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율곡과 사계 선생을 모신 죽림서원
논산에 있는 죽림서원은 1626년(인조4년) 황산서원(黃山書院)으로 창건됐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양 선생을 배향해 오다가 후에 사계 김장생(金長生)선생을 추배했다,1665년(현종6년)에 죽림서원으로 사액을 받고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우암 송시열 선생을 추배했다.
1871년(고종 8년)에 흥선대원군의 전국 서원 훼철령에 의해 폐철되었으나 유림들의 공의로 1946년 단소(壇所)를 설단해 제향을 모셨다.
1965년에 복원돼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식 건물로 사우를 재건해 음력 3월15일과 9월15일 제향을 행하고 있다. 1984년 5월17일 문화재자료 제75호로 지정됐다. 홍살문을 입구로 하여 외삼문, 동서 양재, 내삼문, 사우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우의 오른쪽에 죽림서원 중건비와 황산서원 비가 세워져 있다. 현재 조남홍 원장이 대표로 있다.
배향 인물 약전은 다음과 같다.
정암 조광조는 본관이 한양으로 1515년(중종10년) 알성시에 급제하여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고 세자부빈객을 겸하였다.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 책록이 잘못되었다고 상소를 올려 그로 인해 훈록을 깎인 자들로부터 깊은 원성을 받았다. 그들은 궁 안의 나뭇잎에 꿀물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의 글을 써서 벌레가 파먹게 하여 왕에까지 소문이 들어가게 했고 끝내는 조광조 등이 당파를 조직하여 나라를 뒤집어 놓았으니 그 죄를 밝혀달라고 주청해 능주에 귀향가 사사되었다. 기묘사화이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묘에 모셔졌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퇴계 이황은 본관이 진보로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들어가 학문을 닦아 동방의 주자라 불렸다.1568년(선조 1) 대제학, 판중추겸 지경연 등이 되어 유명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었다. 시호는 문순이고 영의정에 추증됐다. 그의 사상 학풍이 후세에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했다.
율곡 이이는 본관이 덕수이다.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1558년(명종13) 당시 이름을 떨치던 이황(李滉)을 찾아가 학문을 논의 하였고 과거 때마다 장원급제하여 구도 장원이란 칭송을 받았다.
대제학, 이조판서, 우찬성,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으로도 유명하고 경세가로서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여 임진왜란을 예언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는 동방성인이라는 칭호를 받고 기호학파를 형성, 후세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시호는 문성이고 1682년(숙종8)에 문묘(文廟)에 모셔졌다.
우계 성혼은 본관이 창녕이다. 율곡 이이와 사단칠정이기설을 토론하고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였다. 율곡이 왕에게 권유하여 종묘서령의 벼슬을 내리고 부르자 승낙하였으나 병으로 등청하지 못하였다. 왕은 약을 보내주고 편전에서 인견하였다. 1583년(선조 16년)에는 병조첨지, 이조참의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였고 이조참의를 거쳐 이조참판이 되었다.
성리학의 대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율곡과 함께 <사칠속편(四七續篇>을 완성하였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간이고 문묘에 배향됐다.
사계 김장생은 본관이 광산이다. 구봉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후에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공부해 예학의 거두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가 일어나 서제 김경손, 김평손 등이 연루되어 참형당할 때 연좌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잘못이 없다 하여 누명을 벗은 후 관직을 그만두고 연산에 낙향하여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벼슬이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예법에 밝아 나라의 전례나 행사에 의문이 있으면 다 그와 상의했다. 그의 예학은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에 크게 성행하였다. 시호는 문원이고 문묘에 배향됐다.
우암 송시열은 본관이 은진이다. 영산에서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에게서 학문을 닦았다.1633년(인조11년) 사마시에 장원급제하여 경릉참봉이 되고 이어 봉림대군의 스승이 되었으나 봉림대군이 형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심양으로 떠나자 송시열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닦았다. 효종이 즉위하자 이조판서에 올랐다. 현종 즉위 후에는 숭록대부, 이조판서에 판의금부사를 겸임했다. 효종의 장례와 장지를 놓고 말썽이 일어나자 사임하고 고향 회덕으로 내려왔다. 1668년 우의정에 취임하였으나 1689년 (숙종 15년) 왕세자(경종)가 책봉되자 시기상조라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귀향갔다가 상경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1756년(영조 32년)에 문묘에 배향되고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논산 이기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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