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호서원, 묘정비 건립
비문 허권수 경상대 명예교수 짓고, 정문장 서예가 쓰고,,.진주시에서 세움
정면사진
측면사진1
후면사진
측면사진2
가호서원(충의공 농포 정문부 선생 위패봉안)에서는 지난해 12월28일 ‘가호서원충의사묘정비‘를 건립했다.
이 묘정비의 비문은 실재 허권수 경상대학교 명예교수가 짓고, 죽헌 정문장 서예가가 썼으며, 진주시의 도움으로 건립했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佳湖書院 忠義祠 廟庭碑>
역사상 유례가 없는 참혹한 7년 大戰亂인 壬辰倭亂 때 朝鮮이 망하지 않은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義兵의 활동이다. 많은 義兵將 가운데 가장 혁혁한 戰功을 세운 인물이 바로 北忠毅南忠武로 일컬어지는 忠毅公 農圃 鄭文孚 선생이다.
선생은 文武兼全한 걸출한 人物로 왜적의 손에 거의 망해가는 나라를 구출한 위대한 戰功을 千秋에 남겼으니, 우리 후인들은 선생의 爲國忠節을 길이 欽仰하면서 역사상의 훌륭한 스승으로 삼아 배워야 하겠다.
書院은 원래 學德이 있는 先賢들을 尊崇하는 곳이다. 선생을 모신 사당 네 곳이 모두 咸鏡道에 있고, 남한지역에는 선생을 향사하는 곳이 없었다.
위대한 선생에게 대한 典禮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儒論이 세차게 일어나자, 선생의 宗孫 奎燮과 후손 九錫 등이 유림과 후손들의 역량을 규합하여 마침내 후손들이 세거하는 晋州 貴谷에 佳湖書院과 忠義祠를 창건하였다. 祠額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1997년 남강댐 숭상공사로 현재의 龍巖里로 이전 확장하였다. 이때 대종친회의 도움과 후손 한재의 역할이 컸다. 後에 藏板閣, 유물관을 건립하였고, 2013년에는 北關大捷碑 이모비와 국역비도 세웠다.
선생의 字는 子虛, 호는 農圃, 본관은 海州이다. 海州鄭氏는 高麗 侍中 諱肅을 시조로 삼는다. 朝鮮朝에 들어와 諱易은 大提學 左贊成을 지냈고, 領議政에 追贈되었고, 諡號는 貞度이다. 고조는 通政大夫 諱延慶, 증조는 判書 諱希儉, 조부는 參判 諱彦慤, 부친은 判書 諱愼이다. 모친은 將仕郞 金興禮의 따님이다.
1565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아주 聰英하여 7세 때부터 시를 지었는데, 그 시가 문집에 남아 있다.
1585년 生員 進士에, 1588년 24세에 文科 甲科 2위로 급제하였다. 弘文館 修撰, 知製敎, 司憲府 持平 등 직을 거쳐 1591년 7월 咸鏡道 兵馬評事에 임명되었다.
1592년 4월14일 왜적 20만 여명이 朝鮮을 침략하여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와 6월에는 倭將 加藤淸正이 鐵嶺을 넘어 함경도로 침입해 들어왔다. 관군은 다 무너지고 고을 원들은 도망쳐 숨으니 함경도 전체가 왜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전란의 틈을 타고 女眞族도 침략하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전 鞠景仁, 鞠世弼 등은 왕자 臨海君, 順和君과 대신들을 잡아 왜적에게 바쳤다. 민심이 흉흉하였으나 누구 한 사람 지휘할 사람이 없었다.
선생은 7월에 倡義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몇 달 뒤 鏡城의 儒生 崔配天,鍾城府使 鄭見龍 등 여러 사람들이 창의하고 선생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선생은 倡義檄文을 지어 함경도 백성들에게 忠義로써 격려하니, 온 道의 사람들이 奮起하였다.
9월19일 吉州의 倭賊을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첫 번째 勝 捷으로, 이때부터 軍聲이 크게 떨쳤다.
28일 다시 檄文하여 天道와 人道를 헤아리고 忠義를 말하니 名正言順이라, 함경도 사람들이 격문을 읽고 울며 와서 호응했고, 인심도 크게 안정되었다.
會寧의 아전과 군사들이 叛賊 鞠景仁 및 그 무리들의 목을 베어왔다. 宣祖에게 狀啓를 올렸다. 곧 이어 鞠世弼의 목을 베고 또 장계를 올렸다.
선생은 호령이 엄숙하고 상벌이 분명했으므로, 감히 군법을 범하는 사람이 없었다.
10월 그믐에 吉州 長坪에서 倭賊과 激戰하여 적장 5명을 죽이고, 820여 명의 목을 베고, 말 180필을 얻었다. 왜적들이 생포해 가던 우리 백성 및 가축 무기 등을 탈환했다. 이에 원근에서 호응하여 의병이 7천 명에 이르렀다. 후세의 평하는 사람이, “임진왜란 중에 민중들을 忠義로써 격려하여 온전히 승리하고 전란을 극복한 것은 農圃에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다.”라고 했다.
12월25일 선생은 길주성 주위에 복병을 설치해 놓고 臨溟으로 이동하여 수백 명을 목 베었다. 軍聲이 크게 떨쳤고, 왜적들은 더욱 두려워하였다.
그때 臨海君을 호종하여 왔던 尹卓然이 咸鏡道 監司가 되어 왔다. 선생의 관직이 兵事이면서 義兵大將이라고 일컫는 것과 세운 戰功이 자기보다 나은 것 등을 시기하여 조정에 아뢰면서, 선생을 誣陷하여 戰功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는 억울한 일이 벌어졌다. 윤탁연이 의병대장직을 바꾸자, 선생은 6진을 巡行하며 백성을 안정시키고 叛黨을 베고 오랑캐를 불러 開諭하니 감히 다시 난리를 꾀하지 못하였다.
1593년 1월9일 선생은 叛賊 鞠世弼의 목을 벤 공만 인정되어 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정현룡이 의병대장의 역할을 못 하자, 선생을 다시 의병대장으로 삼았다.
22일 端川에서 수백 명의 왜적을 격파하였다. 크고 작은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을 정도로 탁월한 전술을 전개하였다.
2월1일 加藤淸正이 의병에 포위된 吉州의 왜적 부대를 구출하려고 스스로 2만명을 거느리고 마천령을 넘어 오자, 선생은 군사 3천명으로 그 뒤를 끊고 굳센 군사를 지휘하여 60여리를 싸우면서 白塔郊에 이르러 大破한 후 영동까지 추격하였다.
이때부터 왜적이 다시는 함경도에 들어오지 못 했다.
선생이 마침내 장평・임명・단천・백탑교의 4大捷과 6진을 鎭定한 공로를 기록하되, 모든 공을 장병들에게 차등 있게 돌리고 전혀 자신의 공로로는 삼지 않았다. 崔配天을 行在所로 보내어 이러한 戰功을 아뢰었더니, 宣祖가 접견하고서 눈물을 흘렸다.
선생의 大捷으로 咸鏡道를 수복한 것은, 나중에 壬辰倭亂을 승리로 끝내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1594년부터 永興府使, 吉州牧使 등 직을 거쳤는데,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돋보였다. 御史가 치적을 아뢰자 宣祖가 옷감을 하사하였다. 선생이 떠난 뒤 백성들이 遺愛碑를 세웠다. 咸鏡道 評事로 부임한지 8년 만에 위대한 戰功과 治績을 남겼다.
1597년 공주목사 재직 때 조정에서 지방의 鎭管制度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西厓 柳成龍이 선생의 통솔하는 것이 법도가 있음을 보고 宣祖 임금에게 아뢰어 軍政을 정돈하게 하고 이를 본받게 하였다.
1599년 文科 重試에 장원하였다. 1601년 嘉善大夫 禮曹參判에 除授되었다.
1610년 謝恩副使로 北京을 다녀왔는데, 燕行詩를 여러 수 지었다. 그 다음 해 南原府使에 임명되어 유학을 크게 일으켰다.
1612년 桐溪 鄭蘊, 石潭 李潤雨와 서로 왕래하며 학문을 토론하였다. 당시 李爾瞻 등 大北派가 심히 발호하였는데, 선생에게 동조할 것을 요청했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
1618년 9월 昌原府使로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그 다음해 봄에 星州로 寒岡 鄭逑先生을 찾아가 經書와 禮書를 강론하여 크게 稱許를 받았다.
1623년 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선생을 元帥로 등용하고자 했으나, 외직을 청하여 4월에 全州府尹에 임명되었다.
1624년 2월 李适이 난을 일으켰는데, 조정에서 선생을 副摠管에 임명하여 起復하려 하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 했다.
10월 창원부사 당시에 지은 詠史詩 楚懷王에서 孱孫이 仁祖를 빗대고 정통성을 부정하였다는 명목으로 죄를 얽어 원통하게 옥사하니, 11월 19일이었다.
1625년 2월 의정부 松山 선영의 아래 酉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선생의 일생은 忠義로 기병하여 누란의 國家 위기를 극복하고 節操와 愛民으로 탁월한 牧民의 치적을 쌓았으며 孝友를 중히 하고 深學高德의 氣風을 널리 振作하였다.
1664년 李端夏가 咸鏡道 評事로 부임하여 戰功을 수집하고 관찰사 閔鼎重에게 보고하여 사당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1665년 이후 경성에 彰烈祠, 會寧에 顯忠祠, 부령에 崇烈祠를 세워 모두 賜額하고 국가에서 禮官을 보내어 제사 지냈다. 경성에 또 慕義祠를 지어 추모하였다.
1666년 議政府 左贊成에 추증되고 文衡의 영예를 얻었다.
1708년 北關大捷碑가 세워졌다. 1713년 忠毅라는 諡號를 받고 1788년 조정에서 不祧의 典禮를 인정하였다. 1970년 전국 유림의 발의로 진주에 忠義祠, 의정부에 忠德祠를 세웠다.
선생의 전공을 기록한 北關大捷碑를 1905년 일본군이 강탈하여 동경 야스쿠니신사에 둔 것을 2005년 환수하였다. 북한은 함경도 임명의 본래의 위치에 碑를 복원하여 국보로 지정하였고, 남한은 그 移模碑를 경복궁・독립기념관・송산묘소・충의사에 건립하였다.
선생은 시문에 능하여 많은 글을 지었으나, 전란으로 거의 다 없어지고, 詩와 狀啓 등만 남아 있는데, 『農圃集』으로 몇 번 간행되었다.
두 아들은 장례를 마치자 선생의 유언에 따라 晋州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이후 자손들이 진주 사람이 되어 번성하여 많은 인물들이 나왔다. 13대 종손 奎燮은 독립운동에 공헌하여 유공자가 되었다.
佳湖書院은 오래되지 않았으나, 그 명성과 공적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14대 宗孫 基敏이 論語學校를 개설하여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등 서원의 모범이 되고 있다.
여러 유림이나 후손들의 중론이 農圃先生의 사상과 행적 그리고 서원의 역사를 담은 廟庭碑가 갖추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서원의 沈東燮 院任과 基敏 宗孫이 불초를 찾아와 請文하기에, 크게 사양하지 않고 글을 짓고 뒤에 銘을 붙인다.
위대한 農圃先生, 文武를 兼全했네. 나라에 한몸바쳐, 倡義에 앞장섰네.
忠義에 바탕하여, 倭賊을 섬멸하여, 咸鏡道 수복하니, 나라가 蘇復됐네.
친자식 보살피듯, 백성을 사랑했네. 牧民官 모범되어, 遺愛碑 세워졌네.
北人이 발호할 때, 바른길 걸었나니, 反正後 元首推薦, 효성에 外職自願.
詩文에 뛰어나고, 學問도 깊었다네. 經學과 禮學으로, 寒岡이 稱許했네.
救國의 首勳에게, 謀叛罪 무슨말가? 奸黨의 악랄한짓, 원통타 獄死라니.
두아들 유언따라, 晋州에 정착했네. 후손이 창성하여, 원통함 풀었다네.
유림과 후손들이 欽崇할 곳이없어, 서원을 창설하여, 佳湖라 이름했네.
서원의 설립목적, 첫째가 尊賢養士. 현세에 적응하여, 전국에 모범이라.
선생의 救國精神, 잘배워 다시살려, 위대한 韓民族이, 세계에 앞서가리.
戊戌 2018年 仲秋節에
文學博士 慶尙大學校名譽敎授 金海 許捲洙 謹撰
14代孫 文丈 謹書
晉州市 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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