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책 표지에 새겨진 ‘卍’…조선 책문화가 품은 '길상과 장엄'

김정기 기자
2026.05.19·5분 읽기·조회 128

 

한국국학진흥원이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조선시대 옛 책 표지에 새겨진 ‘卍(만)’ 문양의 의미를 조명했다.

 

책 표지에 남은 무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책을 귀하게 여기던 마음, 오래 보존하려는 지혜, 시대의 미감이 함께 담긴 기록문화의 흔적이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옛 전적 표지를 장식하던 능화판 가운데 卍자문이 지닌 상징성을 소개하고, 조선시대 책문화 속에 남아 있는 불교적 문양과 전통 장정 문화를 살폈다.

 

능화판은 책 표지에 문양을 찍어내기 위해 사용한 목판이다. 각종 무늬가 새겨진 판목으로 표지를 눌러 문양을 드러냈다. 이렇게 만든 표지는 능화표지라 불렸다.

 

능화표지는 아름다움만을 위한 장식이 아니었다. 배접지를 밀착시켜 표지를 두텁게 보강하고, 문양을 통해 책의 품격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책을 꾸미는 일이 곧 책을 지키는 일이었던 셈이다.

 

제작 과정도 보존을 염두에 뒀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능화표지에는 노랗게 물들인 종이와 배접지, 교말, 밀랍 등이 사용됐다. 밀랍은 문양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광택과 방습 효과를 더했다. 염색에 쓰인 황벽과 치자는 방충·항균 성분을 지녀 책의 보존성을 높였다.

 

능화문은 기하문, 식물문, 동물문 등 종류가 다양했다. 시대와 소장자에 따라 문양이 달라 판본의 연대와 간행처, 수요처를 살피는 단서가 되기도 했다. 능화판 문양이 단순 장식을 넘어 서지학적 지표로 평가되는 이유다.

 

조선시대 장정 문화에서 가장 정성을 들인 분야는 왕실 서책이었다. 왕실의 장정 전문가인 책장(冊匠)들은 좋은 재료와 정교한 기술로 책을 꾸몄다. 능화판은 그 정교한 장정 문화가 왕실과 민간 전적, 문중 자료에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 卍자문은 조선시대 책 표지에서 널리 쓰인 대표 문양이다. 조선 초기에는 연화문, 연보상화문, 귀갑문 등이 많이 보였으나, 조선 중기 이후 卍자문 사용이 크게 늘었다. 조선 말기에는 능화표지 문양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고서 1200여 권의 능화표지를 분석한 연구에서는 卍자문이 전체 문양의 70% 이상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만자문이 불교 서적에 한정된 표지가 아니라, 조선 후기 책문화 전반에서 널리 수용된 대표 문양이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주역천견록』과 『동의보감』 표지에서도 연속 배열된 卍자문이 확인된다. 유교 경전이나 의학서, 근대 전적에까지 폭넓게 쓰였다는 점에서 이 문양은 종교적 표지를 넘어 생활문화 속 길상문으로 자리 잡았다.

 

卍자는 불교에서 상서로움과 길함을 뜻하는 상징이다. 부처가 지닌 성덕과 길상을 나타내는 표상으로 이해돼 왔다. 『화엄경』에는 여래의 가슴에 나타나는 성인의 특징으로 만자 모양이 언급된다. 이를 길상해운(吉祥海雲)이라 불렀다는 해석도 전한다.

 

중국 측천무후 때에는 卍을 ‘만(萬)’으로 읽도록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길상만덕(吉祥萬德), 곧 온갖 좋은 덕이 모인다는 뜻과 연결된다. 중국 화엄종 승려 혜원도 이를 길상과 덕이 한데 모인 상징으로 풀이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만자는 불교적 전통을 바탕으로 길상만복을 기원하는 문양으로 쓰였다. 만자를 길게 이어 반복 배열한 만자문은 책 표지뿐 아니라 생활공예 전반으로 확산됐다.

 

조선은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은 사회였다. 다만 불교적 상징은 생활문화와 공예, 장정 관행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억불의 시대에도 사람들의 손끝과 물건의 표면에는 오랜 불교 상징이 길상문으로 남았다.

 

만자문은 불교 사찰의 상징에만 머물지 않았다. 선비들의 사랑방에 놓인 서안, 경상, 책장, 고비 등에도 투각이나 음양각 방식으로 새겨졌다. 한옥 창살, 기왓장, 담장, 떡살, 직물 등 일상 곳곳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조선의 문화가 유교와 불교를 단순히 분리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는 서로 다른 전통이 겹치고 스며들었음을 보여준다. 책 표지의 작은 문양 하나에도 당대의 사상과 취향, 보존 기술, 미감이 함께 담겨 있었던 것이다.

 

한국국학진흥원 관계자는 “능화판의 문양은 책 표지를 꾸미는 장식을 넘어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과 미감, 책을 대하는 태도를 담고 있다”며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소개하는 卍자문 능화판은 우리 전통문화에 남아 있는 불교적 상징의 한 사례이자 조선시대 책문화의 깊이와 품격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밝혔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앞으로도 고전적과 책 장정 문화, 기록유산에 담긴 상징체계를 발굴해 우리 전통문화의 세밀한 아름다움과 인문적 의미를 소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