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바위에 새겨진 각자(刻字)에서 역사를 배운다③ 양산 내원사 금강대 바위에 새겨진 손병희를 찾아서

송진모 / 부산시 주재기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양산 천성산 내원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으며,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창건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673년(문무왕 13) 원효가 동래군 불광산에 있는 척판암(擲板庵)을 창건하여 주석하던 중, 당나라 태화사의 1,000명 대중이 장마로 인한 산사태로 매몰될 것을 알고 ‘해동원효척판구중(海東元曉曉擲板救衆)’이라고 쓴 큰 판자를 그곳으로 날려 보냈다. 그곳 대중들이 공중에 떠 있는 현판을 신기하게 여겨 법당에서 뛰쳐나온 순간 뒷산이 무너져 큰 절이 매몰되었다. 이 인연으로 1,000명의 중국 승려가 신라로 와서 원효의 제자가 되었다. 원효가 그들이 머물 곳을 찾아 내원사 부근에 이르자 산신이 마중을 나와 현재의 산신각 자리에 이르러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원효는 대둔사(大芚寺)를 창건하고 89개 암자를 세워 1,000명을 거주시켰다. 그리고 천성산 상봉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여 1,000명의 승려를 오도(悟道)하게 하였다.
이때 『화엄경』을 설한 자리는 화엄벌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중내원암에는 큰 북을 달아놓고 사람들이 모이도록 하였다고 하여 집붕봉이라는 이름이 생겼으며, 1,000명이 모두 성인이 되었으므로 산 이름을 천성산(千聖山)이라 하였다 한다. 그 뒤 1646년(인조 24)에 의천대사가 중건하였고, 1845년(헌종 11)에 용운선사가 중수하였으며, 1876년에는 해령선사가 중수하였다. 1898년에 유성선사가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고 절 이름을 내원사로 개칭하였다. 이때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이라 이름 붙인 이후 선찰(禪刹)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경허선사의 법제자인 혜월선사가 조실로 주석하면서 운봉선사, 향곡선사 등 한국 선종사(禪宗史)의 맥을 잇는 많은 선승(禪僧)을 배출한 도량이 되었다.
양산과 울산, 경주는 동학(천도교)의 성지로 알려져 있으며, 천성산 내원사는 동학(東學)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뿐만 아니라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음은 표영삼 천도교 서울교구 선도사가 『신인간』 통권 630호(2003년 2월호)에 있는 수운 최제우와 의암 손병희의 내원사 방문 기록이다.
"지금의 내원사는 당시 내원암으로 불렸다. (수운 최제우 선생은) 1856년(丙辰) 봄에 스님으로부터 양산 천성산(千聖山 811.5m)에 기도할만한 곳으로 내원암(內院庵)이 있다 하여 소개를 받았다. 4월(음)에 폐백을 갖추어 납자(衲子,중의 별칭)의 안내로 내원암(內院庵)에 들어갔다. 49일간을 작정하고 기도를 시작하였으나 2일을 채우지 못한 47일 만에 80세에 이른 숙부 섭(1777∼1856)이 별세했다는 부음을 받게 되었다. 곧 하산하여 장례를 치른 후 1년간 복(服)을 입고 나서 1857년(丁巳) 7월에 다시 천성산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자연동굴인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의 기도를 마쳤다."

적멸굴 안에서 밖으로 찍은 사진이다.
의암성사(義菴 孫秉熙)는 1909년 말에 임명수(林明洙,江東人)·최준모(崔俊模,禮山人)·김상규(金相奎,瑞山人)·조기간(趙基竿,陽德人) 등 4명의 젊은이를 대동하고 양산 내원암에 들어가 49일간의 독공(篤工)을 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 1월 어느 날 주지 스님인 손석암이 의암에게 수운이 도 닦던 동굴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하여 성사는 적멸굴을 찾게 되었고 조기간(趙基竿)은 『신인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손석암이라는 근 70된 노승이… 우연히 성사에게… 저 산봉우리 바로 밑에 큰 굴이 있는데 적멸굴이 올시다. 10여 살 때 저의 스님께서 경주 최복술이 굴에 와서 도통하여 수리가 되어 날아갔다는 말씀을 들었다고 하였다.…성사께서 다음날 점심 후 오늘은 멀리 운동 가 보자 하면서 젊은 중의 인도를 받아 적멸굴로 갔다. …날씨는 차지만 모두 땀으로 목욕을 했다. …앞서 올라간 성사께서는 ‘옛날에도 이곳을 와 보았는데 오늘 다시 와서 보는구나(昔時此地見 今日又看看)’라는 시 한 수를 읊었다. …수운 선생께서 양산군 천성산 내원암 적멸굴에서 공부한 것은 알았으나 직접 찾았으니 얼마나 인연 깊은 일인가."
또 1943년 10월 『신인간』에 “적멸굴행”을 적었던 소춘(小春) 김기전(金起田)에 따르면, 내원암 계곡에 “포덕51년 1월 일”이라 새기고 손병희 성사님 씨명 곁으로 한자 내려 당시 기도 수행원 임명수, 최준모, 김상규, 조기간 등 4인의 이름이 기명되어 있다고 하였다.
최제우가 기도하던 적멸굴은 바위가 붉은 색이어서 붉을 눈썹을 상징하는‘적미굴’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 입구는 내원사 주차장 아래에 있는 화장실 건너편 계곡이다. 계곡을 따라 30분 올라가다 정상 조금 못미쳐 왼쪽(서쪽)으로 2~30여 미터 가량 가면 대나무 숲이 있다. 그 숲을 지나면 적멸굴이 나타난다.
경주 출신 최복술은 1855년 울산 유곡동 여싯바위골에서 소위 「을묘천서(乙卯天書)」를 받고, 1857년 양산의 내원암에서 49일 기도를 하고, 경주 용담정에서 수행을 하던 중 1860년 (음)4월5일 경주 용담정에서 득도를 하게 된다. 그 후 이름을 어리석은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의미로 ‘최제우(崔濟愚)’로 이름을 바꾸었다.

금강대에 손병희와 제자의 각자가 보인다.
내원사 일주문 밖에서부터 각자를 소개하면 힐튼파크모텔 옆에 남극계원(南極契員) 12명 각자가 있고 그 옆에 최상종(崔商奭)·최상덕(崔商德)·최상홍(崔商洪), 조금 위에 김영수(金永洙) 바위가 있다. 일주문을 지나 소금강(小金剛)바위에 산문금훈주(山門禁葷酒), 바로 옆에 전달권(全達權)과 장자 희준(喜準), 손자 병인(秉麟), 차자 석준(錫準), 손자 병구(秉龜)·병기(秉驥)·병룡(秉龍)이 각자되어 있다.
금강암 입구 금강대에 손병희(孫秉熙), 임명수(林明洙), 최준모(崔俊模), 김상규(金相奎), 조기간(趙基竿) 포덕오십일년 일월 일(布德五十一年 一月 日)이 새겨져 있으며, 후에 새겨진 것으로 여겨지는 손병희 우측에 박명선(朴明善), 윤구영(尹龜榮)이 있다. 손병희 좌측 아래에 이기영(李基永),이상덕(李象悳)·이범선(李範善)·정한정(鄭漢禎)이 각자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앞 계곡 가운데 바위에 오잠식(吳潜植)·서정신(徐正信)·박성우(朴聖宇)·황기수(黃紀秀)·곽재상(郭在相)이 새겨져 있다. 마지막으로 옥류교 아래에 이기영(李基永) 바위가 홀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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