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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시론

진정한 간관의 표상 석탄 이존오

편집부
2015.02.16·5분 읽기·조회 24

이존오(李存吾)는 호는 석탄(石灘)·고산(孤山), 자는 순경(順卿)이며 본관은 경주다. 공민왕 9년(1360) 과거에 급제해 수원서기로 있다가 사한(史翰)으로 선발되었다.

정몽주, 박상충, 이숭인, 정도전 등과 친하게 지내며 하루도 빠짐없이 경서를 강론하여 사람들로부터 크게 칭송을 받았다. 공민왕 15년에 정언이 되었다.

당시 신돈이 정권을 잡고 불법을 저질렀지만 감히 비판하는 자가 없었다.

이존오가 분격한 나머지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 신돈의 잘못을 논죄하려 마음먹었다. 상소문의 원고를 소매에 넣고 성(省)으로 가서 동료에게 보이자 낭관(郞官)들 중에서 감히 호응하는 자가 없었다.

그가 인척되는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정추에게 “형님께서 이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꾸짖자, 결국 정추는 그의 말을 따랐다.

당시 올린 상소는 이러했다.

“3월18일 궁궐 안에서 문수회(文殊會)가 열렸을 때 저희들이 목격한 바로는, 영도첨의(領都僉議) 신돈이 재상의 반열에 앉지 않고 감히 전하와 아주 가까이서 나란히 앉아 있었으니, 이를 안 나라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해괴히 여긴 나머지 인심이 흉흉해졌습니다.

무릇 예법이란 위아래를 구분함으로써 백성의 뜻을 안정시키는 것이니 만약 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군신관계와 부자관계와 나라와 집의 관계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성인이 예법을 제정하여 위아래의 구분을 엄격히 만드신 것은 깊은 의도와 원대한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희들이 보건대 신돈은 주상의 은총을 입고서 국정을 전횡하면서 아예 임금의 존재를 안중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당초 영도첨의, 판감찰(判監察)로 임명되던 날에는 국법대로 조복 차림으로 대궐에 와 감사를 올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반달이 되도록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궐 뜰에 와서는 무릎을 아예 굽히지도 않고 늘 말을 탄 채 홍문을 출입하며 전하와 함께 의자에 기대어 앉곤 합니다.

자기 집에 있을 때는 재상이 뜰 아래에서 절을 해도 모두 앉은 채로 대하니, 과거 최항, 김인준, 임연도 감히 이런 행동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옛날 그가 승려의 신분일 때는 아예 도외시하고 그의 무례함을 구태여 꾸짖을 필요도 없었지만, 지금은 재상이 되어 관직과 관계(官階)가 이미 정해졌는데도 감히 예를 잃고 지켜야 할 도리를 이처럼 훼손하고 있습니다.

(중략) 저희들은 간원에 재직하고 있는 몸으로, 전하께서 적임이 아닌 자를 재상으로 삼으셔서 천하의 비웃음을 받고 아득한 후대에까지 비난 받을까 우려한 나머지 간언을 올림으로써 간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 합니다”

소가 올라가자 왕이 대노하여 상소문을 불태우게 한 후, 정추와 이존오를 불러 면전에서 꾸짖었다.

이때 이존오가 신돈을 노려보며 “늙은 중이 어찌 이처럼 무례할 수 있는가?”라고 꾸짖으니 신돈이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걸상에서 내려 왔다. 왕이 더욱 노해 그를 국문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측근들에게 “나는 이존오의 성낸 눈이 두렵다.”고 실토했다.

당시 그의 나이가 스물다섯이었다.

신돈의 일당들이 반드시 그를 죽이려고 하자 이색이 이춘부에게 말했다.

“우리 태조 이래 5백 년이 되도록 아직까지 한 명의 간관도 죽인 적이 없었는데, 지금 영공의 일로 간관을 죽인다면 나쁜 소문이 퍼져나갈까 걱정됩니다. 게다가 하찮은 유생의 말이 대인에게 무슨 손해를 끼치겠습니까? 영공께 아뢰어 죽이지 않게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춘부 등도 옳은 말이라 여기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시켰다.

벼슬에서 물러나 공주의 석탄에 은둔했는데 신돈의 세력이 더욱 강성해지자 이존오가 울분을 이기지 못해 병이 들어 죽으니 나이 서른하나 였다.

죽은 지 석 달 만에 신돈이 처형당하자, 왕은 그의 충성을 생각하여 성균대사성으로 추증하였다.

<청구영언>에 시조 3수가 전한다.

 

구름이 無心탄 말이 아마도 虛浪하다

中天에 떠이셔 任意로 다니면서

구태야 光明한 날빛을 따라가며 덮나니

 

신돈이 왕의 총명을 가리고 있음을 개탄하는 내용이다. 여주의 고산서원, 부여 의열사, 공주 충현서원, 무장 충현사에 봉향되었다. 현재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신월리 477번지에 있다.

경기 이단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