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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시론

특별기고 -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맞아 우리 민족의 혼을 찾아서

시베리아횡단 인문학여행(연해주 최재형 독립운동가를 중심으로)

하헌주
2019.09.05·11분 읽기·조회 42

 

하헌주(사단법인 대한민국역사문화진흥원 대표, 성균관유도회 대덕지부 회장)

 

사단법인 대한민국역사문화진흥원은 지난 8월11일부터 20일까지 2019년도 사업계획의 일환으로 시베리아횡단 인문학여행을 회원 28명과 함께 다녀왔다.

역사는 돌아봄이고 관심이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미래를 읽는 감동의 시간을 갖기 위해 마련된 이번 여행 첫째 날은 인천공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으로 내려 바로 우수리스크 고려인역사관으로 이동했다.

고려인역사관은 1860년대부터 연해주로 이동한 고려인의 삶과 애환(1920년 4월참변 등)이 오롯이 녹아 있는 연해주의 항일독립운동 근거지였다. 1937년 약 20만여 명의 고려인이 시베리아횡단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송된 슬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연해주는 수많은 애국투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혼(魂)을 불태운 곳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가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대한제국 초대 러시아 상주 공사로 부임한 이범진은 일제의 소환명령에 거부했다. 대한제국 황제의 특사로 항일 구국활동을 이곳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의 단체를 지원하는 활동자금을 아들을 통해 보내주었다.

1907년 아들 이위종을 헤이그 밀사로 파견했고 연해주 지역에 의병 조직인 동의회를 결성케 하여 활동하고 일제의 조선강점이 완료되자 1911년 상트페테르브르그 즉 뻬쩨르브르그에서 목을 매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동의회(同義會)는 연해주에서 결성된 대한민국의 항일의병조직으로 1907년 겨울 연추의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집에서 안중근, 김기룡, 엄인섭 등이 의형제를 맺은 뒤 항일의병을 일으킬 목적으로 연해주 각지의 동포사회를 순방하며 뜻있는 청년 87명을 결집하고 총기와 자금을 모금했다.

 

 

사단법인 대한민국역사문화진흥원의 <시베리아 횡단 인문학 여행>은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해방과 분단에 이르는 한반도 격변기에 연해주, 만주, 시베리아에서 분투한 한인의 역사를 만나는 한(恨)의 여행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하바롭스크, 치타, 울란우데, 이르쿠츠크, 바이칼 호수 등 열차가 지나는 곳은 조국의 해방을 꿈꾸던 한인들의 발자취며 삶의 무대였다. 1945년 9월11일 서울을 출발한 마지막 열차가 신의주에 도착한 이래 74년 동안 대한민국은 대륙으로 향하는 길이 막혀 있었다. 이번 시베리아 여행은 대한민국이 시베리아로 향하는 시대를 앞두고 무한한 가능성을 눈으로, 가슴으로 확인한 감동의 여행이었다.

 

 

1918년 12월 러시아의 극동지구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여준·김좌진·황상규·박찬익·김교헌·안창호·김규식 등 39명의 서명을 받아 이듬해 2월1일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음력으로 무오년(戊午年)에 작성되어 ‘무오독립 선언(戊午獨立宣言)’이라고도 불리는 ‘대한독립선언서’는 무장투쟁으로 완전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독립군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한 달 후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항일독립운동 3.1운동으로 이어진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민족독립운동은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연해주 일대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독립운동의 주체는 고려인들과 한반도에서 독립운동의 무대를 이동시킨 우리 모두의 아버지 할아버지였다.

한(恨)의 역사와 문화가 있는 고려인 박물관에서 그분들의 활약상을 보고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상설 선생 유적지에도 다녀왔다. 항일항쟁의 대부 페치카 최재형 선생 소유였던 굼 백화점을 보고 군자금으로 100억원을 부담했다는 최재형 선생 동상 제막식 현장도 둘러보았다. 제막식 현장에는 국회의원, 교육부 관계자, 보훈처 관계자 분들이 참석했다.

최재형 선생은 일명 재형·도헌. 러시아 이름은 뻬돌쏘오·최뻬찌카.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러시아령 노우키예프스크로 이주하여 귀화했다. 상업으로 치부하여 노우키예프스크 도헌이 되자, 연봉을 은행에 적립하여 그 이자로 동포 자녀 1명씩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학시켰다.

1904년 러일전쟁 때 러시아 해군소위로 경무관 부속 통역관이 되어 활동하는 한편, 남부소집회 감독으로 러시아 군부의 지원하에 동포들을 규합했다. 또한 전 간도관리사 이범윤(李範允)과 결의형제하고 그를 지원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군대가 해산당하여 다수의 군인들이 러시아령으로 넘어오자, 이범윤과 함께 격문을 작성하고 최병준(崔秉俊)·엄인섭 등을 각지에 파견하여 의병·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이듬해 3월 이위종(李瑋鍾)으로부터 군자금 1만 루블을 지원받고,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범윤과 함께 독립군 600명을 훈련시킨 다음,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여 함경북도 경원의 신아산, 회령 영산에서 일본수비대를 궤멸시켰다. 이어 노우키예프스크에 박춘근(朴春根)이 이끄는 독립군 본부를 설치하는 한편, 러시아군에 쇠고기 기름 등을 납품하여 군자금을 마련하고 동포 사회의 정착을 지원했다.

엄인섭·김서윤(金瑞允)·이위종 등과 독립운동단체 동의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1910년 2월 〈해조신문(海朝新聞)〉을 인수하여 〈대동공보(大東共報)〉로 개칭·재간행하여 동포들의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했다.

또한 노우키예프스크에 한인중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주력하는 한편, 1911년 신한촌에서 홍범도(洪範圖)·이종호(李鍾浩) 등과 함께 권업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일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재러한인대표로 2명의 위원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할 것을 계획하고 이를 추진했다. 그해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재무청장에 선임되었으나 이를 사양했다.

1920년 4월초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해 재러한인독립군부대를 총집결하고 사단장이 되어 러시아 적군과 함께 치열한 시가전을 전개하다가 김이직(金利稷)·황경섭·엄주필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일본헌병본부로 압송되는 도중 탈출했으나 니콜스크시 남쪽 군사경계선 근처에서 일본군추격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최재형 선생은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세계를 변화시킨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1910년 8월29일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5천년 동안 이어 온 나라를 빼앗기게 된다. 이에 굴복하지 않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전 세계로 향했다.

우리와 이웃했던 나라 중국 상해 임시정부, 홍구공원 윤봉길, 청산리 항일대첩 김좌진, 러시아 연해주의 이상설, 안중근, 최재형은 물론이고 미국의 안창호, 쿠바의 임천택, 몽골의 이태준, 카자흐스탄의 홍범도, 네덜란드의 이준 등 전 세계에서 치열하게 싸운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한국과 세계를 향한 여러분의 꿈이 더욱 위대해질 것이다.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토토크에서 북쪽으로 약 112km 떨어진 연해주 제2의 도시로 중국의 하얼빈과 북한의 평양으로 이어지는 물류수송 도시며 과거 발해의 5정 12부 중 솔빈부라는 도읍이 있던 지역인데 지금은 황량한 들판에 러시아 정교의 조형물만 놓여 있고 들녘 사이사이 목장과 우리 조상들이 타고 다녔을 것 같은 말들만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한촌과 블라디보스토크항 박물관을 관람한 후 러시아의 파리라 불리는 이루크추크로 향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현지시각으로 10시 50분에 장장 72시간의 시베리아횡단열차에 몸을 실었다.

3박4일 동안 객차 1냥을 전세 내어 우리 일행 28명이 한 공간에서 숙식 및 인문학 관광 여행을 겸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자작나무와 소나무의 숲길은 우리나라와 많은 대조를 이룬다. 짧은 여름과 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기후에 적응하는 나무가 그것이리라.

시베리아횡단열차에는 식당 칸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러시아라는 나라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고 한다. 조악하지만 중간 중간 간이역에서 물을 공급받아 서비스를 제공하는 샤워시설이 있기는 하지만 그리 권장할 만한 것은 못된다. 그냥 인내심을 가지고 여행을 지속하는 것이 현명하리라는 판단이다.

19세기 생계를 위해 한반도를 떠난 우리 할아버지들이 구소련의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이 궤도를 통해 우마들이 사용하는 객차를 이용해 이동을 했던 사실을 상기할 때 조국이라는 거, 국력이라는 거, 경제력이라는 거에 많은 생각을 해본다. 이곳 러시아에서...

 

 

이루크추크에 도착해서 시내에서 하루를 머물고 차량으로 4시간을 이동하면서 또 한번 광활한 평야지대를 접한다. 벌판을 지나 방목하는 소와 말의 무리도 보이고 민둥산이 이어지기도 하고 때론 석회암 지대가 등장하기도 하는 바이칼 호수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바이칼이란 이름은 타타르어로 "풍요로운 호수"라는 뜻의 바이쿨에서 왔다고 한다.

약 2천5백만-3천만년 전에 형성된 지구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담수호(淡水湖)이다. 길이 636 km, 폭 20~80 km, 면적 31,494 km², 깊이 1,637 m로 아시아에서 가장 넓은 민물호수이며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백두산을 민족의 성지(聖地)라 부르지만 바이칼 호수는 한민족의 시원(始原)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한국인 중에는 ‘바이칼’이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을 설레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민족의 형성과 이동 경로 그리고 풍속 등을 연구하는 전공학자들과 전통 무속 및 명상 등에 관심이 있는 많은 인사들이 소리 소문 없이 찾는 곳도 바로 이 바이칼 호수라고 한다.

특이한 점은 이 지역에서 우리나라의 서낭당이나 솟대 장승들이 서 있다는 점이다. 특히 징기스칸은 1,167년경 바이칼호 서부 해안 근처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의 어머니가 바이칼 호수의 가장 큰 섬인 알혼(olkhon)섬의 동쪽 동바이칼 바르구진(barguzin)의 토착 몽골족이었으며 나중에 이 바이칼 서부 알혼섬으로 이주하여 왔다는 전설이 있다.

징기스칸도 몽골제국을 건설하고 많은 전쟁을 치루면서 틈틈이 자신의 고향인 바이칼에 들러 기도와 명상 휴식을 취할 정도로 이곳을 사랑했으며 사후에도 알혼섬에 무덤을 썼다고 전해지고 있다.

9박10일 동안의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연해주, 이루크추크 등지에서 고려인들의 이주 생활, 항일운동 유적지와 시베리아 횡단열차, 바이칼호의 알흔 섬에서 2박을 한 펜션 등의 기억이 소록소록 떠오른다.

이루크추크에서 4박5일 동안 보이는 건 바이칼호와 거기서 버티고 서있는 자작나무, 러시아 소나무, 베이커리, 보드카, 그리고 바이칼호에서 천진난만 물장구치는 회원들의 환한 얼굴들과 별 보이지 않는 밤하늘을 쳐다보며 부르는 정겨운 우리 회원들의 노래 소리뿐이다.

9박10일의 짧은 여행을 안내해 준 현지 가이드와 심용보 교수님과 따님 그리고 함께한 사단법인 대한민국역사문화진흥원 28명 회원 모두의 가정에 행복이 깃들길 기원하며 늘 건강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