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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 리포트

해남 옥천 통천최씨 사우 '대산사' 탐방

손은수 기자
2025.04.08·4분 읽기·조회 52

 

4월2일 대산사 제향을 봉행 중이다.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 대산사(大山祠)가 있다. 해남향교에서 매년 음력 3월 5일에 제향을 올리며 배향하는 통천 최씨 사우이다. 지난 4월2일 해남향교에서는 대산사 제향을 봉행했다.

 

대산사는 원래 고려말~조선초에 이르러 왜구토벌에 공이 컸던 양장공 최운해를 비롯 활연정 최윤덕, 옥포 최산정을 모셨던 사우 삼충사(三忠祠)로 조선 철종 13년(1862년) 전남 강진군 도암면 봉황리에 설립되어 위치했으나 일제강점기 해방 후 이곳 대산리로 이설하면서 근재공 최윤온을 합설해 4위를 배향하고 있다.

 

최운해(崔雲海)는 고려 공민왕 때 충용위산원(忠勇衛散員)에 기용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전공총랑(典工摠郎)이 되었다. 장군은 최윤덕(崔潤德)을 비롯하여 아들 넷을 두었으며 1392년(태조원년)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고, 이듬해 문하평리(門下評理) 및 양광도절제사(楊廣道節制使)가 되어 왜구를 격파했다.

 

아들 최윤덕 장군은 1419년(세종1년) 군도체찰사 장천군 이종무, 3도도통사 영의정 유정현과 참찬이었던 그는 3군도절제사로 왜구의 근거지 대마도를 정벌했다.

 

이후 1433년(세종15년) 최윤덕은 평안도 도절제사 겸 3군도통사로 황해, 평안 양도의 군병 15,000명을 편성해 여진족을 섬멸하고 여연·자성·무창·우예에 4군을 설치하면서 우의정에 오르고 세종은 그에게 세자의 술잔을 앉아서 받도록 하는 등 전적인 신뢰를 보였다.

 

최운해의 3남인 최윤온은 창원 사로곡에서 출생했다. 조선초의 명학자였던 외종조 권근에게 학문을 사사하였고, 조선 태종대에 약관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1419년(세종 1년)에 친구 김종서 등과 행대감찰이 되었고, 문종 조에 판전농시사에 재임 중 단종이 즉위하고 수양대군이 권력을 장악하는 계유정난으로 친구인 김종서 부자 등 다수가 죽임을 당하자 문경을 거쳐 이곳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 낙남했다.

 

호남에 성리학을 처음 전했다고 하며 단종애사 후에도 출사하지않고 후학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세조의 등극과정에서 통천 최씨 가문 전체가 멸문에 가까운 화를 입었으나 다행히 세조대에 공신으로 책록되고, 영의정에까지 오른 처남 박원형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최운해의 증손인 옥포(玉圃) 최산정[崔山靜 1535~1593]은 조선 선조 때 무신으로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된 인물이다. 이곳 대산리에서 출생했으며 기골이 웅건하고 장력과 재주가 비범하며 효성이 특별했다.

 

1570년(선조 3년)에 무과에 급제 후 임진왜란 전 궁궐의 수문장을 지내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때 이어 왕자와 왕비가 길이 막히자 강원도 이천에 출전해 단기필마로 적을 베고 병기와 군량 등을 탈취하여 의주의 행재소에 헌납하는 공을 세운다.

 

이에 선조가 기뻐하며 군자감주부에 제수하고 총애를 받은 그는 어가를 수행한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왼쪽 옆구리에 총상을 입어 치료를 받던 중 선조의 어가가 한양으로 환도하는 때에 이르렀을 때, 해남의 노모의 생사를 걱정하여 선조에게 주청하여 귀향한다.

 

그러나 해남으로 귀향하던 중 이천전투에서 입은 총상의 탄독이 재발해 전북 금강에서 사망하는데 죽음을 예감하고 그는 충성해야하는 나라와 효도해야하는 부모를 생각하면서 그 유명한 운명시를 남겼다.

 


 

 

대산사에는 최운해를 비롯 아들 최윤덕 장군 등 4위가 배향돼 있다.

 


 

 

落日金溝路 西風拂袖寒
해 떨어진 금구에는, 찬바람만 몹시 분다.

煙光生遠樹 雁影起淸灘
연기는 멀리서 아롱거리고, 기러기는 맑은 개울에서 노닌다.

憂國恩猶重 思親夢不安
나라를 근심하니 은혜가 무겁고, 어버이를 생각하니 잠을 못 이룬다.

携笻招悵立 月滿菊空欄
지팡이 짚고 슬피 바라보니, 달빛만 난간에 가득하네.

 


 

 

대산사 내삼문인 충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