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광복(光復) 80주년에 생각하는 유림(儒林)의 자세

최영갑 현대유학연구소장, 제25대 성균관유도회총본부 회장, 한국종교인연대 공동대표
우리 민족이 일제의 강점(强占)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은 지 80년의 시간이 흘렀다.
사람의 인생도 이 정도의 세월이면 온갖 일을 겪기 마련인 것처럼 대한민국도 지금의 위치에 오기까지 너무도 많은 고난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들이 우리를 주요 파트너로 여기고, 세계인이 한류(韓流, 우리나라의 대중문화 요소가 외국에서 유행하는 현상)와 K-POP에 열광하고 있으니 모든 것이 부족하고 아쉬웠던 지난날과 비교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 오래지 않은 동안에 몰라보게 변하여 아주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불과 150여 년 전, 정확하게는 1876년(조선 고종 13) 2월27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Japan-Korea Treaty of 1876, 속칭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의 결과로 대외 문호가 개방되며 외세가 본격적으로 밀려오기 시작할 때 우리 민족은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반면에 가장 철저하고, 준비된 자세로 접근해왔던 일본은 한·일합방을 이루기 전인 1900년대 초반부터 이미 역사 연구를 통해 침략을 합리화하는 식민지 지배 논리를 세우고, 각종 정책과 조약 등을 통해 이를 현실화해 나갔으며, 지금 봐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우리의 모든 것을 조사하고, 기록하고, 자료화했다. 근대화 시기에 우리보다 먼저 우리의 특성을 파악하고, 자신들의 식민 통치에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총독부의 내무과 초대 학무과장을 지냈던 구마모토 시게기찌(隈本繁吉)는 한·일합방 직전인 1910년 9월8일에 제출한 「교화의견서(敎化意見書)」에서 ‘조선인이 민족적 자각심을 일깨우지 못하도록 노력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설명하며 ‘초등교육과 실업교육을 우선하여 장려하되 일본어 교육과 직업교육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일제가 내세웠던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다’라는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조선 민족을 영원히 이류(二流)로 취급하겠다’는 그들의 속내를 표현한 것이었다.
비록 나라를 빼앗고, 강제적인 힘으로 통치할 수 있는 준비는 대부분 마쳤다고 하더라도 당시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지배력과 경제력을 가진 집단은 유교인(儒敎人), 즉 유림(儒林) 세력이었다.
왕족과 귀족들은 각종 작위와 은사금(恩賜金) 등으로 구슬려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 수 있었고, 일반인들은 군대와 경찰의 위력으로 억누를 수 있었으나 수천 년 이상의 기간 동안 공부자(孔夫子), 맹자(孟子)를 비롯한 성현과 선현들의 올바른 가르침을 뼛속 깊이 새기며 살아온 유림들이 경성(京城, 지금의 서울특별시) 등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여전히 맹주(盟主)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강제 합병 직후에는 유림들을 포섭하고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항일 의식이 강했던 유림들은 일제의 회유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일제는 부패한 유림들을 끌어 모아 그들을 중심으로 유교계를 다시 조직해 나갔다.”(『이야기 한국역사』, 풀빛)
여전히 막강한 유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일제는 조선의 유림을 우대하는 척하면서 전통 유교를 비판했고, 유교를 개혁해야 한다고 떠들면서도 그 촛점을 유교와 유림의 친일화(親日化)에 두었다.
한·일 합방 다음 해인 1911년 6월15일에는 「경학원규정」을 공표해 조선 유림의 총본산인 성균관(成均館)을 경학원(經學院)으로 격하시키고, 전국 향교를 경학원 밑에 두었으며, 일제에 저항하는 유림들은 평생을 출입했던 곳으로부터 내쫓는 한편 부패하고 친일 성향이 강한 인사들로 경학원과 전국 향교, 각종 유림단체를 채웠다.
그러나 올바른 뜻을 가진 많은 유림들은 3·1 만세운동의 전국 확산을 주도하거나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1847-1916),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선생처럼 해외로 나가거나 혹은 국내에 머물며 파리장서(巴里長書)운동에 참여하는 등 국권 회복과 민족 자주성 수호를 위해 자신은 물론 가족과 재산까지 헌신적으로 희생한 이들이 다수였다.
일제가 남긴 재판 및 수감 기록의 직업 항목에 수많은 유림이 ‘유교인’이나 ‘유림’이라는 표현 대신 ‘농업인(農業人)’이라고 진술한 사실은 독립운동 과정을 연구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상식으로 통하는 바인데 그만큼 유교는 당시 대부분의 사회지도층에게 학문으로서뿐만 아니라 생활과 정신 영역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상이었다.
그러나 이런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부의 인사들이 “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 유교이고, 유교인들은 아무런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서 일제강점기에 호의호식(好衣好食)을 했다”는 매우 잘못된 주장을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
물론 공교롭게도 일제강점기 전까지 한반도를 통치했던 조선(朝鮮)왕조는 1392년 건국 당시부터 유교를 국가운영 및 사회통치의 기본 원리로 삼았고, 중국 등 다른 유교권 나라들처럼 개화 및 근대화의 시기가 늦어 상당한 혼란과 심지어 식민 지배의 경험까지 이어졌으나 결과적으로 지금 세계인들이 크게 놀라는 한국인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의 상당 부분이 유교의 영향력이 작용한 결과라는 점에서 우리 스스로가 일제에 의해 세뇌된 부분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측면이 크다.
까페나 거리에 여러 시간 동안 가방이나 휴대폰 등을 두더라도 아무도 손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모습, 전날 밤이나 새벽 일찍 문 앞에 배송된 물건들이 대부분 그대로 보존되는 장면, 질서 있게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줄을 서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광경 등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세계인의 감탄과 놀라움을 불러 일으키는데 어려서부터 배우고 익힌 이런 것들은 유교를 통하지 않고는 도저히 설명하지 못한다.
또 하나, 일제의 한·일 합방 직전인 1910년 4월23일에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가 학부령(學部令) 제2호로 발표한 「향교재산관리규정(鄕校財産管理規程, 전문 8조와 부칙으로 구성)」을 통해 이전까지 유림들이 자율적으로 관리하던 향교 재산을 마치 국가의 재산인 것처럼 취급하기 시작한 이래 1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향교재산법」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부분은 ‘가장 강력한 반대세력이었던 유교 세력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향교의 재산을 몰수하고, 친일분자에게 향교의 운영을 맡겼던 일제의 정책이 성공했던 지난 시기의 아픈 역사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선배 유림들의 피와 땀, 헌신이 녹아있는 소중한 향교 재산을 유림 스스로의 논의나 결정을 통해 활용하지 못하고 일일이 각 광역시·도 단체장의 승인을 받게 되어 있는 현행 방식은 어떠한 이웃 종교에서도 볼 수 없는 해괴망측(駭怪罔測)한 모습이고, 유교 중흥 및 유림 발전을 현저하게 방해하는 제도이다.
‘빼앗긴 주권(主權)을 도로 찾았다’는 뜻의 광복(光復) 80주년을 맞이해 정부와 사회단체, 광역자치단체, 지자체 등마다 경축하는 한편으로 의미를 되새기는 각종 행사들이 펼쳐진다고 한다.
유교 종단 차원이나 성균관이 중심이 된 행사가 없다는 점은 아쉬우나 ‘창간 56주년의 역사를 가진, 유교권 유일의 전국신문’인 유교신문의 문제 제기로 ‘한국독립운동과 유교’ 특별전시가 개최된다는 소식은 반갑기 그지 없다. 그리고 몇몇 향교와 유림단체에서 작게나마 광복의 뜻을 기리는 행동이나 모임들이 이뤄진다고 한다.
너무 들뜨는 것도 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이 겸양(謙讓)의 미덕은 아니다.
과거의 우리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고, 그 속에서 현재의 우리가 나아갈 바를 제대로 계획해보는 것이 지금의 우리 유림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이다.
뒤떨어진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청산하고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한다.
선배 유림의 뜻을 잊지 말고, 선비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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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에 있는 '심산 김창숙 선생' 동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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