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 東國十八賢의 陞奉從享과 成均館 역사
해방 후 동국십팔현(東國十八賢)의 승봉종향(陞奉從享)과 중국 유현(儒賢)의 위패 매안 문제는 김창숙 등의 주도로 마침내 1949년 6월 전국유림대표자대회의 결의로 통과되었다. 이것은 신생 대한민국의 민족적 자주의식과도 관련되는 문제였다. 그러나 일부 지방에서는 반대하여 주도자인 김창숙을 성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전국 대다수의 향교에서 이를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결의에서는 종래 음력 2·8월 상정일(上丁日)에 거행해 오던 연 2회의 석전을 재정상의 이유로 1회로 줄여 공부자탄강일(孔夫子誕降日)인 음력 8월27일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이와 같이 유림 사회가 분열되자 이를 자각한 각 단체에서는 유림의 대동단결을 위해 하나의 단체로 통합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에 1945년 11월20일부터 6일간 성균관 명륜당에서 남북에서 온 유림 천여 명이 모여 전국유림대회를 개최했다.
이어 12월1일에는 다시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민족고유문화의 근간인 유교도의 혁신 향상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설립재단 완성 등을 촉진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때 위원장으로는 김창숙을 추대했다.
성균관과 유도회의 정비가 이루어지고 유교계의 재편이 일단락된 뒤, 성균관·유도회에서는 대외적으로 유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20여 차례에 걸쳐 유림 연습생을 선발·연수를 하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유림 운동은 큰 좌절을 맞았다. 이어 1952년 김창숙 위원장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하야권고 성명을 발표한 뒤 성균관과 유도회는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점차 분규에 휩싸이게 되었다.
휴전 후 1955년부터는 유도회와 성균관에 정치 세력이 개입하여 전국 유림은 갈피를 못 잡았으며, 수년에 걸쳐 유림의 고질적인 분열상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말았다. 김창숙의 유림계 재편과 성균관대학의 설립은 마지막까지 그 성과를 맺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해방 직후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유도회를 설립하고 성균관을 정비하는 한편, 유학 교육의 중심지로 성균관대학을 설립한 것은 그가 유림계 내에서 항일운동의 중심으로서 백절불굴의 투쟁을 전개한 소산이었다.
李相吉(成均館 部館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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