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 미완성 송덕비
민족의 수난기였던 왜정 말기와 해방 그리고 6.25를 거치는 동안 우리 민족의 삶은 피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국 광복의 기쁨도 잠시 6.25 동란을 맞아 조국강토는 두 동강으로 갈라지고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죽음보다 더한 어려움 속에 모진 목숨을 부지해 왔다. 이 시기에는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아 남루한 차림에 거처할 데가 없어 다리 밑에 거주하며 구걸하여 연명하는 걸인이 많았다. 끼니 때마다 바가지나 깡통을 들고 동네를 돌며 밥을 얻으려 다니는가 하면 길흉사가 있으면 10여 명 이상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마당가에 진을 치고 앉아 잔치가 끝날 때까지 머물기도 했다.
모두가 어렵던 시절이라 더러는 괄시도 하고 귀찮아하며 구박도 해 보지만 산목숨을 어쩌겠는가. 모두가 선량한 우리 백성들이었건만 전쟁 때문에 생겨난 피해자들인 것을…….
이 시절 진주고을 진성 땅에 인자한 굼실댁이 살고 있었다. 생활수준도 괜찮았지만 인심 또한 후덕하여 끼니 때마다 찾아오는 걸인들에게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가 하면 입을만한 옷가지도 내어주고 마치 가족처럼 대하였다. 끼니 때면 항상 식구 외에 밥을 준비하여 불청의 객이 올 것을 예상하고 대비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수년간, 어느 날 걸인들 20여 명이 떼거리로 몰려와서 마당에 엎드려 하는 말 "지난 수년간 저희들을 가족처럼 보살펴 주신 은혜 백골난망입니다. 어르신 내외분이 아니었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어찌 우리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한 두 사람도 아닌 저희들의 생명의 은인이라 그동안 저희들이 거렁뱅이 주제지만 푼푼히 모아 어른들의 송덕비를 세우고자 이렇게 왔습니다" 라고 머리를 조아렸다. 기특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나 그들을 설득하고 말려서 겨우 돌려보냈다.
그때 그 비가 어떤 형태로든 세워졌다면 오늘날 ‘얻어먹는 걸인들이 세운 송덕비’로서 만인의 본보기가 되고 추앙받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누가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건 덕을 베풀고 선을 쌓는 것은 자손만대로 그 음덕이 미칠 것이다. 진주향교 장의로 봉사하고 있는 이익기 장의 부모님의 실화이다.
심동섭 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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