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본질(本質)과 문식(文飾)의 조화
김인규 / 강원도향교재단 이사장, 횡성향교 원임 전교
공부자 말씀에 본질[내용]과 문식[형태]이 조화를 이루어야 전인간(全人間)적인 군자라고 하신 것이 있다.(文質 彬彬然後君子) 본질은 핵심이고 문식은 외관으로 두 가지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다. 이것이 바로 중정지도(中正之道, 中은 핵심 正은 위치)이자 중화사상(中和思想, 中은 균형 和는 조화)이다. 이 대도(大道)는 유가(儒家)의 근본정신으로 어느 곳 어느 것이든 적합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성균관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건축을 할 때 기초와 골조는 본질이고 장식과 단청(丹靑)은 문식이다. 상례를 치를 때 슬퍼함이 본질이고 형식과 절차는 문식이다. 은나라는 본질[문물]을 숭상하였고 주나라는 문식[예악]을 숭상하였으므로 은나라와 주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조화시켜 지나침은 덜어내고 모자람은 보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큰 덕[克明峻德]을 밝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오랜 세월 동안 벽옹(辟雍), 반궁(泮宮), 태학(太學), 국학(國學), 국자감(國子監), 성균관(成均館)이란 명칭으로 변천하면서 국가 중앙의 인재육성을 담당해 온 교육기관은 사문진작(斯文振作)이 본질이고 선사향사(先師享祀)는 문식이라 볼 수 있다. 사문진작이 성균관의 첫째 목표이다. 교육을 시키는 과정 중, 학교에서 선사(先師)를 공경하게 된 것이지 스승님을 모시기 위하여 공부한 것은 아니다.
세조(1466) 대에 시작하여 성종 대에 완성된 『경국대전』의 성균관 직제는 대사성 l명, 사성 2명, 사예 3명, 직강 4명, 전적 13명, 박사 3명, 학정 3명, 학록 3명, 학유 3명 등 총 32명으로 구성되어 예조의 감독 하에 국가 중앙의 교육기관 업무를 관장해 왔다.
그러나 일제는 강화도조약(1876) 이후 갑오개혁(1894)에 편승하여 노골적으로 고문(顧問)정치(1904)와 정미조약(1907)에 의한 차관(次官)정치를 펼치면서 본격적으로 식민지화를 전제로 교육개혁을 단행하여 성균관과 향교의 교육기능을 폐지하고 다만 식민지 정착에 유리한 문묘 향사(享祀) 기능만을 용인해서 한민족의 얼을 끊고 근간을 변질시켜 놓았다.
이때부터 성균관은 예조(정 2품) 관할에서 의정부의 학부(學部)로, 지방 향교는 도(道) 관찰사(종 2품) 관할에서 같은 학부로 편제되어 편의상 종교의 일부분, 성향으로 분류되었고, 직제 역시 성균관장, 교수, 박사, 훈도, 직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장의(掌議)라는 명칭도 본래는 성균관 기숙사의 학생회장 격이고 색장(色掌)은 규율부장 격으로 유생들이 선출하여 아침·저녁으로 식사할 때마다 도기(到記)에 서명함으로써 학업일수를 기록하는 임무를 맡았을 뿐 향교에는 없었던 직책이다.
이 모든 것을 미루어 본다면 지금의 관행은 거의 일제 강점기의 변질된 산물로서 청산 대상이라고 볼 수 있다. 민감한 내용이지만 유도회 역시도 친일파 유림들이 경학원(성균관)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정통 보수 유림을 결집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다. 잘 알고 있듯이 심산 김창숙 선생의 공덕으로 성균관대학교가 설립되고 성균관도 복원되어 어려운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이 시대 유림들이 이러한 모순점을 상기한다면 갑오개혁 이전의 『경국대전』 직제대로 역할과 기능을 복원하는 것이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사문진작(斯文振作)을 도모하는 대의(大義)의 지름길이다.
아마도 공부자께서 근대에 변질된 사도(斯道)를 보신다면 통탄할 일이니 하루 빨리 합리적으로 유림조직의 대통합을 이루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그 자리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고 또한 수장의 무능이기보다 감투관행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유림들의 잘못이 더 크다고 볼 수 있어 누구를 탓할 일만도 아닌 것이다.
지금 유림사회의 현실은 무엇보다 경전공부가 시급하다. 그 동안 한자교육의 단절로 70세 이하의 유림은 경전에 익숙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전국 234개 향교의 전교가 대부분 공직자 출신으로 경전공부를 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림의 원천적인 지식은 경전으로부터 근본하기 때문에 앞날이 걱정되는 대목이다.
다른 종단의 종교가 번창하는 원동력은 성당과 교회와 법당에서 매번 성인의 말씀인 경전을 낭독하며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과연 그 동안 우리가 그만큼 노력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이 시대 유림에게는 필연적인 사문진작의 사명을 띠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대로 흘러간다면 멀지 않아 중단될 수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을 전제로 자아비판을 해보자!
우리 모두가 유림의 자질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서 십만 명도 안 되는 유림을 수십만 명으로 부풀려 국가에서 주는 종교후원 보조금을 받아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이다. 수백만 명의 다른 종교와 비교하겠다는 목표가 교육기관의 본분을 도외시한 망상일 뿐이다.
맹자가 제 선왕에게 연목구어(緣木求魚)라는 말씀으로 망상을 지적한 바 있다. 중원 지역에 사방 천리의 영토를 가진 아홉 나라 중에 제나라는 겨우 하나를 소유한 나라이니 어떻게 여덟 나라를 복종시킬 수 있겠느냐고 한탄한 말로서 부디 근본부터 돌이켜야 한다고 강조했던 일이다. 욕망을 돌이키고 정치력을 발휘하여 인정(仁政)을 실시하면 저절로 많은 나라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을 찾아 구름같이 몰려 올 텐데 그리되면 폭정을 하는 군주들이 막을 수 없다는 논리로 망상을 하지 말도록 권고한 말이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자기 성찰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신뢰를 보여주고 인성교육과 예절교육을 성실히 주도하면서 사회로부터 신망을 받는다면 봉사정신이 투철한 유능한 신진 유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성균관의 위상은 높아질 것이고 국가는 당연히 사회 안정을 위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강사양성이 시급한 것이다.
그 동안 성균관은 일관되게 소송으로 점철해 왔고 사회 교육마저 주도권을 잃고 있다. 그리고 너무나 큰 실수를 반복했다. ▶천안 연수원 건 ▶횡령 물의 건 ▶유교방송 주식 건 ▶유교 박물관 건으로 이미 성균관의 신뢰는 땅에 떨어져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지만 아직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어느 누구의 책임 문제가 아니라 조직 자체의 존립 여부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충언이 귀에는 거스린다(忠言逆耳利於行)는 말이 있어 전국에 향교가 설립된 동기를 살펴본다면 태조가 도(道) 관찰사의 평가제도를 삼겠다는 취지에 따라 일제히 설립되었고 중앙의 과거제도 역시 성균관과 향교는 종속 관계가 아닌 독립기관이기 때문에 성균관을 거치지 않고도 대과(大科)에 응시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성균관은 예조 소관이고, 향교는 각 도의 관찰사 소관이었기 때문에 향교재산 역시 향교재산법에 의하여 각 도에 향교재단으로 이관되었다. 혹시라도 향교재단이 제도적으로 성균관에 종속되어 납부의무를 부여하도록 하려는 생각을 갖는다면 철회하는 것이 마땅할 것으로 관리 책임을 위임받은 입장에서 반대 입장임을 천명하는 바이다.
이제 문제 제기 대안으로 방법을 제시한다면 ① 성균관과 향교가 사회에 모범이 될 것, ② 경전공부를 실시하여 유림 자질을 향상할 것, ③ 인성교육과 예절교육을 주도해 나갈 것, ④ 경전·인성·예절강사를 양성할 것, ⑤ 유림 조직을 합리적으로 통합하고 조직을 재정비할 것, ⑥ 정통성을 보존하고 전통문화를 계승하는데 노력할 것, ⑦ 감투 관행을 청산하고 봉사정신을 함양할 것, ⑧ 외교 관계를 강화할 것, ⑨ 전통언론과의 공조를 유지할 것 등을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 지금과 같은 혼란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고 정통성을 바로 세워 일제 강점기 이전의 『경국대전』(조선법전) 근본대로 교육기능을 회복하고 선비정신을 되찾아야 한다.



![무신사, ‘책상을 탁쳤더니 억하고 말라서’ 카드뉴스 논란 확산 [유교경영리포트]](/uploads/4/legacy/photos/20260521/art_17791935224319_134c6c.jpg)

![[단독] 구리시장 경선판 흔드는 ‘유령 여론조사’... 언론사 명의 빌린 ‘불법 대리 조사’ 의혹 포착](/uploads/4/legacy/photos/editor/2604/20260417081433_gxgnwrel.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