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향교, 김문재 유도회장의 '방춘서원' 강연

김문재 해남향교 유도회장의 강연
해남향교(전교 임형기) 김문재 유도회장은 25일 해남향교 6월 망분향례를 마치고 가진 해남유림 대상 특강에서 수양대군의 단종유사 주인공 김종서 장군이 배향된 ‘방춘서원’(=방춘정)에 대한 역사와 인물을 소개했다.
전남 해남군 계곡면 방춘리에 위치한 방춘정은 조선 숙종 24년(1698) 김종서(金宗瑞)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순천김씨(順天金氏) 가묘(家廟)에 봉안(奉安)해 오다가 정조 8년(1784)에 지역 유림의 발의로 창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 해년 양경공 월담 김승주, 문충공 북저 김류 두 상공을 합향해 순조 8년(1808)에 이르러 삼상사(三相祠)라는 이름으로 사우(祠宇)를 건립했다.
이후 1868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됐다가 광무 5년(1901)에 설단하고, 광무7년(1903) 계묘에 향도유의 건의로 남은공 김효우 선생을 추배, 민국 1년(1919) 기미에 구지에 사우를 부원하여 방춘서원이라 칭하고 월담 선생을 주벽으로, 절재, 북저 삼광 선생을 봉안 향사 하다가 근래에 남은공 김효우 선생과 망미당공 김효손 선생을 추배해 현재는 오현을 봉안 향사 중이다.
방춘서원은 현재는 전라남도지정 문화재 자료 제209호(1999년 11월20일 지정)로 지정돼 도비 지원으로 향사를 봉행한다.
그러나 방춘서원은 6.25전쟁에 전래 문헌이 전소했는데 1951년 당시 해남향교 전교 등 유림이 나서 유가의 가장비서를 발굴 수집하고, 구전구문을 채록, 상호대조 참고하여 1950년 이전의 기록을 정리했으나 “다 수록하지 못함이 한재이로다”라고 해남향교 원임 박호배 전교는 글로 남겼다.
김문재 유도회장은 방춘서원에 배향된 인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양경공 김승주 선생 행적은 순천인으로 1398년 국경을 침략하는 육청방지개의 왜구를 토벌하여 평정시키는 등 혁혁한 공로로 증숭정대부 삼사, 좌사 지의정부사를 지냈으며 1424년 2월 8일 78세로 서거했다.
이에 임금이 그의 죽음을 놀라고 슬퍼하며 3일 동안 조회를 금하고 모든 상례절차를 예관을 파견해 정해진 절차에 의하라 명하고, 부조묘를 명했다.
▲절재 충익공 김종서 선생 행적은 1390년 출생, 태종 5년 을유(1405)년 문과에 급제, 계유(1453)년 12세의 단종이 즉위하자, 왕위를 노린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두 아들과 함께 격살되어 대역모반죄로 효수되므로 계유정난의 첫 희생자가 됐다.
그의 유명한 시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속에 찬데, 만리변 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가 있다.
▲남은 김효우 선생 행적은 세종12 기유(1429)년에 출생. 문종 경오(1450)년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 감찰, 단종조에 담양부사에 출재하여 치적이 빛났고, 효성이 지극함계유정난에 종숙 절재 상공께서 두아들과 함께 순절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저 서산에 푸른 고사리를 캐서 먹고, 저 동해바다 밝은 달을 밟으면서 건너 가련다!”하며 노래부르니 노래곡조가 슬프고 애절했다.
그날 바로 아우 성균관 진사 효손과 함께 해남으로 내려와 북쪽 흑석산 아래 수간의 초당을 짓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손수 심어 정절의 뜻을 달래며 “아! 슬프도다 산림 속에 자취를 감춘 것은 나의 본 뜻이 아니건만, 이 시운이 내 마음과 같이 따르지 아니하니 나의 세상 일로부터 끝이로다. 삼배 옷 입고 잡곡밥 먹으며 남은 여생을 마치면서 구천에 계신 임금님에게 충성이나 바칠라네” 했다.
▲김효손 망미당공의 행적은 양경공 월담 승주의 현손으로 문종조에 성균관 진사로 그 형 남은공과 함께 한 집에서 기거하며 우애가 독실한 것으로 전해진다.
단종 계유정난에 종숙 절재상공 삼부자께서 동일동시에 함께 순절했다는 비보를 듣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임금님께 사배 후 남은공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서 해남 청계면 방춘동에 잠적하다가 산이면 망미산 아래 정사를 짓고 은거하며 날마다 영월 쪽을 향해 소리없이 울면서 눈물로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김류 북저 선생의 행적은 양경공의 칠세손이며 참봉이 됐다가 선조 때인 1596년 문과 이인에 급제했으나 간신배들의 미움을 받아 랑료에 침체돼 있었다.
광해군(1612) 때 교리로서 강계부사를 거쳐 내직으로 가 “세록의 신으 로서 멸족의 형이 두려워 앉아서 위망을 볼 수 있으랴” 하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해 이른바 인조를 추대한 인조반정을 이룩했다.
이에 인조는 그에게 병조참판을 거쳐 판서로 대제학을 겸하게 하고 분충찬모립기명륜정사공신의 칭호와 더불어 승평부원군에 봉했다.
그의 저서로는 시, 문이 많았으나 난중 산고돼 불과 5~6편만 남아있는 데 이것을 우리가 아는 “북저집”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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