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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시론

<특별기고> 해촌서원과 해남 정씨

손은수 기자
2025.09.04·5분 읽기·조회 77

 

 

김문재 성균관유도회 해남군지부 회장

 


 

 

해남의 대표 서원으로 해촌서원을 꼽는데는 그 배향 인물의 당시 사회적 위상과 혈연관계에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해촌서원에 배향된 인물들은 모두가 해남 정씨(초계 정씨) 집안과 혼인하여 처가가 있는 해남으로 옮겨 살면서 성장한다. 

 

정씨가 해남에 이입(移入)하게 된 동기는 고려가 망하고 고려 조정의 원로 정원기(鄭元基)라는 분이 화를 피하기 위하여 해남에 정착하게 되었고, 당시 왜구의 극 심한 침탈로 혼란을 겪고 있던 남부 해안을 수습하는데 적극 앞장서 해남의 토착세력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초계 정씨 호남대동보에도 “애초에 정원기(鄭元基)는 고려조의 원로였는데, 조선 용흥지초(朝鮮 龍興之初)에 남쪽으로 피신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음으로써 그 죄를 면하고자 해남의 호장(戶長)이 되었다”라는 기록을 보아서 해남 현의 행정을 담당하였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보략에 의하면 해남 정씨 가는 “정원기(鄭元基), 정용(鄭龍), 정재전(鄭在田)의 3대를 거치면서 위상이 점차 커졌음을 알 수 있다. 정원기는 인민이 무통하기에 풍속을 바로잡고 스스로 읍리(邑吏)가 되기를 원했다”라고 기록 하고 있다.

 

당시 해남을 비롯한 남해안 일대는 잦은 왜구의 침탈로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해남의 읍리(邑吏)였던 정원기는 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 지역민의 결의와 단합을 끌어내는 데 탁월한 수완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정원기의 사회적 지위가 더욱 높아지면서 해남 정씨도 해남의 제1 토성으로서 성장하게 되었다.

 

정원기의 아들 정용(鄭龍)에 이어 손자 정재전(鄭在田)에 이르러 인근의 재지사족(在地士族)들과 혼인 관계를 맺을 정도로 사회적 지위가 격상되었다고 하지만, 사족으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 조건일 뿐 사족의 지위를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재전은 상당히 탁월한 행정력을 갖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재전의 행적은 해남과 진도의 통폐합 과정에서 깊숙이 개입하여, 할아버지 정원기 대에 확보한 막대한 재력과 사회적 위상을 바탕으로 해남과 진도의 합군을 적극 주도하였으며 해남군의 치소를 옮길 때 소요되는 재원을 부담한 점이나, 합군 이후 계속해서 호장의 지위를 확보한 점이 이를 말해 준다.

 

해남 정씨가 온전한 사족(士族)으로서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지위가 높은 사족들과 통혼을 하든지, 아니면 후손 중에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 관직에 진출해야만이 온전한 사족으로 인정받게 된다. 해남 정씨는 정재전의 자식대에 이르러 통혼과 관직 진출을 통해 재지사족이 되었다.

 

정재전의 아들인 정문명(鄭文命)이 소과(小科)에 합격해 생원의 지위에 올랐는데, 향역에서 막 벗어난 향리 가문에서 소과에 합격을 배출하였다는 것은 재지사족에 오를 수 있는 기본조건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해남 정씨의 관직 진출은 정문명의 아들 대에 이르러, 2남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장귀감(鄭貴瑊)은 1460(세조6)년 무과급제, 훈련원 참군을 지냈으며, 사위 임수(林秀)와 이유(李裕)도 현감과 진사가 되었다.

 

해남 정씨의 중앙 관계 진출은 정귀감 때에 이르러 사위인 최부(崔溥)가 문과에 등재 후 부응교까지 역임하였다.

 

정문명의 둘째 아들 정귀영(鄭貴瑛)은 아들과 딸을 두었는데, 손자인 정공유(鄭公裕)가 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이어서 정공유의 아들인 정언홍(鄭彦洪)과 정언식(鄭彦湜)이 나란히 문과에 등과함으로써 중앙 관로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정언홍은 정랑에, 정언식은 부사에, 정언순은 봉사에 오를 수 있었다. 

 

이로서 해남 정씨는 정재전이 호장의 지위에 오른지 5대 째 만에 중앙의 문반직에 오르게 되었고, 정귀영의 사위 윤효정(尹孝亭)은 최부의 문인으로 1501년(연산군 7) 생원시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자제 교육에 힘쓴다. 

 

윤효정을 삼개옥문(三開獄門)하였다고 칭송하였는데 이는 당시 흉년으로 조세를 납부하지 못하여 옥에 갇힌 주민을 세 번이나 사면시켜 주었기 때문에 붙여진 호칭이다. 

 

이는 처가인 해남 정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의 소유 덕분이라 생각된다. 이처럼 해남 정씨의 사위들은 혼인 후에 해남으로 거주지를 옮겨 막강한 처가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관계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서로 통혼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만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해남 정씨 가의 또 다른 한 축은 여흥 민씨와의 관계이다.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으로 충정공 민신(閔伸)의 5부자(甫昌, 甫諧, 甫釋, 甫興, 石伊)가 피살되었는데 보창(甫昌)의 자 중건(仲騫)이 외숙 진도군수 김종(金淙)의 임소에 따라가 화를 면하고, 그 후 김종이 임소를 떠날 때 해남정씨 가 정문필(鄭文必)에게 의탁하여 그 사위가 됨으로써 민중건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더 이상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2남 1녀를 두었는데 민오(閔鰲)와 민구(閔龜), 열녀 민씨(烈女 閔氏)가 그들이다. 

 

이후 이 지역에 그 후손이 향촌 사회에서 위상을 마련한 것으로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