음으로 총무처 방해로 봉행 장면 대부분 촬영 못해
지난 2012년부터 재직 중인 이욱 수복이 명륜당 앞에서 헌관 및 제관들을 기다리고 있다.
석전 봉행 전에 헌관 및 제관들이 명륜당에 모여 있다.
명륜당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관내 일부 임직원 및 성균관대 청랑, 일무단이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찬자 이욱 수복의 인도로 제관들이 비천당으로 향하고 있다.
성균관 원로 등이 참례객 좌석 앞 부분에 앉아 있다.
정영진 당하집례가 참례객들에게 여러 내용들을 설명하고 있다.
일무단이 비천당 앞마당으로 향하고 있다.
(여성) 제관들이 관세위에 서립해 있다.
제관들이 잔을 들고 비천당 안으로 향하고 있다.
헌관들과 알자가 비천당 앞에 서립해 있다.
악단 중 위에 자리하는 등가(登歌) 연주자들이 문묘제례악을 연주하고 있다.
악단 중 아래에 자리하는 헌가(軒架) 연주자들이 문묘제례악을 연주하고 있다.
팔일무단이 문무(文舞)를 추고 있다.
문무가 이어지고 있다.
문무가 계속되고 있다.
참례자들이 사배하고 있다.
68년째 성균관을 지키는 '수복 가문' 김인겸 여사가 석전 봉행을 지켜보고 있다.
팔일무단이 무무(武舞)를 추고 있다.
무무가 계속되고 있다.
무무(武舞)라는 명칭에 걸맞게 춤을 추는 단원의 얼굴에 비장함이 가득하다.
일무단의 무무가 계속되는 모습을 참례객들이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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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의 전신인 <유림월보> 제6호(1969년 9월25일자) 1면에 추기석전 내용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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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묘 성균관에서의 가장 큰 유교의례인 석전 봉행 소식은 본지가 가장 신경쓰는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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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추기석전의 상세한 내용과 사진들이 <유림월보> 제6호(1969년 9월25일자) 4면에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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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23년 추기석전 봉행도 인터넷판을 물론 지면신문을 통해 유림과 국민에게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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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6일 열린 준비위 첫 회의에서는 본지 대표와 본지가 석전봉행위원회에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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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일에 배포된 팜플렛에서 본지 대표의 직함은 물론 '참여기관'에서 본지도 빠졌는데, '준비위원'인 '박광영 성균관 의례부장 겸 석전보존회 사무국장'은 직함을 모두 표시함으로써 사전 협의 및 통지 없이 석전 당일에 갑자기 본지의 비천당 내부 취재를 불허한 것이 의도적임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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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석전은 준비회의에서 기자를 내보내고, 직전까지 초헌관을 공개하지 않는 등 비밀 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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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춘기석전'에 관한 소식은 본지에만 게재됐고, 다른 언론을 통한 홍보는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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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9월23일 성균관 대성전에서 거행된 추계석전에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참석해 있다.

지난 1959년 9월29일 봉행된 성균관 추계석전 당시 대성전 앞마당이 인파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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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숙하고도 위엄있는 석전은 지난 시기 한국사회의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던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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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서거 직전인 1979년 추기석전에 금일봉을 하사한 내용이 당시 <유림월보>에 실렸다.
성균관(관장 최종수)은 3월9일 오전 10시 비천당에서 공기 2576년 춘기석전을 봉행했다.
(간편 유복을 입은) 관내 일부 임직원과 성균관대학교 유생문화기획단 청랑(靑浪) 학생들이 참례객들의 입장을 돕고 150여 명의 참례객,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예술감독 김성진)의 문묘제례악단, 성균관대 유가예술문화콘텐츠연구소 팔일무단(총괄 임학선 성균관대 명예교수)이 비천당 앞마당에 자리한 가운데 오전 10시부터 명륜당에 있던 제관들이 찬자 이욱(李旭) 수복의 안내로 비천당으로 들어서며 시작된 석전은 당상집례 서정택 전례위원장이 월대 위에서 홀기(笏記)를 읽으며 절차를 집행하고, 당하집례 정영진 석전대제이수자가 참례자들에게 각 과정에 대해 쉬운 설명으로 안내했다.
제집사 대부분이 비천당 안의 각자의 자리에 위치하고 헌관들이 입장하여 ‘행례(行禮)’를 시작으로 초헌관이 대성지성문성왕(大成至聖文宣王, 공부자)과 복성공(復聖公, 안자)·종성공(宗聖公, 증자)·술성공(述聖公, 자사자)·아성공(亞聖公, 맹자)의 신위 앞에 꿇어앉아 세 번 향을 사르고 폐비를 올리는 의식인 ‘전폐례(奠幣禮)’가 진행됐다.
초헌관이 5성위에 작을 올리고, 대축이 축문을 읽는 의식인 ‘초헌례(初獻禮)’와 아헌관이 5성위에 작을 올리는 ‘아헌례(亞獻禮)’에 이어 종헌관이 5성위에 작을 올리는 ‘종헌례(終獻禮)’와 분헌관들이 종향위에 꿇어앉아 작을 올리는 ‘분헌례(分獻禮)’가 계속됐다.
초헌관이 음복위에 나아가 복주와 조육을 받는 의식인 ‘음복수조례(飮福受胙禮)’에 이어 대축이 대축 찬인의 인도를 받아 변과 두를 거두며 ‘철변두(徹籩豆)’를 진행했다.
초헌관이 축문과 폐백을 불사르고 땅에 묻는 의식인 ‘망예례(望瘞禮)’와 마지막으로 알자가 초헌관에게 의식을 마쳤음을 아뢰는 ‘예필(禮畢)’로 모든 과정이 마무리됐다.
이번 춘기석전의 제관은 다음과 같다.
▶초헌관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아헌관 김정수 성균관 부관장 ▶종헌관 손병태 성균관 부관장
▶분헌관 ▷동종향위 방석관 성균관 자문위원 ▷서종향위 김대영 전 광산문화포럼 이사장 ▶전사관 김경선 석전대제이수자 ▶집례(당상) 서정택 전례위원장 ▶집례(당하) 정영진 석전대제이수자 ▶대축 성석기 성균관 전인 ▶묘사 원재식·이상명·황미숙 석전대제이수자, 안도섭 전례위원 ▶알자 윤여빈 석전대제이수자 ▶찬인(분헌관) 양재환 석전대제이수자 ▶찬인(대축) 정연대 석전대제이수자 ▶사세 성기숙 전례위원·배경숙 석전전례사 ▶정위 및 배위 ▷봉향 하영호 석전대제이수자 ▷봉로 김형열 석전대제이수자 ▷봉작 최광경 석전대제이수자 ▷전작 권선출 석전대제이수자 ▷사준(정위) 민효순 석전대제이수자 ▷사준(배위) 김옥란 석전대제이수자 ▶동종향위 ▷봉작 김종호·강성범 전례위원 ▷전작 박준서 전례위원 ▷사준 한순복 전례위원 ▶서종향위 ▷봉작 이의석·이운배 전례위원 ▷전작 이재철 전례위원 ▷사준 최순임 전례위원 ▶진설 박종철 석전대제이수자 ▶복식 김숙자 석전대제이수자 ▶감찰 박광영 의례부장 ▶찬자 이욱 수복
그런데 본격적인 봉행에 앞서 총무처 직원들은 "오늘은 (총무처의) 이찬호 관리부장만 (카메라를 들고) 비천당에 들어갈 수 있고, 다른 언론사들은 못 들어간다"고 하더니 봉행 시작 전에 정영진 당하집례는 참례객들에게 "비천당 안의 공간이 비좁아 헌관 외에 다른 분들이 입장할 경우 의례 집례에 큰 지장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사전에 입장을 허락받은 분 외에 취재를 목적으로 참석한 기자나 영상 촬영을 위해 방문한 분들은 비천당에 들어가거나 월대 위로 올라가지 말고 반드시 월대 아래에서 취재나 촬영에 임해줄 것을 당부드린다. 보도나 영상 편집에 활용할 사진과 동영상이 필요한 분들은 행사 종료 후 성균관으로 자료를 요청하면 지원해 드리겠다"는 설명을 별도로 하는 등 서로의 말이 달랐다.
게다가 의례가 봉행되는 과정을 순서대로 촬영하다가 초헌관의 전폐례를 촬영하기 위해 비천당으로 이동해 옆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으나 총무처의 이찬호 관리부장이 문을 막아선 채로 "들어올 수 없다"며 기자를 손으로 강하게 밀어냈고, “사전 양해나 협의도 없었고, 본지 역사상 이렇게 했던 적은 없었다”고 항의하는 기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고리를 아예 걸어 잠갔으며, 이런 모습을 봤던 신화철 총무부장은 좀 있다가 다가와서 “유교TV방송 측에서 사진을 받아라. 총무처의 방침이다”고 하여 “왜 유교TV방송에서 받아야 하느냐? 우리가 유교TV방송의 아랫 기관이냐?”고 질문했으나 답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유교TV방송에서 받으라"는 황당한 이야기만 거듭했다.
하지만 유교TV방송은 총무처와 사전협의가 되어서인지 비천당 안에서 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다.
지난 1969년 4월30일 창간 이후 지금까지 56년간 본지는 ‘유교권 유일의 전국 신문’으로서 성균관의 대부분 행사는 물론 춘기·추기석전을 취재해 사진과 함께 계속 보도해왔는데, 가장 먼저인 1969년 9월19일(음력 8월8일) 오전 10시에 대성전에서 봉행된 ‘공부자 탄생 2520년 추기석전’은 며칠 후인 9월25일자로 발행된 (본지 전신인) <유림월보> 제6호 1면과 4, 5면에 크게 실렸고, 최근인 2024년 9월10일 오전 10시 비천당에서 봉행된 ‘공기 2575년 추기석전’도 본지 인터넷판(/coding/news.aspx/6/11/90026)과 지면신문 제1123호(2024.9.10.) 1면과 2면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지금까지 분향과 알묘를 포함해서 본지가 취재를 위해 대성전이나 비천당을 들어가지 못한 경우가 없었고, 존재를 알 수 없는 외부 언론사나 혹은 기자임을 사칭하는 이들의 무분별한 출입을 통제하는 경우는 있었으나 유림과 국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본지의 취재를 성균관 석전에서 막았던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이상한 분위기는 이미 앞서 느낄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 올해 춘기석전을 한 달 정도 앞둔 지난 2월6일 오후 2시 성균관 유림회관 2층 회의실에서 개최된 ‘공기 2576년 성균관 춘기석전 봉행위원회’ (첫 번째) 회의에서 최종수 성균관장의 인사가 끝나고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김기세 총무처장은 “언론 쪽은 나가줬으면 고맙겠다”고 했고, 회의를 진행하던 박광영 의례부장은 “촬영, 영상 촬영을 하지 않겠다”고 확인했으며, 여기에 대해 유교TV방송 기자가 “회의 기록 자체를 아예 안 하는 것이냐?”고 묻자 사회자인 박광영 의례부장은 “그렇다”고 다시 한번 확인해 그 자리에 있던 본지와 유교TV방송 기자들이 한꺼번에 자리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석전준비회의 자체를 비공개로 진행하는 것도 역시 그동안의 석전에서는 없었던 일이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총무처에서 밝히지 않았으므로 지금까지 알 수 없었고, 그 이후에도 아무런 연락이나 양해, 협의, 통지 없이 석전봉행 당일 아침에 갑작스럽게 “(총무처의) 이 모 관리부장만 비천당에 들어갈 수 있다”거나 “사전에 입장을 허락받은 분만 비천당에 들어가거나 월대에 올라갈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동안 유림 사회에서 기본예절로 통용되어온 「사전 협의를 통한 대화와 타협의 원칙」을 총무처가 앞장서 깨뜨리며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방식으로 유교 언론의 취재 제한 및 유림과 국민의 알 권리를 정면으로 무너뜨렸다.
이번 석전의 초헌관을 누가 맡을 것인지 봉행 직전까지도 아예 알려지지 않아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다가 지난 3월5일 오전 <경기일보>가 ‘여권 잠룡 김문수, 유교 성균관 춘기석전 참석’ 기사를 보도하면서 최근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를 앞두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여권 지지율 1위, 종합 지지율 2위’인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의 초헌관 천망(薦望) 사실이 최초로 알려졌고, 석전 준비에 가장 큰 수고를 하는 성균관 수복(守僕) 등의 관계자들도 전혀 모를 정도로 비밀스럽게 진행됐다.
본지는 지금도 매일 업데이트되는 인터넷판(http://www.cfnews.kr) 기사들이 네이버, 다음 등의 주요 포털을 통해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 어디서든 검색할 수 있도록 노출되고 있고, 매달 1일과 15일 등 2회에 걸쳐 발간되는 지면신문을 통해 주요 정부 부서, 지방자치단체, 사회지도층, 이웃종교 관계자, 유림, 국민들에게 유교권 및 유림의 주요 소식들을 거의 유일하게 전하는 유교언론으로서 공부자(孔夫子)를 비롯한 성현들을 높이 받드는 최고의 유교의례인 ‘서울 문묘(文廟) 성균관(成均館) 석전대제(釋奠大祭)’가 무엇보다도 신속·정확하고,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축소된 사회적 영향력을 회복하고,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유교가 방향을 제대로 설정하고 있음을 알려야 하는 사명이 있다고 여겼으나 오늘의 사태는 그 자리에 참석한 참례객 상당수가 목격했으므로 어떤 말로도 다르게 표현하기 어렵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소중한 자료들이 격동의 역사 속에서도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은 ‘오랜 기간동안의 내용이 기록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설령 국왕과 권력자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적거나 때로는 비판하는 내용도 가감없이 수록되었고, 사관들이 소신을 가지고 그것을 할 수 있도록 국왕조차 절대 마음대로 완성본을 볼 수 없게 하는 방식을 조선왕조가 멸망하는 시기까지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본지의 인터넷판과 지면신문에 남는 내용들은 단순하게 하나의 신문 기사가 아니라 유교종단의 거의 유일한 기록이자 한국 현대사, 여성사, 종교사, 사회사, 복식사(服飾史) 등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귀중한 자료로 제공되고 있는데 성균관 총무처의 위압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로 인해 ‘공기 2576년(서기 2025년) 3월9일 오전 10시에 비천당에서 봉행된 춘기석전’은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 전해지는 기록으로 남게 됐다.
아울러 지난해 8월 본지가 보도했던 ‘[공기 2575년 추기석전 D-22] 특집-기독교인 대통령도 참석하고, 무교 대통령도 매번 헌성금을 냈던 서울 문묘 성균관 석전(釋奠)’ 기사(/coding/news.aspx/2/1/89336)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알려져 있는 이승만 대통령(李承晩, 1875-1965)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Francesca Donner Rhee, 1900-1992) 부부도 지난 1954년 9월23일에 성균관에서 봉행된 추계석전에 참석해 유교 전통 의례의 소중함을 인식했고, 유튜브의 ‘대한뉴스 제 233호-석전 대제’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B5XMJTIyf8Y)은 지난 1959년 9월29일 성균관 대성전에서 봉행된 추계석전에 공자의 77대손으로 대만에 거주하던 공덕성(孔德成, 중국명 쿵더청, 1920-2008) 선생이 당시 40세 젊은 연령의 모습으로 참여했고, 그런 모습들을 보기 위해 대성전 앞마당이 참례객들로 가득 채워진 모습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본지의 전신인 <유림월보> 제6호(1969.9.25.) 1면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1969년 9월12일 봉행된 추기석전의 초헌관은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 대행(代行)인 신범식(申範植, 1923-1992) 문화공보부 장관이었으며, 우리 전통문화에 큰 관심을 가졌고 특정 종교를 믿지 않았던 박정희 대통령은 매년 봄, 가을에 봉행되는 석전에 빠짐없이 금일봉(金一封)을 하사한 내용이 <유림월보>에 기록되었고, 심지어 1979년 10·26 사건 발생 직전인 그해 9월27일 오전 10시에 성균관 대성전에서 봉행된 ‘공자탄강 2530년 추기석전’에도 나타나며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도 헌성 명단에서 빠진 적이 없다.
대통령 및 정치권 인사들의 적극적인 관심, 주요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참여, 일반 대중 다수의 참례, 주요 일간지 및 본지의 보도를 통한 전국적인 홍보,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희귀성 등의 여러 요소들이 맞물려 장안의 큰 화제였던 서울 문묘 성균관의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지금처럼 폐쇄적이면서 일방통행식 진행으로 이어가는 것이 과연 도움이 되는 것인지에 대한 유림 사회의 논의와 합리적인 결정이 필요함을 이번 춘기석전은 우리에게 과제로 제시함과 동시에 '더 이상은 이렇게만 해서는 안된다'는 새로운 숙제도 부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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