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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시론

특별기고 - 바위에 새겨진 각자(刻字)에서 역사를 배운다⑦ 거창 원학동(居昌 猿鶴洞) 수승대를 찾아서

송진모 기자
2020.01.01·10분 읽기·조회 85

 

송진모 / 부산시 주재기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영남 제일의 명승지인 안의삼동(安義三洞)이란 우리나라 최고의 정자거리인 화림동, 진경과 진인을 찾는 심진동, 은자가 숨어 사는 원학동이 그것이다.

 

안의(安義)는 오늘날 함양군과 거창군의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덕유산에서 지리산으로 향하는 소백산맥 줄기의 동쪽에 자리한 산세가 웅장하고 계곡이 매우 깊은 험준한 지세를 형성하고 있다.

 

안의삼동의 으뜸인 원학동의 범위는 오늘날의 거창군 마리면 영승 마을에서 월성계곡 상류의 사선대까지 이르는 공간으로 본다.

 

원학동은 사대부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곳으로 은거 및 수학하던 공간, 현실 세계에서 찾은 무릉도원, 효우와 절의의 고장이라는 이미지를 모두 갖추고 있는 최고의 명승지로 알려진 곳이다.

 

거창 원학동(猿鶴洞) 수승대(搜勝臺)는 국가지정 명승 제53호 답게 조선 선비들이 즐겨 찾는 영남 최대 명승지이다. 당대 최고의 학자 퇴계 이황, 선비 정신의 표상 남명 조식, 한말 일제에 항거한 유학자이자 우국지사인 연재 송병선, 구국의 화신 면암 최익현, 구한말 3대 문장가로 불리던 영재 이건창․창강 김택영․매천 황현, 독립운동가 곽종석 등 조선의 명사들이 두루 찾은 탐승지로 위천을 따라 월성계곡의 아래 지역에 위치한다.

 

조선시대에 동(洞)은 오늘날과 같은 행정지명이 아니라 동천(洞天)을 의미하는 글자로 맑은 계류가 흐르고 산수가 아름다우며 경치가 좋은 계곡을 뜻하는 용어로 쓰였다. 이러한 원학동천(猿鶴洞天)의 중심에 바로 수승대가 자리하고 있다. 수승대 계곡은 덕유산에서 발원한 갈천(葛川)이 위천(渭川)으로 모여 구연(龜淵)을 이루면서 흐르는 물길이 조형해 놓은 비경이다. 수승대는 암반 위를 흐르는 계류의 가운데 위치한 거북형상의 구연암(龜淵岩)이 중심이 되고 계류 건너편 요수정을 응시하고 있다. 구연대, 또는 암구대(岩龜臺)라고 하는데, 높이는 약 10m, 넓이는 50㎡에 이른다.

 


 

 

구연암이 요수정을 응시하고 있다.

 


 

계류 건너편에는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둔 학자로 향리에 은거하며 소요자족했던 요수 신권(愼權,1501~1573)이 제자들에게 강학을 하던 요수정(樂水亭)이 있다.

 

이 정자는 구연대와 그 앞으로 흐르는 물, 뒤편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어우러져 수승대의 경관을 동천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요수는 아름다운 원학동 계곡에 살던 신권의 성정을 짐작하게 하는 정자의 명칭이다. 요수는 『논어』의 「옹야(雍也)」편에 나온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는 글로 옛 선비들이 심산유곡의 산수를 즐기며 늘 마음에 두었던 문구다.

 

요수정은 1542년 구연재와 남쪽의 척수대 사이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중건한 뒤 다시 수해를 입어 1805년 현 위치로 이건했다.

 

수승대의 동쪽에는 구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요수 선생이 1540년(중종 35)에 서당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친 곳으로 1694년(숙종 20) 구연서원으로 명명되었는데 요수 신권, 석곡 성팽년, 황고 신수이 등이 배향되어 있다.

 

구연서원의 문루인 관수루는 1740년(영조 16)에 세워졌다. 관수(觀水)는 『맹자』의 「진심장(盡心章)」에 등장하는 문구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이를 다 채운 다음에야 비로소 앞으로 흘러간다(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며 물의 속성을 강조한 글이다. 군자의 학문은 웅덩이를 채우는 물과 같아서 한 웅덩이를 가득 채운 후 비로소 그 다음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학문의 방법을 담고 있다.

 

또한 아름다운 동천의 계곡에서 지혜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물을 관조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제시하고 있는 심오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요수와 관수는 모두 계곡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즐기는 풍류의 멋을 음유하는 말이다. 요수정과 관수루에서 바라보는 수승대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승대 각자바위

 


 

수승대의 규모는 비록 작지만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은 노송들이 곳곳에 자라고 있는 거북바위에는 수승대의 문화적 의미를 알 수 있는 시문 등의 각자가 많이 새겨져 있다.

 

요수 신권의 시 2수 「가정계묘춘(嘉靖癸卯春,1543)」부터 늦게는 1960년대 초반까지인데, 그 중 대다수는 수승대 북편에 있으며 바위에 새긴 사람들을 분류해 보면 대체로 이 고을 역대 수령을 비롯한 관리, 유학자, 유지 등이다.

 

먼저 이 고을 역대 수령으로 이만운(李晩運, 제158대현감, 1796), 김병연(金炳淵, 제179대 현감, 1853~1855), 박제영(朴齊韺, 182대 현감, 1860~1864), 장석주(張錫柱, 제5대 군수, 1903~1905), 이종로(李鍾魯, 제6대 군수, 1905~1907), 김병우(金秉宇, 제10대 마지막 군수, 1913~1914), 이만윤(李晩胤, 거창도호부사, 1889.2), 신석우(申錫愚, 순찰사), 홍재철(洪在喆, 경상감사), 신홍성(愼鴻晟, 제17대 위천면장)이며, 이 고을 출신 등 유학자는 구오재(求吾齋) 신종선(愼宗先, 有學行, 淸操稚望著鄕黨), 어천(魚川) 신병우(愼炳佑, 사헌부 감찰, 낙안군수), 소황(小黃) 신종익(愼宗翼, 전적, 주서, 정언), 예봉(禮峰) 신찬호(愼瓚浩, 錦谷宋來熙제자), 송암(松菴) 신병운(愼炳雲, 통정대부중추원첨지), 상천(相泉) 신종호(愼宗鎬, 勉菴崔益鉉 문도), 정연시(鄭然詩, 교리), 정기상(鄭璣相, 응교), 학서(鶴西) 조성태(趙性泰),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고종의 스승),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 연재의 동생), 덕산(德山) 임진원(林眞源, 통훈대부행안기찰방), 일석(一石) 임석종(林碩鍾, 북상면장), 종와(鍾窩) 임만희(林晩熙), 학암(鶴巖) 임태희(林泰熙, 광중사마), 용암(龍巖) 임석형(林碩馨, 안의향교 도유사), 졸암(拙菴) 임수기(林秀杞, 통정대부중추원의관, 안의향교 도유사), 종남(鍾南) 임시희(林蓍熙), 개석(介石) 정연갑(鄭然甲, 비서원승), 정연학(鄭然學, 통정대부병조참의, 동계주손), 덕양(德陽) 정유필(鄭有弼, 안의향교 도유사), 모암(某庵) 정래균(鄭來均, 통정대부비서감승), 모와(某窩) 정태균(鄭泰均, 통정대부비서감승) 등 댓바위 벼랑에 새긴 각자는 모두 250여 건에 이른다.

 

수승대(搜勝臺) 수송대(搜送臺) 각자 바로 아래에 안의현감 한복연(韓復衍)이 경오(庚午)사월에 새긴 퇴계 선생과 갈천 선생의 시와 퇴계명명지대(退溪命名之臺), 갈천장구지대(葛川杖廐之臺) 각자가 함께 있으며, 퇴계의 시는 퇴계선생문집 별집권지일, 금곡 송래희의 금곡집 등에도 있으며 다음과 같다.

 


 

搜勝名新煥(수승명신환) 수승으로 이름을 새로 바꾸니

 


 

逢春景益佳(봉춘경익가) 봄을 맞은 경치 더욱 좋으리

 

遠林花欲動(원임화욕동) 먼 숲 꽃망울은 터지려 하고

 

陰壑雪猶埋(음학성유매) 그늘진 골짜기는 눈에 묻혔네

 

未寓搜尋眼(미우수심안) 좋은 경치와 사람 찾았으나 만나지 못해

 

惟增想像懷(유증상상회) 마음에 회포 쌓이네

 

他年一樽酒(타년일준주) 뒷날 한 동이 술에

 

巨筆寫雲崖(거필사운애) 큰 붓으로 벼랑에 구름 그리리


 

갈천은 퇴계보다 한 살 위로 수승대 명명에 대한 갈천 임훈(林薰)의 심정을 표현한 아래의 화상시(和相詩)가 갈천선생문집 권지일에도 있다.


 


 

花滿江皐酒滿樽(화만강고주만준) 강가에 꽃이 가득하고 동이에 술도 가득한데

 

遊人連袂謾粉紛(유인연매만분분) 소맷자락 이어질 듯 노니는 사람들 분분하네

 

春將暮處君將去(춘장모처군장거) 봄은 장차 저물고 그대도 장차 떠나니

 

不獨愁春愁送君(불독수춘수송군) 그대 보내는 시름에 봄의 아쉬움을 비길까?

 


 

수승대 근처 황산마을에 사는 선비 요수 신권은 대학자 퇴계가 마리 영승마을에 사는 빙장(聘丈)을 찾아온 퇴계선생이 수송대를 내방한다는 기별을 받았으나 사람은 오지 않고 시만 전해오니 무심히 대에 올라 만나지 못한 회포의 오언절구와 화답시 5언율시는 다음과 같다.

 

爲掃臺邊路(위소대변로) 대 옆길 쓰는 건

 

庶望華駕臨(서망화가임) 가마탄 이 오길 바람인데

 

詩來人不至(시래인부지) 시는 왓으나 사람은 오지 않아

 

無意獨登臨(무의독등임) 무심히 혼자 올라 멀리 바라보네

 


 

화답시

 

林壑皆增采(임학개증채) 골짝에는 채색이 더해가는데

 

臺名肇錫佳(대명조석가) 대이름 비로소 밝히니 아름답구나

 

勝日樽前植(승일준전식) 좋은 날에 술동이 앞에 차리고

 

愁雲筆底埋(수운필저매) 구름같은 수심 붓 끝에 묻으려네

 

深荷珍重敎(심하진중교) 깊은 마음 귀한 가르침 보배로우니

 

殊絶悵望懷(수절창망회) 그리운 회포를 끊으려 하네

 

行塵遙莫追(행진요막추) 속세에 노닐며 쫓지 못하고

 

獨倚老松崖(독의노송애) 홀로 우거진 솔 벼랑에 기대어 보네

 

 

수승대는 옛날에 수송대(愁送臺)라 불렸다. 수승대가 위치한 이 지역은 옛날 삼국시대 백제에 속해 있을 때 사신들을 전송하던 곳이라 한다. 그러다가 퇴계 이황이 이곳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수송’이라는 이름을‘수승’으로 바꾸어 명명한 후로 오늘날까지 수승대로 불리고 있다.

 

수승대 앞 너럭바위에는 연반석(硯磐石)과 세필짐(洗筆㴨)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연반석이란 거북이 입을 벌린 모양의 장주암(藏酒岩)에 앉은 스승 앞에서 제자들이 벼루를 갈던 바위란 뜻이고, 세필짐은 수업을 마친 제자들이 졸졸 흐르는 물에 붓을 씻던 자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장주암 위에는 오목한 부분이 있는데 이를 장주갑(藏酒岬)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막걸리 한 말이 들어가는데 일정한 때에 시험을 보아 합격한 제자들만이 장주갑에 부어놓은 막걸리를 마실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