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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시론

특별기고 - 석전(釋奠)에 대한 단상(斷想)

편집부
2016.05.14·12분 읽기·조회 38

5월14일은 ‘사월 초파일’ 즉 석가탄신일이다. 석가 탄일을 전후해서 서울 중심가에서 대대적인 연등행사가 열리며 세계적인 관광 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 올해도 동국대학교에서부터 조계사까지 신도들이 연등행진을 하고 수백 명의 경찰이 이들의 편의를 봐준다고 한다. 당연히 축하할만한 일이고 뜻 깊은 행사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번 석가탄신일에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축전을 보내기까지 하였다니 다시 의미를 따져서 무엇 하겠는가?

 

그런데 만세사표 (萬世師表) 공자(孔子)의 탄신일이나 석전(釋奠)일의 모습은 어떠한가.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석전 봉행은 늘 주요 일간지의 머리기사를 차지하였다. 심지어 라디오로 생중계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석전이라는 단어도 낯설고 공자탄신일을 아는 대중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석전일은 시행착오 끝에 성균관과 향교가 제각각 다른 날짜에 시행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일부 유림들은 석전일을 2.8 상정일(上丁日)의 전통을 따라야 한다고 하고 일부는 양력(陽曆) 시행일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장에 따라 석전일이 바뀌었으니 혼란도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낯을 들기 어려울 만큼 부끄러울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지면에서나마 석전일 정착과 공자탄신일 국경일 지정을 위한 공론화의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 석전은 동아시아 문명의 결정체이다

 

유교를 통해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대표적 유교 의례가 석전이다. 즉, 석전이야말로 동아시아의 문화적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의식이며 인류가 보존해야 할 세계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석전에 대한 다양한 기록이 있으나 『예기』 등 몇 가지 문헌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예기』 「문왕세자」 편에는 춘하추동(春夏秋冬)으로 4회에 걸쳐 석전을 봉행했다는 기록이 전하며, 한 명제(58~75년) 때 곡부에서 석전을 실시했다는 기록과 『호동백과(互動百科)』의 기록에는 424년에 처음으로 악과 무를 사용하여 공자를 제사했다는 기록 등이 전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달리 석전은 본래 공부자를 모셨던 것은 아니다. 당나라 시대까지는 주공(周公)을 주벽(主壁)으로 모셨다. 오늘날과 같이 석전에서 주공(周公) 대신 공부자로 모시고, 춘하추동 4회에서 2·8 상정 2회로 정착시킨 것은 당나라 정관(貞觀:628년) 연간에 방현령(房玄齡)의 건의에 따른 것이다.

 

이후 청나라에 이르러 2·8 상정일은 국가제사를 지내는 날로, 5월과 11월의 상정일에는 집안 제사를 지내는 날로 정착되었다. 청나라가 망한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 정제(丁祭)를 폐지되었다. 1934년부터 1년에 단 1회, 음력 8월27일을 석전일로 지정[공부자 탄강일]하게 된다. 그나마도 공산화 이후 1949년~2003년에는 석전이 폐지되었다. 다행스럽게 2004년 양력 9월28일[공부자 탄강일을 양력으로 환산]을 석전일로 제정하여 석전이 부활하게 되었다. 늦게나마 공자와 유교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중국 공산당의 결정에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게 된다.

 

우리 민족은 일찍이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태학을 설립하여 유교를 중요한 국가 정치 이념으로 활용하였다. 태학지에 의하면 신라의 김춘추가 당나라에 가서 석전을 참관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조선 태조 7년(1398년) 숭교방(崇敎坊)에 성균관을 설치하여 유교 이념의 인재를 양성하게 된다. 성균관의 설립은 유교의례인 석전의 정기적인 시행을 의미한다. 이후 일제 강점기인 1937년부터는 양력 4월과 10월의 15일에 석전을 봉행하였다.

 

지난 2007년 성균관에서는 5월11일(忌辰日을 양력으로 환산)과 9월28일(誕降日 양력환산)을 석전봉행일로 공포하였다. 양력이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나름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양력 석전일은 지난 2014년 성균관장에 의해서 다시 2·8 상정으로 바뀌었다. 불과 6~7년 만에 유교의 가장 중요한 상징일이 바뀌었으며 그 과정에서 충분한 논의 과정이 없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 석전의 정일(丁日)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석전은 일정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이와 관련하여 문헌을 통해서 석전을 정일에 지내게 된 연유를 유추해 보고자 한다.

 

『예기』 「제통(祭統)」편에서는 “일정한 때가 없이 제사하는 것을 전(奠)이라 한다”고 하였고, 『반궁예악전서』에서는 “일정한 때가 없이 제사하는 것을 석전(釋奠)이라 한다.[非時而祭曰釋奠]”고 하였으며, 또한 “송나라 초기에는 상정일에는 동서(東序)에서 석전을 봉행했고, 상무일에는 서서(西序)에서 석전을 봉행했다” 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원래의 석전은 일정한 날짜가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주역』 「손괘」에 선갑삼일 후갑삼일 선경삼일 후경삼일[先甲三日後甲三日 先庚三日後庚三日]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주자는 “선갑삼일 후갑삼일을 갑보다 앞선 3일간[신, 임, 계]과 갑보다 뒤진 3일간[을, 병, 정]으로 풀이하고, 선경삼일 후경삼일은 경보다 앞선 3일간[정, 무, 기]과 경보다 뒤진 3일간[신, 임, 계]으로 풀이하여, 제사에 임하는 앞뒤로 도합 6일 동안을 삼가고 조심해야 된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주자의 정통 해석과는 달리 요즘 유림들은 선갑삼일을 갑보다 3일 앞선 신일(辛日)이라 하고, 후갑삼일을 갑보다 3일 뒤진 정일(丁日)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일(辛日) 또는 정일(丁日)이라고 하여 하루를 딱 꼬집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앞뒤로 6일간을 말씀하신 주자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석전만이 정제(丁祭)인가

 

정제(丁祭)는 대부분의 인귀(人鬼)에게 모시는 제사의 전형(典型)이다. 다음은 정일을 근거로 한 제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① “사맹월(四孟月)에 종묘·사직(社稷)에 제향한다.” 『국조오례의』 「서례」

 

② “맹춘(孟春)의 하순 초에 중월(仲月)의 삼순(三旬) 중 각각 하루를 택하는데 정일(丁日)이나 혹은 해일(亥日)로 한다.” 『주자가례』 <사시제>

 

③ 유창(劉敞)이 말했다. “정사(丁巳)와 정해(丁亥) 모두 정(丁)을 취하는 것은 경일 전 삼일〔先庚三日〕과 갑일 뒤 삼일〔後甲三日〕이기 때문이다. 대개 교제(郊祭)는 신일(辛日)을 점치고, 사제(社祭)는 갑일(甲日)을 점치며, 종묘제(宗廟祭)는 정일(丁日)을 점치고, 해일(亥日)을 취함이 없다. 『상변통고』 <주자가례의 사시제에 관한 설명>

 

④ “사시제(四時祭)는 날을 점치는 의식을 하지 않고, 다만 상정(上丁)에 지내도 됩니까?” 하는 질문에 퇴계께서는 “지금은 모두 상정에 지낸다.”라고 대답하셨다. (問四時之祭不行卜日之儀 只用上丁可否 退溪曰 今皆用上丁)『상변통고』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석전만이 정제였던 것은 아니다. 종묘와 사가(私家)의 사당에서 모시는 대부분의 제사가 모두 정제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성호 이익 선생과 연경재 성해응 선생은 달리 설명하고 있다. 즉 정일을 고집할 필요 없이 유일(柔日)에만 모시면 된다고 일축하였다.

 

그런데 이미 사당이 없어진 일반 가정에서 춘하추동에 모시던 정제는 사당과 함께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많은 수의 서원 역시 정일제사가 주말로 바뀐 지 오래다. 주지하다시피 종묘대제 또한 정제는 오래 전에 사라지고 5월의 주말에 한 번 시행하고 있다.

 

대제(大祭)도 바뀐 마당에 유독 유림들이 중제(中祭)인 석전에 정제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근거 중 하나는 심산 김창숙 선생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해방 후 심산 김창숙 선생은 유림대회를 통하여 2·8상정일에 모시던 석전을 중국의 예를 쫓아 공부자 탄강일인 음력 8월27일 1회로 바꾸고, 성균관과 모든 향교에서 25위[5성과 송조 2현, 아국 18현]만 모시고 나머지는 매안(埋安)하였다. 당시 일제에 협조했던 이른바 부유(腐儒)들은 친일(親日)의 원죄가 있어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후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정권을 등에 업은 세력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성균관을 되찾기 위해 주장한 것이 소위 2·8상정의 부활과 매안한 위패의 복원이었다. 이 또한 허울뿐인 복원이다 보니 133위 모두를 복원한 것이 아니라 39위의 복원에 머물렀다. 이러한 주장을 했던 무리들의 행적을 볼 때, 그들이 주장한 2·8상정과 매안한 위패의 원상복구가 모성지심(慕聖之心)에 근본 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지금도 25위를 모시고 있는 향교들은 당시 이○세 일파의 복원에 동조하지 않은 향교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고 중국의 예를 쫓은 심산의 결정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이후 성균관은 2006년 유림 총회에 의하여 춘추기 석전을 기존의 2·8 상정에서 공부자 탄강일인 양력 9월 28일과 기신일인 5월 11일로 시행하되 3년간의 유예기간을 갖기로 했다. 그러나 이후에 제대로 된 후속조치는 전혀 없었다. 서정기 관장이 취임한 후, 2·8 상정으로 환원하였다. 그러나 환원할 당시 유림총회를 통해 제대로 된 유림들의 의견을 경청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동안 이렇게 수장(首長)이나 특정한 세력들에 의해서 석전일자가 좌지우지되다보니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제는 이러한 혼란을 종식시키고 유림의 단결된 모습을 보여줄 때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음을 인지하여야 한다. 이에 본 지면을 통해 석전 일자에 대한 이원화를 제안하고자 한다. 본 입장에 대한 유림 제위의 의론과 질정을 당부하고자 한다.

 

◆ 석전 제향일시 개선을 고민한다

 

올해의 석전도 향교와 성균관이 일치되게 시행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지방 향교는 2·8 상정에 봉행하고, 중앙인 성균관은 5월11일과 9월28일로 분리 운영하는 것도 검토해 볼 수 있다.

 

이원화를 주장하는 근거는 지방 향교는 정제의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우리 유교의 오랜 전통을 확고히 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성균관은 양력을 고수함으로써 국가적 행사로 승화시켜 국민적 참여와 유교에 대한 인식 제고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성균관의 석전 봉행일에는 전 유림이 유건도포를 갖춰 입고 상경(上京)하여 유림의 단합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유교의 부흥을 꾀하는 자리로 만들어야 한다.

 

이 밖에 석전을 전후하여 유림들은 한시 백일장(白日場), 성독(聲讀) 등의 전통 행사를 실시하고, 대중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 공부자 탄강일을 국경일로 지정해야 한다

 

유림들의 숙원(宿願)은 공부자 탄강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것이다. 서세동점의 격랑(激浪) 속에서 서양에서 전래된 기독교의 예수탄일은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인류의 사표이신 공부자 탄강일은 국경일로 지정되지 않았다. 이제라도 유림들이 합심하여 공부자 탄강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타종교가 서울의 중심에서 행사를 하는데 유교가 못하라는 법은 어디 있는가? 유건과 도포를 단정하게 차려 입은 유림 5,000여 명과 각종 행사에 참여한 일반인들 1,000여 명이 경건하게 석전을 봉행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각 정당의 대표자들이 종단을 방문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정당의 대표자도 성균관을 방문했다는 뉴스를 보지 못했다. 이것은 이번만의 일이 아니라 매번 반복되는 일인 것이다. 1년에 두 번 유림이 모두 모인 성대한 석전을 성균관에서 봉행한다면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 또한 미구(未久)에 해결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방동민/석전이수자 · 김학경/문양서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