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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종단

대구지방보훈청, 4월의 현충시설로 ‘김창숙 선생 생가’ 선정

국가보훈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2025년 4월의 독립운동으로 선정

오흥녕
2025.04.04·7분 읽기·조회 55

 

 

대구지방보훈청은 4월의 현충시설로 ‘김창숙 선생 생가’를 선정했다.

 


 

 

심산 선생 생가의 내부 모습이다.

 


 

 

심산 선생 생가는 경북 성주시 대가면에 위치해 있다.

 


 

 

석전대제 봉행 후 성균관 명륜당 앞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앞줄 가운데가 심산 선생이다.

 


 

 

성균관대학 학장 시절인 1948년에 성균관 명륜당 앞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했다.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열린 성균관대학 졸업식 모습이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서 경찰이 휘두른 곤봉에 맞은 심산 김창숙 선생이 피를 흘리며 연행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무리한 직선제 개헌과정에서 발생한 부산정치파동 당시인 1952년 6-7월경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모습으로 왼쪽은 피 흘리는 심산 김창숙 선생, 오른쪽은 조병옥 박사이다(출처 : 유튜브)

 


 

 

1953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성균관대학 3회 졸업식 후 촬영한 사진이다.

 


 

 

심산 선생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진이다.

 


 

 

 

성균관대학교 총장실에서 집무 중인 심산 선생의 모습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쫓아내려는 불순세력에 대한 자필 성명서로 1957년에 작성됐다.

 


 

 

 

 

 

 

1960년 4·19 혁명으로 되찾은 성균관 대성전에서 심산 선생이 앉아 있다(출처-한겨레21).

 


 

 

1962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상했다. 

 


 

 

건국훈장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은 정부 수립 이후 현재까지 61명에게만 수여됐다.

 


 

 

심산 김창숙 선생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패용한 채 앉아 있다.

 


 

 

본인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두 아들에게도 건국훈장이 수여됐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서거 직전인 심산 선생을 병문안하고 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선생 영전에 조문하고 있다.

 


 

 

1962년 5월10일 서거한 선생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뤄졌고, 언론을 통해 국민들에게 보도됐다.

 


 

 

성균관대학교에 세워진 심산 김창숙 선생의 동상은 드높은 기상을 표현한다.

 


 

 

 

 

대구지방보훈청(청장 김종술)은 경북 성주군에 위치한 ‘김창숙 선생 생가’를 「국가보훈부 선정 2025년 4월의 독립운동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맞춰 4월의 현충시설로 선정했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선생은 경북 성주에서 출생해 어려서부터 한학에 매진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승인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1847-1916) 선생과 함께 을사 5적의 참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8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전국단연동맹회 성주대표로 활동하며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영남·호남·호서의 유림 중진을 설득해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인 장서(長書)를 작성하여 중국으로 망명한 뒤 영문 및 한문으로 각각 3,000부를 인쇄하여 파리강화회의 회장 및 각국 대표, 중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주요 기구 및 언론계, 국내의 향교에 송부하며 유림단 독립청원운동(일명 ‘파리장서사건’)을 주도했다.

 

이후 상해에서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김구 등과 함께 임시의정원을 조직하고 1926년 이동녕, 김구, 김원봉 등과 상의해 의열단(義烈團)의 나석주(羅錫疇)를 파견하여 그해 12월28일 서울의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를 폭파케했다.

 

1927년 5월 병으로 상해 공동조계(共同租界)에 있던 영국인 병원 공제의원(公濟醫院)에 입원했다가 일본 밀정에 발각되어 국내로 압송되었으나 변호와 공소 모두 거절한 후 재판을 받던 중 악독한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는 장애를 입었고, 징역 14년형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4년 9월 병이 위중해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다.

 

1945년 8월15일 광복이 되자 그해 서울 성균관(成均館) 명륜당(明倫堂)에서 전국 유림 천여 명이 참석한 전국유림대회를 열고 민족고유문화의 근간인 도의의 혁신과 향상, 성균관대학(成均節大學)의 설치, 이를 위한 재단의 구성 등을 결의했고, 1946년 3월13일 전국 유림 2,500여 명이 참석해 성균관 명륜당에서 열린 유도회(儒道會) 창립총회에서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됐으며, 1946년 9월25일 미군정청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정식으로 인가 받아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유교 조직의 정비와 교육사업에의 매진뿐만 아니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정권으로 변모해가자 1951년 하야경고문(下野警告文)을 발표했고,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승만 정권이 부산정치파동과 국제구락부사건(國際俱樂部事件) 등으로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재선을 위한 직선제 개헌을 밀어붙이자 이에 맞서다가 경찰 곤봉에 맞아 피를 흘리며 연행되는 등 민족을 위한 불굴의 의지는 지속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6년에는 성균관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켜 초대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당시 천만 명에 이를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던 유림조직을 본인들의 장기독재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이승만 정권이 친일 유림, 깡패, 사이비 유림들을 대거 동원해 끊임없이 몰아내려는 시도에 시달리며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친일어용세력을 몰아내고 성균관을 다시 수복했고, 새로 들어선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는데 ‘대한민국 〈상훈법〉 제11조에 따라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최고등급의 건국훈장’은 지금까지 불과 61명에게만 수여될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국가보훈부는 지난 2012년 10월17일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2길 50-4번지에 있는 선생의 생가를 현충시설로 지정해 보존하고 있으며, 매년 많은 유림 및 관람객들이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방문하고 있다.

 

한편 국가보훈부(장관 강정애)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2025년 4월의 독립운동으로 선정 발표했는데, 일본 제국의 국권 침탈과 식민 통치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민주공화국을 완성하기 위해 1919년 4월11일에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헌법 전문에서 그 의의를 명시하고 있을 정도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토대가 되었다.

 

광복 80주년의 역사적인 해를 맞이해 국가보훈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2025년 4월 독립운동 선정과 대구지방보훈청의 ‘김창숙 선생 생가’의 4월 현충시설 선정은 같은 맥락이며, 선배 유림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