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바위에 새겨진 각자(刻字)에서 역사를 배운다⑨전북 진안 항일 의병장 이석용을 비롯한 우국지사들 ‘호남의병 창의 동맹’ 최초 결성, 마이산 용암(龍岩)을 찾아서

송진모 / 부산시 주재기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진안군은 전북 북동부에 위치해 있으며 남동쪽은 장수군, 북동쪽은 무주군, 서쪽은 완주군, 남서쪽은 임실군, 북쪽은 충청남도 금산군과 각각 접하고 있다. 전체 면적은 789.20㎢이며, 1읍 10면으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진안읍 군하리이다. 군의 동부는 해발 300m의 진안고원이 분포해 있고, 서부는 노령산맥의 주능선인 해발 800~1000m 높이의 산지로서 운장산, 만덕산, 곰티재가 있다.
그리고 이들 고원과 산지의 중앙에 마이산이 있다. 그 밖의 산으로는 부귀산, 성수산, 덕태산, 내동산이 있다. 주자천, 학천, 진안천 등의 하천은 섬진강과 금강의 상류로서 마이산과 활인동 고개가 두 강의 분수계가 된다. 지형적 영향을 받아 겨울에 눈이 많이 온다.
삼국 시대에는 백제의 영토인 난진아현으로 완산주 99현 가운데 하나였으며, 월랑이라고 불렀다. 신라가 백제를 병합한 후 757년(경덕왕16)에는 진안으로 개칭하고 장계군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 건국 초에 진안현은 전주의 속현으로 감무를 두었으며 1313년(충선왕 5)에 용담으로 개칭하고 현령이 파견되었다. 조선이 개국된 후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 개편 당시에 마령현을 통합하여 진안현으로 개칭하고 현감을 두었다. 1895년 전라도 관찰사 아래 26군을 두면서 다시 진안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 3월 일제의 부군 통합에 따라 용담군을 병합, 11개 면을 관할하였다.
진안 마이산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금척(金尺)을 하사 받는 꿈을 꾸었는데 황산대첩 후 귀경길에 마이산에 들러 보니 이곳이 꿈에 본 곳과 흡사했다는 것이다. 금척은 금으로 만든 자(尺)로 왕위의 신표이다. 자는 사물을 재는 자이기에 통치를 상징한다. 마이산 은수사에는 금척을 하사받는 그림을 모신 태극전이 있다. 이러한 구국의 정신을 기리고자 1924년 이산정사 건립을 발의하고, 1925년에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1836∼1905)의 제자들로 구성된‘친친계(親親契)’와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1833∼1906)의 제자들로 구성된‘현현계(賢賢契)’등, 전국의 유림들이 뜻을 같이하여 이곳 마이산 주필대 암벽 옆에 이산정사를 건립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위정척사파의 문신으로 학자이면서 순국지사인 면암 최익현과 연재 송병선이 각각 이 고장을 찾아 머물다 간 적이 있다. 이때 이분들을 흠모하던 이곳의 선비들 중 면암을 따르던 이들이 현현계, 연재를 따르던 이들이 친친계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두 계를 합쳐 이분들을 위한 기념사업을 하기로 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들은 경향 각지의 유림회의 때 이 사업을 알리고 유림의 결의를 거쳐 이산정사를 건립해 두 분의 영정을 봉안하고 그 뒤쪽에는 회덕전을 지어 이태조 제사를 지내게 됐다. 그러나 이때는 일제강점기로 제사를 지내러 몰려드는 선비들의 결사가 두려운 일제는 제사 때마다 방해를 하며 반항하는 선비들을 무자비하게 다루어 옥에 갇히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제삿날을 바꾸어 소수의 제관들이 한 밤중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면서 해방을 맞게 되었다.

이산묘 전경
그 이듬해인 1946년 마이산의 회덕전은 한 고을민이 아닌 온 국민이 우러르며 받들어야 마땅하다는 유림의 동의를 얻어 우리나라를 창건한 단군과 조선 태조, 한글을 창제한 세종 세 분과 고종의 위패와 어진을 회덕전에 모시게 되었다.
고종의 위패는 전주 건지산에 임시로 봉안했던 것을 1948년에 옮겨와 봉안하게 된 것이다. 그 아래 양 사우 중 동쪽 영모사에는 조선 개국 이래 청정한 유림 40위와 서쪽 영광사에는 면암과 연재를 비롯한 을사늑약 이후 순국하신 열사 34위를 모셨다. 이에 성균관의 선비들 의견이 이산사(駬山祠)보다는 한 격 높여 이산묘(駬山廟)라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며 옥도장까지 새겨 보내주어 그대로 부르기로 해서 지금에 이르렀다.
'이산묘' 현판은 1949년 원장으로 선출된 이시영 부통령의 글씨이고, ‘대한광복기념비’휘호는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이며 후면의 비문은 함태영 부통령이 지은 글이다. 이산묘 일원은 조선 건국의 정신과 조선 말 구국항쟁의 중심이 된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다. 이산묘는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에 위치하며, 전라북도 기념물 제120호로 지정되어 있다.

호남의병 창의동맹 용바위 각자
이산묘 진입부에 용암(龍岩)이 있다. 이곳에는 1900년 (庚子) 8월에 새긴 연재 송병선(宋秉璿), 최명호(崔明鎬), 최제국(崔濟國), 이기회(李起晦), 이호용(李浩溶), 한창호(韓昌虎), 최제학(崔濟學), 최설상(崔設相) 문생 등 8명의 각자가 있다.
연재는 1897년(丁酉) 4월 무주 서벽정을 건립 후, 무주군수 조병유 등을 초청하여 강회를 여는 등 제자양성, 강회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1900년 정읍 고암서당 건립, 1901년(辛丑) 4월 전북 임피현(군산) 낙영당 강회 시, 면암 최익현, 송사 기우만, 중기 의병 습재 최제학, 해산 전수용, 정재 이석용 등이 참석한 호남백일장도 개최했다.
그리고 1907년 임실 출신 의병장 정재(靜齋) 이석용(李錫庸,1878∼1914)을 비롯한 우국지사 수백 명이 용암 위에 황단(皇壇)을 쌓고 하늘에 고하는 제사(告天祭)를 올린 후‘호남의병 창의동맹’을 최초로 결성하였던 뜻있는 곳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곧 조선 건국의 정신이 서린 곳에서 쓰러져 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자 의병동맹을 결성하였던 것이다.
용암 바로 뒤 암벽에 1,000여 명의 이름이 있는데 이 각자는 아마도 ‘호남의병 창의동맹’에 참여한 명단으로 보인다.
마이산 일대는 백악기에 형성된 역암으로 모래 알갱이 보다 더 굵은 자갈로 이루어진 암석으로 오랜 시간 퇴적되어 굳어진 퇴적암으로 각자(刻字)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 그래서 이 뜻깊은 우국지사들의 이름을 길이 보전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될 것으로 본다.
또한 이산묘 우측 암벽에 송병선의 문생 허준(許駿)이 새긴 마이동천(馬耳洞天) 각자가 있고, 그 옆에는 공부자탄강 이천사백칠십오년(孔夫子誕降 二千四百七十五年,1924) 갑자(甲子) 3월 연재 송병선의 제자 등이 이산정사 설립을 발의한 후에 새긴 것으로 여겨지는 송병선(宋秉璿), 윤용구(尹用求) 등을 비롯해 66명 이름과 유사 3명의 각자가 있다. 우측에 공부자탄강 이천사백칠십사년(孔夫子誕降 二千四百七十九年,1928) 무진(戊辰) 4월과 7월에 새긴 96인의 각자가 있다.

주필대와 마이동천 각자
그리고 마이동천 우측에 ‘주필대(駐蹕臺)’각자가 있다. 주필대라고 새겨 놓은 것은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 후 머물렀던 곳임을 의미하지만, 나아가 조선 건국의 정신을 각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참고로 주필암(駐蹕巖)이 경기도 남한산성 동문 밖 개울가에도 있다.기해주필 수어사신김종수봉교서(己亥駐蹕 守禦使臣金鍾秀奉敎書)로, 정조가 즉위한 지 3년 되는 1779년 8월에 효종의 영릉에 참배하기 위해 개울가에서 잠시 쉬었는데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것이다.
이산묘 맞은편 충혼의 다리 너머에는 독립유공자추모탑이 세워져 있다. 이 탑 바로 뒤 암벽에 고종의 친필인‘비례물동(非禮勿動)’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본래 이산묘에 ‘비례물동’이라고 쓴 편액이 있었다.‘비례물동’은 『논어』에 나오는 것으로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것인데, 역으로 예라면 행하라는 것으로 고종이 의병 창의를 독려한 글귀라고 할 수 있다.
이산묘에서 250m 위 주차장 옆 계곡 암벽에 새겨놓은‘청구일월 대한건곤(靑丘日月大韓乾坤)’은 백범 김구의 글씨이다.
한편 연재 송병선의 문생 수당(守堂) 이덕응(李德應,1866~1949)은 중종의 아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초)의 11대손이다. 선대는 본래 서울 사직동에 살았는데 7대조 이인한이 6남을 두었는데 가화로 인해 3남 이억이 가족을 이끌고 충청도 가림(嘉林)으로 내려왔다. 이후 수당은 두릉(杜陵)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으며, 1903년 5월 연재의 제자가 됐다. 그는 1909년 경 진안 주천 화양도원을 개원하여 후진을 양성했다. 경술(庚戌,1910)국치로 진안 화양산(華陽山) 정상에 황단(皇壇)을 설단하여 을묘(乙卯,1915)까지는 혼자 북향 망배를 했고, 병진(丙辰,1916)년에 민준식, 조병순, 신기영, 송성기 등이 와서 배우면서 축문을 써서 함께 하기를 청했다. 그 때가 양력 8월 29일이었다. 1918년 삼극단(상제, 공자, 고종)을 설단하고, 1919년(경술) 1월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그때부터 제자들과 함께 화양산에 올라 매월 삭망으로 3년간 백립(白笠)과 상복(喪服)을 갖춰 입고 망곡하였다고 한다.
황단제는 상제, 공자, 고종의 신위를 봉안하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염원하는 제례를 지내는데 이를 말한다. 일제 강점기, 6․25전쟁에도 수당의 며느리 김영기와 후손, 제자들, 황단보존회 등의 정성으로 한해도 궐사(闕祀)하지 않고 100년 넘게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황단은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제20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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