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삼척향교 성지탐방 기행문
최기석 / 삼척향교 85회 장의
삼척향교 장의들은 동해·삼척·태백 지역에 생활기반을 두고 있으면서 평소 모성지심(慕聖之心)으로 향교에 입문하여 공기(孔紀) 2568(2017)년 4월1일 김영근 성균관장으로부터 삼척향교 장의(掌議)로 임명되었다.
열과 성의를 다해 삭·망일(朔·望日) 분향, 춘·추기석전대제(春·秋期釋奠大祭) 봉향 및 향교의 제반행사에 솔선수범(率先垂範)으로 참여하여 유교선양(儒敎宣揚)과 교궁수호(校宮守護), 사문진작(斯文振作)을 위해 헌신하고 노력하고 있음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우리들은 지난 1년의 기간 동안 흐트러짐 없이 향교의 기능에 따른 향사(享祀: 釋奠祭, 朔·望日 焚香禮, 告由禮, 奉審禮, 地方文化財 祭禮 등) 봉행과 참여를 통하여 습례(習禮)하고, 교화(敎化: 人性敎育, 禮節敎育, 儒學, 儀禮 등)를 통한 선지식(先知識)의 알음알이로 인간의 도덕성 회복과 사라져가는 지방의 미풍양속(美風良俗) 계도(啓導)에도 앞장서면서 무너진 작금(昨今)의 윤리도덕관도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차제(此際)에 우리 삼척향교 85회 장의(掌議)들은 평소 마음속에서 기리던 공부자(孔夫子) 고향인 중국 곡부(曲阜)와 맹자(孟子) 고향인 추성(鄒城)으로 성지탐방(聖地探訪)을 주요업무활동 추진계획에 포함하여 착실하게 준비한 결과 지난 4월12일부터 4월15일까지(3박4일간) 장의 36명이 정수철 전교와 최승교 원임 전교와 함께 성지탐방(聖地探訪)을 하였다. 우리 85회 장의들은 쉽게 접할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을 탐방하고 견학하였다는 자부심과 함께 더욱 사문진작(斯文振作)에 정진하고 장의 간에 우정도 돈독히 다져나갈 것을 마음속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성지탐방(聖地探訪)을 떠나요!
드디어 4월12일 새벽 5시 삼척향교에서 출발한 버스는 동해시 효가사거리에서 동해·하장 지역 장의 10명이 합류함으로써 여행사 인솔자를 포함한 39명이 고속도로 동해 I·C로 진입하여 인천공항으로 향하였다. 성지탐방을 떠나는 들뜬 마음에 잠을 설치기도 하고, 아침 일찍 버스 탑승시간을 맞추기 위해 전날 저녁에 동해로 내려와 여행외박을 즐긴 하장 지역 장의 등 모두가 피곤도 하련만 그저 반가운 미소가 차내에 가득하였다.
동해바다 수평선 위로 여명(黎明)의 시간! 삼척향교 85회 장의 정연만 회장은 “버스출발시간을 맞추느라 장의들 고생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즐거운 성지탐방이 되기를 희망합니다”라고 간단하게 인사를 하였다. 이어서 최승교 전교는 인사말을 통해 장의들의 성지탐방에 대한 중요성과 가치에 대한 강론(講論)으로 그 동안 삭·망분향(朔望焚香)과 그믐 입제일 교육에서 강조했던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하여 입문초기에 인성교육을 받던 기억이 새로워졌다.
최승교 전교의 강론이 끝날 무렵 어느덧 붉은 아침햇살은 만개하는 봄꽃에 가득히 펼쳐지고 버스는 강릉 대관령(大關嶺) 고갯길에 들어섰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이 늙으신 친정어머니를 오죽헌(烏竹軒)에 홀로 두고 대관령 고갯길을 넘을 때 친정 쪽을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아흔아홉 구비의 고갯길! 저 멀리 바라보이는 검은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오죽헌! 그곳은 신사임당이 대현(大賢) 문성공(文成公)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을 낳은 장소이며, 선생의 얼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다.
삼척향교 85회 장의들은 유생(儒生)의 후예로서 2017년 10월 26일 선생의 유덕을 추앙하고 내일의 지표로 삼고자 봉행하는 제56회 대현율곡이선생제(大賢栗谷李先生祭)에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의전(儀典)에 참석하여 제례의식(祭禮儀式)을 참관하였던 감회가 남달리 새롭기만 하다.
버스가 대관령을 넘어 동계올림픽이 개최된 평창을 지나가고 있을 때 삼척향교 정수철 신임 전교는 인사말을 통해 “우리들 모두가 해외에서 생활하는 기간 동안 성지탐방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자기가 스스로 안전에 각별하게 유념해서 돌아오는 시간까지 사고 없이 즐겁고 보람된 여행이 됩시다”라고 안전에 대한 주의를 강조하였다.
우리들이 아침 일찍 출발해서인가? 아니면 공항으로 오는 길에 정체가 없어서인가? 도착예정 시간보다 1시간 일찍 도착해서 그만큼의 여유시간이 생겼다. 올해 연초에 개장하였다는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8번 출입구에 버스가 도착했다. 가방정리를 모두 끝내고 우리들은 긴급회의를 개최하였다. 의제는 처음부터 불참의사를 표시한 장의와 여행사 계약에 따른 여행경비 완납 이후 불참을 통보한 장의에 대한 환불예우 등을 토의했다. 종합적인 의견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심정으로 통상의 관례에 준하는 것으로 의결하였다.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우리 일행이 출국수속 절차를 마치고 3층에 있는 탑승장으로 향하였다. 대한항공 KE 847편 12시 50분에 탑승이 시작되었다. 나는 47A로 창문 쪽이고 이경재 장의는 통로 쪽 c, 김보명 장의는 B로 중앙인데 창문 쪽으로 권유하여 좌석을 조정하였다. 드디어 13시 40분에 인천공항을 이륙하였다. 인천공항을 이륙한 대한항공은 1시간 55분간 비행하여 중국 JINAN(濟南) 공항에 도착하였다. 여객터미널에는 붉은 글씨로 제남(濟南)이라는 전광간판이 보이고, 공항의 면적이 커서인지 한산한 느낌이다. 비행기의 이착륙이 많지 않은가 보다. 공항 입국장의 규모도 크지 않아 심사를 거치는데 시간이 다소 소요되었다.
시진핑이 사랑하는 부인을 위한 국제금융경제도시로 변모하는 제남(濟南)!
3박4일간 성지탐방을 안내하고 인솔할 현지 이영재 가이드는 인사와 함께 제남시를 설명했다. 제남은 산동성(인구 1억)의 중심도시로 인구 1,200만여 명으로 농업생산물은 파, 마늘, 생강, 고추, 땅콩 등이 주산물이었다. 지금은 경제특구로 지정되어 고층아파트와 오피스텔이 우뚝우뚝 마천루를 이루듯 즐비하게 공사가 한창이다. 제남을 국제 금융경제도시로 야심차게 추진하는 이면에는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의 부인 평리위안의 고향이 산동성이라 이곳을 중점 육성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곳 제남은 황하강에 둘러싸여 샘과 강이 풍부하고 풍광이 아름다워 물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태산(泰山)과 거리가 청도(靑島)보다 훨씬 가까워 최근에는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이곳의 지형은 분지형태로 되어 있어 여름에는 습도가 많아 덥고 겨울에는 추운 곳이라고 한다.
우리가 공항에서 제남으로 이동하는 동안 들판에는 많이 자란 마늘과 푸른 밀밭이 길게 이어져 영농의 규모를 짐작케 하고 가로수는 물론 심어져 있는 나무가 모두 미루나무이다.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가로수가 미루나무로 심어져 있었고 식목일에는 미루나무를 심었던 기억이 난다. 여기에서는 주요 소득원이 미루나무라고 한다. 물의 도시답게 수분이 많은 곳에서 자라는 수종(樹種)이 미루나무이기 때문이다. 이곳의 절기(節氣)는 동해·삼척보다 빠르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아카시아 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동해·삼척에서는 5월초가 되어야 꽃망울이 터진다.
천하제일의 샘(天下第一泉) 대명호수(大明湖水)
대명호수(大明湖)는 산동성 최대의 호수공원으로서 수심은 2~6m이고 제남시의 많은 샘물들이 흘러들어와 형성되었다. 지금도 호수 안에는 샘물이 솟아나고 있으나 빠져나가는 물도 없는데 넘치지 않는 것이 신비하다는 것이다. 대명사 화상이 여인을 욕보이자 천지가 진동하고 갈라진 땅으로 대명사가 가라앉고 그 절터에 물이 채워져 호수가 되었다는 전설을 들으면서 우리는 유람선 2척에 나누어 타고 호수를 둘러보았다.
대명호수 유람선 관광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마친 장의들은 서둘러 버스에 승차하였다. 숙소가 있는 연주(兗州 산동성 서남부에 위치)를 향하여 1시간 가량 달려 산동고속 태안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이동 간에 빗방울이 떨어져 내일의 성지탐방에 지장이 초래될까 염려가 되었다. 빗방울은 점점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태안(泰安)휴게소에서 1시간 30분을 더 이동하여 숙소인 성덕국제호텔에 도착하였다.
성지탐방 첫날 호텔숙소는 10층 16개실과 12층 3개실을 배정받았다. 그리고 1006호실에 본부석을 설치하고 여행의 첫 회동의 시간을 마련하였다. 최승교 전교와 정수철 신임 전교를 모시고 덕담도 듣고 우리들은 오늘하루 여행의 소감도 발표하였다, 내일의 일정에 대한 최승교 전교의 지침과 우리들의 마음가짐을 논의하는 소통의 자리에 뜻있는 장의들은 모두 모였다. 우리들은 2인 1조로 숙소안내(Room List)에 따라 오늘의 고단함을 달래고 내일의 희망을 꿈꾸며 하루를 마무리 했다.
대명호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
둘째 날, 4월13일 중국에서 첫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이했다. 오늘은 탐방 목적을 위해 성지를 찾는 날이기에 날씨가 주요 관건인데 지난밤부터 오락가락 내리던 비가 오전까지 이어진다고 하여 걱정이 앞섰다. 우리들은 유복을 지참하고 우비도 챙겨 호텔을 나섰다. 날씨로 인해 오전에 맹자의 추성(鄒城)을 탐방하고 오후에 공부자의 곡부를 순례(巡禮하기로 일정을 수정하였다. 성지탐방에는 현지인 가이드가 안내해야 하는 규정에 따라 추씨성(鄒氏姓)인 가이드가 동승했다. 현재 대학생으로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으며 가이드 경력을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추성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맹자에 대한 해설을 하는데 교과서를 읽어주는 형식이라 우리들 머릿속에 기억되지 않았다. 현장에 가서 설명하는 것으로 동의하고 1시간30분을 이동했다.
드디어 맹묘(孟廟)에 도착하였다. 맹묘는 맹자(孟子)와 맹모(孟母 맹자 어머니)의 사당이다. 맹묘(孟廟)의 출입구는 맹자직계자손만 통과하는 통로와 당 간부와 선생과 학생들의 통로 그리고 우리와 같은 관광객과 중국 일반인들이 입장하는 통로로 구분되어 있었다. 1988년 1월13일 산동성 인민정부에서 세운 맹묘(孟廟) 맹부(孟府)의 오석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라고 새겨져 있다. 뒤에 커다란 영성문(櫺星門)이 나타난다. 이문은 격자창(欞)으로 되어 있다.
아성전(亞聖殿)으로 향하였다. 붉은 담장 주위엔 측백나무 고목 300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고대(古代)를 증명하고, 횡으로 늘어선 비석들은 280여 개가 아성공 맹자를 기리는 업적과 중·개보수의 이력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아성전에는 ‘아성맹자위(亞聖孟子位)’라는 글씨와 함께 맹자의 입상이 있다. 옆에는 황금보자기로 맹자인장(孟子印章)이 봉해져 있고, 분향소는 밖에 설치되어 있다. ‘아성’이란 공자에 버금가는 성현이라는 뜻이며 공부자는 대성지성(大成至聖)이시다. 맹자는 공자가 사망하고 100여 년 후에 탄생한 전국시대의 유학자로서 공자의 인의예지 사상을 계승하여 도의적 정치, 즉 왕도(王道)를 행할 것을 주장하고 사람의 성품이 본래 선함을 믿어 수양을 중시하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상이 전국시대 제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묻혀 있었으나 유가(儒家)의 인본사상을 북송시대 신유학자들의 발의로 원(元)나라 문종은 맹자에게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이란 칭호를 내려 불멸의 성현으로 추앙(推仰)하고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현의 뒤에는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받침이 있었다. 맹자의 어머니는 장씨로서 일찍 남편을 사별하고 홀로 맹자를 키우면서 묘지(墓地) 부근, 저작(市場) 부근, 서당(學校) 부근으로 3번이나 면학분위기를 위해 이사를 하였다. 이것을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 말한다. 어머니가 깨우침의 정도를 물으니 맹자가 “웬만합니다”라 답하여 맹자의 어머니는 베틀에서 짜고 있던 베를 잘라버리면서 “공부를 그만두는 것은 내가 이 베 짜던 것을 잘라버리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여 맹자는 아침저녁으로 쉬지 않고 열심히 배우고 습득하여 유명한 유학자가 되었음을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라 한다. 현지에 ‘孟母三遷祠’와 ‘孟母斷機處’ 그리고 ‘子思子作中庸處’라 기록된 비석이 서있다. 이것은 맹자의 스승인 자사(孔子의 孫子)가 이곳에서 사서(四書)의 하나인 중용(中庸)을 저술하였다는 곳이다.
맹모의 사당인 맹모전은 아성전 뒤편에 계성침전(啓聖寢殿)의 건물 내에 황금색으로 형체를 알 수 없는 문양으로 조각되어 있는 ‘000000天人之像’이 봉안되어 있다. 맹부(孟府)는 맹자의 직계자손이 거주하는 곳으로 맹묘와 거리 하나 사이에 위치해 있다. 대문을 거쳐 ‘예문의로(禮門義路)’에 들어서면 예문과 의문을 통과(일반인은 통과할 수 없고 황제나 특별한 맹손씨만 통과)하게 된다. 대당(大堂)과 세은당(世恩堂) 등 각기 임무가 다른 격실과 누각, 공부하는 학교, 2층 누각의 어린이 돌봄 센터도 있고 정원인 추화원에는 모란이 꽃을 피우고 있다. 이와 같이 청(廳), 당(堂), 누(樓), 실(室) 등 200여 칸으로 배치되어 있다. 맹자의 학문을 집대성하여 후대에 “맹자”라는 불후의 저서가 만들어졌다는 “칠편이구(七篇已矩)”의 액판(額瓣=편액=현판)이 걸려 있다. 칠편이구는 청나라 옹정황제가 노나라에 돌아와 맹자의 제자인 공손축(孔孫丑), 만장(萬章) 등과 함께 학문을 이야기한 것을 묶어 7편(篇)으로 편집하였다는 뜻이다.
맹묘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삼공(三孔: 孔廟, 孔府, 孔林)을 탐(探)하다!
추성에서 공자의 고향인 곡부시로 이동하여 공묘에 도착했다. 공묘(孔廟)는 공자가문의 저택 공부(孔府)와 공자가문의 묘지인 공림(孔林)과 함께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공묘와 공부로 들어가려면 궐리(闕里, 공자가 살던 마을이 궁궐마을이라는 뜻)를 통과해야 하는데 맹묘의 입장과는 확연히 구별되었다.
첫 번째로 맞이하는 입구 석방(石坊)은 돌문에 ‘금성옥진(金聲玉振)’이란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그 뜻은 중국전통음악에서 팔음(쇠·돌·명주실·대나무·바가지·흙·가죽·나무 등의 재료로 만든 악기의 소리)을 합주할 때 먼저 편 종소리를 내고(金聲) 끝으로 편경을 울려(玉振) 마무리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지덕(智德)의 합일(合一) 즉, 조화와 융합을 이루는 공자의 사상으로서 맹자는 스승인 공자를 집대성(集大成)한 인물이라고 했다. 우리들이 대성지성문선왕이라 칭할 때 대성이 곧 집대성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공자가 있어 맹자가 있고, 맹자가 있어 공자가 있는 것이다.
금성옥진방을 통과하면 영성문(櫺星門), 태화원기방(太和元氣坊), 지성묘방(至聖廟坊), 성시문(聖時門), 벽수교, 홍도문(弘道門), 대중문(大中門), 동교문(同交門), 규문각, 13비정, 대성문(大成門), 행단(杏亶), 대성전(大成殿)까지 방(坊)과 문(門)을 거쳐야 하는데 현판은 전서와 해서체로 되어 있다. 대중문은 건륭제(乾隆帝)의 친필이고 옹정황제의 친필도 있다. 걷는 길옆으로는 천년의 세월을 버티면서 반듯하게 자란 고목도 있지만 나뭇가지가 뒤틀리고 옹이박이가 변형되어 나무의 암이라고 하는 모습의 고목도 보였다. 마치 인간사의 생활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다고 할까?
13비정은 황제들이 공묘를 방문하고 세워 놓은 웅장한 비석들로 마치 자기 치적의 우월성을 나타내고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정자를 지어놓았다. 규문각은 3층 목조건물로 중국 10대 명루 중 하나인데 단 하나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지었단다. 그리고 행단은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다, 사당 앞의 대성문은 공자를 제사지낼 때만 열고 오직 황제만이 이곳으로 통과할 수 있기 때문에 돌기둥 2개만 용이 여의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우리들은 유복으로 환복하고 의관정제(衣冠整齊)하여 대성전 앞에 서립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눈여겨보면서 열심히 사진을 찍는 이방인(異邦人)도 많았다. 최승교 전교, 정수철 신임 전교, 정연만 85장의 회장 등 3명이 대표로 향을 피우고 최기석 장의가 대축을 맡아 “大成至聖文宣王 伏以 三陟鄕校 聖地探訪 猥濫不肖 玆以告于 聖前伏夢 蔭思加護 承奉聖訓 行仁踐禮 繼往聖以 以開本學 順應天命 儒敎發展 儒生和合 以報聖恩 玆敢 虔告 謹告” 축(祝)을 고하고 모두 4배례(拜禮)의 의식을 봉행하였다.
우리들의 유생복장과 엄숙하게 진행되는 의전에 대하여 신기한 듯 놀란 듯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많았다. 함께 사진을 찍자고 요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들은 편안한 복장으로 대성전을 살펴보았다. 대성전은 노나라 애공(26대 군주)이 공자 사후 1년에 사당(祠堂)을 지은 후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재축조하였다. 청나라의 옹정제(雍正帝)가 대대적으로 중수를 하고 대성전의 현판도 친필로 하사하였다.
대성전은 중국 북경 자금성의 태화전, 태산의 대묘와 함께 3대 목조건물로서 길이 45.7m, 폭 24.9m, 높이 24.8m로 세계에서 가장 큰 사당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 대성전의 7개 돌기둥 운룡석주는 전부 용(龍)으로 새겨져 있다. 대성전 안에는 공자의 상(像)이 있고 주변으로 공자의 4대제자인 증자, 맹자, 안회, 자사의 상이 배치되어 있다.
우리들은 공묘를 탐방하고 공자의 직계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저택인 공부로 이동하였다. 정문에는 악귀를 쫓는다는 사자상이 양쪽으로 서있고 맞배지붕의 삼문으로 되어 있다. 12,470㎡의 면적에 남북 간 길이가 2㎞로 152채의 건물에 480칸의 방이 있는 공부는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공자를 받들지 않은 이가 없었기 때문에 공자의 종손에게는 제후와 동등한 지위를 주었다. 송나라 때부터는 종손에게 연성공(衍聖公)이란 작위가 주어졌다. 그래서 공자의 종손은 제사를 모시는 기능 외에도 제후로서의 기능도 담당하고 있었다.
공부는 중로(中路), 동로(東路), 서로(西路)로 나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중정(中庭)이다. 그 뒤에 ‘성인지문(聖人之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문이 있다. 이어서 있는 중광문(重光門)은 종손이 칙사를 마중하거나 의식을 행하던 곳인데 명나라 세종이 하사한 ‘은사중광(恩賜重光)’이라는 현판이 있고, 그 뒤에 있는 이당(二堂)은 연성공이 고급관리를 접견하고 지방예비 과거시험을 치르던 곳이다. 삼당(三堂)은 공시 가문 내부의 분쟁을 처리하거나 죄를 논하는 곳으로 연성공의 위엄을 표시하는 깃발 등이 있다. 그 뒤에 있는 내택문(內宅門) 안은 타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연성공의 사택이다. 동로에는 가묘(家廟)가 있고 서로는 손님을 맞이하는 곳으로 봉건제후의 생활 단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육조를 상징하듯 관청 기능의 육청과 뒤쪽의 가족들 생활공간 등 궁궐과 같은 건물배열을 보면 이곳이 황제의 궁실 다음으로 큰 규모의 저택임을 알 수 있다. 조상 한 분이 자손을 대대손손 먹여 살리는 형태이고 나아가 곡부를 먹여 살리고 산동성의 경제를 이끌고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그 이유는 중국 자체에서도 인본사상의 가치로, 문화의 가치로, 관광의 가치로 중요함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공림은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을 해야 했다. 지성림으로 표시되어 있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멎었던 비가 내리고 있어 우산을 쓰고 우의를 입고 준비를 했다. 만고장춘(萬古長春)방이 새겨진 문에 들어서서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그리고 나타난 수수교(洙水橋)방을 지나면 길옆으로 정자와 같은 건물이 여러 개 있었는데 황제들이 공림에 참배를 와서 쉬어간 곳이라 한다.
먼저 좌측에 있는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묘 즉, 공급(孔伋)묘로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묘이고, 좀 더 걸어가면 길 우측으로 사수후(泗水侯)묘로 즉 공리(孔鯉)묘로 공자의 아들 묘가 있다. 조금 뒤편으로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묘비가 있는 공부자의 묘이다. 특이한 것은 앞에서 보면 왕(王)자가 아니라 간(干)으로 되어 있는데 그 이유가 황제가 참배를 와서 내가 왕인데 왕(王)자가 보이면 의례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공자 후손의 지혜라고 해석해 봄직도 하다. 우리들은 이곳에서 국궁 궤를 하고 사배로 참배를 했다. 오늘 하루 동안 맹자와 공부자에 대한 성지탐방을 통해 각자의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덕목들이 무엇인가를 깊이 새겼을 것으로 생각한다.
저녁식사는 점심식사를 했던 동일한 식당인데 중식 때 보다 음식이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많이 걸어 에너지 소모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현지의 식사는 튀기고, 볶은 음식에 밥이 곁들어져 그런대로 입맛에 맞는다고 생각하였는데 한국의 고추장이 진가를 또 한 번 발휘하고 있다. 식탁에 서비스로 올라온 곡부의 명주라고 하는 공주(孔酒 일명 공자의 술)는 마시기에는 독한 느낌이 들었지만 취기가 오래가지 않는 특성이 있다.
숙소에 돌아와 2일차 단합의 시간을 1017호에서 마련하였다. 명희 총무와 임옥자 부회장이 전날에 남아 있던 과일과 한국에서 공수한 안주로 화합과 소통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함께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공묘 대성전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태산(泰山)의 어머니를 경배(敬拜)하다!
셋째 날(4월14일), 상쾌한 아침이다. 대묘(岱廟)로 이동하였다. 대묘는 한나라 때 처음 건축한 것으로 12황제가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태산 초입에 제단을 쌓아 만든 것으로 황제들이 하늘에 봉선의식을 거행했던 장소다. 대묘에 입장하려면 대묘 방(坊)을 통과해야 한다. 대묘 방은 1672년 청나라 강희제 때 세운 패방이다. 여의주를 갖고 노는 용, 새벽 해를 바라보는 봉황, 하늘을 나는 천마 등 전설적인 동물들과 식물, 꽃 조각이 섬세하다. 중국 전역을 통틀어 아름다운 패방으로 꼽힌다고 한다.
대묘의 첫 번째 정문 정양문(正陽門)을 지나면 전면에 오악독종비(五嶽獨宗碑)가 서있다. 오악독종이란 중국 5대 명산인 오악 중에서 태산이 최고라는 뜻이다. 중국은 예부터 5악은 뭇 산들의 우두머리요, 5악에서도 으뜸은 태산이라 여겼고 산에 신이 산다고 믿어서 천자(天子)로 일컬어지는 황제들은 산에 올라 제를 올렸다. 하늘과 땅의 신에게 봉선이란 제를 올림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고 통치 지위를 강화할 수 있었다. 사기에 따르면, 봉선의식(封禪儀式)은 기원전 244년 진시황이 최초로 거행했다고 한다.
태산(泰山)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山)이로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시조로 친숙한 태산은 중국의 5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해발 1,545m에 불과한 태산이 ‘오악의 지존(至尊)’으로 꼽히는 데는 역대 황제들의 공이 크다고 한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부터 한나라의 무제, 당의 고종과 현종, 송의 진종, 청나라의 건륭제 등이 정상에 올라 하늘을 향해 장엄한 봉선(封禪: 흙을 쌓아 단을 만들어 하늘과 산천에 제사 지내는 일) 의식을 거행했다. 태산에서의 봉선 의식은 황제라고 해서 누구나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덕을 쌓고 태평성대를 이룩한 이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졌다. 태산에서 봉선 의식을 거행한 것만으로도 황제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산은 공자를 비롯해 두보, 이백, 모택동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유명인사들도 많이 올랐단다. 오늘날까지 태산은 중국인들이 ‘평생에 한 번은 오르고 싶은 산’으로 꼽는다고 한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수많은 주홍글씨들로 바위가 붉게 물든 광경은 붉은색을 좋아하는 중국인의 문화인가 보다. 이 중에 황제가 쓴 글씨는 황금색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둠이 태산 아래까지 밀려올 즈음 저녁 만찬장으로 이동하였다. 호텔에 도착하여 8층에 모였는데 인원이 많아 8층 809호~810호 통로에 양쪽으로 앉아서 태산 등정의 소감을 듣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이제 내일이면 아쉬움을 뒤로하고 중국을 떠나 귀국해야 하는 마지막 밤을 어떠한 추억으로 기억되어야 할까? 이렇게 성지탐방의 마지막 밤이 깊어 갔다.
대묘 정양문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마음이 모든 것을 지어낸다)
넷째 날(4월15일), 오늘 천불산을 관광하고 오후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성지탐방의 마지막 날이다. 천불산(千佛山)은 해발 258m로 중국 산동성 성도인 제남(Jinan)시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는 유가, 도가, 불가의 사상을 마음속에 품은 이들의 기도처이고 불교사원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삼국을 통일하고 산세를 따라 불상을 여러 개 조각하고 천불사를 세운 때부터 천불산이란 명칭이 붙었고, 천불사는 당나라 때 흥국선사(興國禪寺)로 이름이 바뀌고, 원(元)~명(明)대 확충공사를 거쳐 유명한 불교사원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수원시와 제남시의 자매도시체결 10주년을 기념하고 양 시의 미래지향적인 교류협력증진을 위하여 세운 ‘우정의 문’이 표지석과 함게 설치되어 있다.
우리들은 천불산 탐방을 끝으로 4일간의 성지탐방을 종료하였다. 이영재 가이드의 해설을 들을 때는 그런대로 이해도 하고 눈여겨 관찰도 하고 탐방의 의미를 되새겨 보려고 노력도 하였지만 뒤돌아 생각해 보면 남는 것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나만의 추억! 나는 대성현과 대화를 하고, 태산의 어머니를 만나고, 옥황상제의 교통정리를 보고, 부처의 마음을 알음알이 했던 추억 이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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