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암행어사 리포트

화성궐리사, 논산 문화유적 답사 실시

오흥녕
2023.07.04·4분 읽기·조회 5

 

 

노성궐리사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노성향교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화성궐리사 대표단(도유사 이호락) 23명은 지난 6월19일 제2차 문화유적 답사로 논산의 노성궐리사, 명재고택, 노성향교, 종학당, 돈암서원, 김장생 묘역 및 관촉사를 둘러보았다.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위치한 노성궐리사(魯城闕里祠)는 공자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으로, 궐리사라는 이름은 공자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인 궐리촌에서 유래했으며, 국내에는 오산의 화성궐리사(華城闕里祠)와 노성궐리사 두 곳뿐이다.

 

대표단은 노성궐리사에서 공자께 봉심을 했는데, 노성궐리사의 동쪽에 '궐리'라고 음각된 석주가 있었으며, 석주 근처에는 2002년 중국에서 구입한 높이 약 2m의 공자상이 있다. 곡부공씨대종회(曲阜孔氏大宗會)에서 기증했다고 한다.

 

숙종 13년(1687) 우암 송시열이 궐리사를 세우려고 했으나 2년 뒤 세상을 떠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숙종 42년(1716) 권상하·김만준·이건명 등의 제자가 현 위치에서 서쪽 방향으로 있는 노성산 아래에 궐리사를 세우고 다음 해에 공자의 영정을 봉안했으며, 순조 5년(1805)에 관찰사 박윤수가 지금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명재고택은 부드러운 산봉우리를 등지고 앞으로는 넓은 마당과 직사각형의 커다란 연못을 뒀는데 연못 앞쪽에서 바라보면 왼쪽에 노성향교가, 오른쪽 뒤편에 명재고택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종학당은 조선시대 소론의 영수 명재 윤증이 학문을 가르치던 곳으로 문과 급제자 42명, 무과 급제자 31명을 배출했는데, 파평 윤씨 문중의 자녀와 내외척, 처가의 자녀들이 모여 합숙교육을 받던 교육도장이다.

 

인조 21년(1643) 윤순거가 문중의 자녀교육을 위해 세운 후 종약(宗約)을 제정했는데,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가 1970년 지금의 종학당을 다시 지었다고 하며, 1910년까지 운영된 종학당은 일반 서원이나 서당과는 다르게 교육목표와 교육과정을 두고 학칙도 정하여 시행했다.

 

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1548~1631)의 강학 기반을 배경으로 건립된 서원이다. 황강 김계휘가 건립한 정회당과 김장생이 건립한 양성당에서 수학한 김장생의 제자들이 후에 스승을 추모하며 기리기 위해 돈암서원을 건립했다.

 

원래 서원은 현재의 위치보다 서북쪽으로 약 1.5㎞ 떨어진 하임리 숲말로 연산천에 가까웠는데, 수해를 피해 1880년(고종 17)에 현 위치로 이전했다. 서원이 처음 자리잡은 숲말 산기슭의 큰 바위를 돈암이라고 불렀는데, 서원의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참고로 돈암의 돈은 원래 ‘둔(遯)’자로 주역의 둔괘(遯卦)의 의미와 관련이 깊으며, 주자가 만년에 사용한 둔옹(遯翁)이라는 호를 가탁했으리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돈암서원은 1634년(인조12)에 창건됐으며, 김장생과 아들 신독재 김집의 문하에서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을 비롯해 이유태, 유계, 윤원거, 윤문거, 윤선거 등 수많은 명유(名儒)들을 배출했다.

 

이들의 활동으로 돈암서원은 호서지역의 산림과 예학의 산실이자 본거지로서 17세기 전 기간 동안 충청도 서인계의 수(首)서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돈암서원에서는 사계 김장생 선생의 예학정신이 담긴 지부해함(地負海涵), 박문약례(博文約禮), 서일화풍(瑞日和風)이란 글씨가 적혀 있는 꽃담이 눈길을 끌었다.

 

관촉사를 찾아갔을 때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석조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이 보수공사 중이라 장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관촉사 대광명전에는 삼존불(비로자니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이 봉안돼 있고, 법당 안에 반야심경 글이 걸려 있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내용제공 공기석 유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