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바위에 새겨진 각자(刻字)에서 역사를 배운다⑧ 연재 후학들의 호남의병 정신이 깃든 서벽정, 무주구천동 무계구곡을 찾아서

송진모 / 부산시 주재기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전라북도 무주군은 비록 산간 지대이지만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삶을 영위하였음이 여러 유물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설천면 기곡리 일대에서 간 돌도끼[마제 석부], 간 돌살촉[마제 석촉]이 수습되었으며, 적상면 사천리 일대에 고인돌이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사람들이 문화 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660년(태종 무열왕 7)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기 전까지는 무산(茂山)과 주계(朱溪) 지역이 백제와 신라 사이 국경을 접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매우 중요시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인 1414년(태종 14)에 시행된 행정지역 개편으로 인하여 주계현과 무풍현을 통합하게 되어 무주현(茂朱縣)으로 개칭되었고, 오늘날의 ‘무주’라는 명칭이 이때부터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무주에는 역사적인 변란이 있을 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역이 되었는데, 특히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후 무주에 적상산성이 수축되었고, 1614년(광해군 6) 적상산 사고(赤裳山史庫)가 설치되어 1633년(인조 11) 묘향산에 있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관하게 되면서 1674년(현종 15) 무주 도호부(茂朱都護府)로 승격하였으며, 금산의 관할이던 안성과 횡천을 편입하기도 한 중요한 지역이였다.
무주는 진안, 장수와 함께 무진장으로 불리는 전라북도의 산간오지다. 그런 무주에서도 구천동은 우리나라 산골의 진수를 보여주는 곳이다. 북한의 삼수갑산과 함께 무주 구천동은 깊은 산골의 대명사다.
구천동은 옛날 구천둔(九千屯)이라고 했다. 둔(屯)이란 험한 곳을 의미하는 글자다. 구천동에 관한 지명은 조선 연산군 때 영남 사림을 대표하는 유림의 한 사람이었던 갈천 임훈(1501~1584)의 기록에 처음 나타난다.
임훈이 덕유산을 오른 후 쓴 ‘등덕유산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峰記)’에 구천둔이란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미수 허목(1595~1682)는 ‘덕유산기’에서 돌무더기가 수없이 많은 곳이라 뜻의 구천뢰(九千磊)로 표기했다.
다시 명재 윤증(1629~1724)의‘유광로산행기(遊匡蘆山行記)’에서 구천동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 계곡의 명칭이 이때 이후로 구천동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명칭들은 모두 구천동의 깊은 산골을 의미하는 뜻이 담겨있는 이름이다.
구천동 계곡은 깊다. 그야말로 심산유곡이다. 구천동 계곡은 깊은 산골의 물줄기를 따라 구절양장(九折羊腸)으로 굽이굽이를 이루고 있다. 이 계곡을 따라 흘러가는 원당천은 무주와 무풍 사이를 흐르면서 금강의 지류인 남대천으로 흘러간다. 무려 그 길이가 30㎞에 이르는 계곡이다. 그 옛날 신라와 백제의 경계였던 라제통문이 위치한 설천면 소천리에서부터 삼공리를 지나 덕유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계곡이 바로 구천동 계곡이다.
이처럼 길게 형성된 구천동 계곡은 굽이치는 물과 깎아지른 석벽, 울창한 송림이 곳곳에 위치하여 수없이 많은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천동 계곡에는 이와 같은 아름다운 경승을 의미하는 여러 가지 명칭과 수식이 수없이 붙여져 있다.

일사대 주변 지역은 국가지정 명승지 제55호이다.
그러나 무주의 자랑은 기암괴석이 절벽을 이루고 병풍처럼 세워져 마치 금강산과 같다고 하여 '소금강(小金剛)' 이라 불리우는 무주 구천동 일사대, 파회 일원일 것이다.
조선 고종 때의 유학자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이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은거하면서, 서벽정(棲碧亭,고종 병술,1886)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면서 이 계곡에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무계구곡(武溪九曲)'을 설정하여 돌아가실 때까지 이곳에서 거처했다.
연재는 우암 송시열의 9대손으로 집안의 학문을 이은 유림으로 고종의 스승을 지내기도 한 유학자였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춘추대의의 선비정신을 굳건히 지녔던 연재는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통탄하고, 1897년(丁酉) 4월 무주군수 조병유 등을 서벽정에 초청하여 강회를 여는 등, 강회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그 이후로 을사늑약이 성립된 뒤까지 수없이 상소를 올리며 절의를 지키다 순절한 우국지사다. 계산연원록(溪山淵源錄) 상·하에 따르면 종유록 기정진(奇正鎭), 최익현(崔益鉉)을 비롯 144명, 문생록 수당(守堂) 이덕응(李德應)을 비롯해 1,100명, 급문록 214명, 존모록 1,318명, 사숙록 2,549명이 있다. 무릉도원과 같은 무주에서 역사적 사연을 담고 있는 유림 문화유적의 향기를 음미해 본다.

무계구곡 각자가 있는 은구암(隱龜岩)
은구암은 나제통문에서 2.9km 거리의 구산마을에 있으며, 계류 맞은 편 운장대(雲壯臺)에서 보면 마치 거북 형상의 바위가 숨어 있는 것 같다 하여 이름 붙였다고 하며, 옛날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즐기던 곳이라 하여 강선대(降仙臺)라고도 한다.
이곳에 갑골문자로 각자된 무계구곡(武溪九曲)을 비롯 강선대(降仙臺),상덕계(尙德稧)·한시 2수와 또 한 수, 상덕계 좌측에 두암(斗庵) 김명수(金明秀) 등 42인의 계원 명단이 각자되어 있다.
제2곡 와룡담(臥龍潭)
은구암에서 청금대를 지나 2.4km 정도 물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일사대를 휘어 감고 흐르는 물이 마치 누워있는 용같이 생긴 바위 주변을 맴돌며 담을 이룬다.
제3곡 학소대(鶴巢臺)
와룡담에서 0.6km 지점, 서벽정 동쪽 계곡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던 노송이 있던 명소다.

영인간사오도촌창주(永人間事吾道村滄洲) 각자
제4곡 일사대(一士臺)
일사대는 푸른 바위의 깨끗하고 의연한 모습이 마치 송병선의 기품과 같다고 하였고 또한 동방에 하나밖에 없는 선비라는 뜻의 동방일사(東方一士)라고 이 고장 선비들이 부른 것에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구천동 3대 경승지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수성대(水城臺)라고도 한다. 나제통문에서 6.1km 지점, 서벽정 서쪽에 우뚝 솟은 기암이 배의 돛대 모양을 한 절경이다.
진입부 쌍암(雙巖) 좌측에 무이동(武夷洞) 각자와 맑은 물이 흐르는 원당천 바위에 우암 송시열의 글을 각자한 '인간사를 영원히 버리고 나의 도를 창주에 붙인다(永人間事吾道村滄洲)'가 있고, 계류 건너 소일국(小一局) 바둑판각과 심석재 송병순(宋秉珣) 외 3인의 각자가 있으며, 또 신축(辛丑,1901) 팔월(八月)에 일사대 대암 중간 쯤에 새긴 송병순 외 4인의 각자가 있다. 일사대·서벽정 일원은 국가지정 제55호 명승지이다.
제5곡 함벽소(涵碧沼)
일사대에서 0.4km 지점의 개울가에 있으며, 구천계곡을 누비고 흐르다가 잠시 멈춘 맑은 물에 자락을 드리운 암벽이 거울 같은 옥수를 굽어본다.
제6곡 가의암(可意岩)
함벽소에서 0.3km 지점에 있으며, 마치 다듬어 놓은 듯한 반반한 반석이 층층을 이루고 그 위를 흐르는 맑은 물은 비단폭을 이룬다.
제7곡 추월담(秋月潭)
가의암에서 2km 지점에 위치한 추월담은 깊고 푸른 물 가운데 우뚝한 기암이 오묘하고 가을밤 월색이 소에 담기면 주변을 온통 선경으로 만든다.
제8곡 만조탄(晩釣灘)
추월담에서 0.6km 지점에 있으며, 울창한 수림과 기암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이 개울가 곱게 깔린 자갈밭을 적시면서 여울을 이룬다. 예부터 낚시터로 이름난 만조탄은 석양빛 여울에 낚시를 드리우는 기분이 일품이다. 또한 옛날 구천동에 구천 승려가 살 때 아침 저녁으로 쌀을 씻던 뜨물이 이곳까지 흘러 내렸다 하여 뜸물재라고도 한다.
제9곡 파회(巴洄)
나제통문에서 10.9km 지점에 위치하며 구천동 3대 명소의 하나인데 고요히 잠긴 소(沼)에서 급류가 암석에 부딪치는가 하면 다시 소가 되는 이것이 보기 드문 경관은 선경인양 황홀하기만 하고 길가 큰 바위 위에 노송 한 그루가 서 있어 천년송(千年松)이요, 바위 이름은 천송암으로 신라시대의 일지 대사가 소나무 가지를 꽂은 것이 흙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바위에서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천송암(千松巖), 춘추계원 장구지대(春秋稧員長久之臺), 춘추계원 남정(南亭) 박유성(朴有成)을 비롯한 25인의 호와 이름 등 병오(丙午,1906) 오월(五月)에 새긴 각자가 있다. 파회정(巴洄亭), 파회 일원은 국가지정 제56호 명승지이다.

춘추계장구지대, 춘추계원 각자가 있는 파회 일원은 국가지정 명승지 제56호이다.
무주 태생인 김남관 육군 대령이 1960년대 구천동 관광지 개발에 뜻을 두고 무주 구천동(茂朱九千洞) 33경을 주도적으로 설정하게 되었으며, 구천동 알리는데 헌신한 사람이다.
제1경(나제통문)에서 제14경(수경대)까지는 무계구곡을 바탕으로 하여 외구천동이라 하였으며, 제15경(월하탄)부터 제33경(향적봉)까지 정하여 내구천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1969년 1월21일 무주 구천동이 속한 덕유산이 국민 관광지로 지정되었으며, 1971년 12월1일에 도립공원으로, 1975년 2월 1일에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2009년 9월18일에는 무주 구천동 일사대·서벽정 일원이 명승 제55호로, 파회·수심대 일원이 명승 제56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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