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더위를 이겼던 선조의 지혜"조상들 냉방기 없이 무더위와 대결하다"
임금에서 선비와 백성까지 예외 없던 한판 승부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던 시절 우리 선비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더위와 싸웠다. 인공적인 바람을 이용할 수 없던 상황에서 무더위를 이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탁 트인 공간에서 한가롭게 자연풍을 맞으며 더위에 지친 몸을 식히고 여유를 즐기는 것이었다.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면 선비들은 스스럼없이 계곡과 산중에 있는 절을 찾았고 왕은 궁안에서 바람이 잘 통하는 서늘한 곳을 찾아 더위를 피했다.
임금 궁에서 더위를 피하다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던 왕은 주로 궁 안에서 피서했다.
『조선왕조실록』은 곳곳에서 "경복궁으로 행차하였는데 피서 때문이었다.(태종 13년 6월 2일 기유)"와 같은 임금의 피서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날 태종은 경회루에서 더위를 피하고 당일로 다시 창덕궁으로 환궁한 것으로 실록에 기록돼 있다.
한편 조선의 왕들은 무더위가 시작되기 전인 음력 4월에 여름 절기를 맞이하는 제사인 ‘하향대제(夏享大祭)’를 종묘에서 올리며 무더위를 맞는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대부분 조선의 임금들이 이렇듯 소박하게 피서를 즐긴데 반해 화려하게 피서를 즐긴 임금도 있었으니 조선조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꼽히는 연산군이다.
연산 11년 6월 12일자 『연산군일기』는 연산의 피서계획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보여준다.
이날 연산군은 “후원(後苑)에 대(臺)를 쌓는 것은 피서(避暑)를 위함이니, 피서하는 곳은 모름지기 트이고 명랑하여야 하며 좁고 막혀서는 안 된다. 예로부터 임금에게는 다 피서하는 곳이 있었으니, 7월 7일 장생전(長生殿)이란 따위가 이것이다. 옛적에 ‘대(臺)와 못과 새와 짐승이 있을지라도 어찌 홀로 즐길 수 있으랴’ 하였거니와 이제 국가가 태평하여 만백성이 다 즐거우니 대를 지어서 피서함이 곧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 하는 것이요, 경궁(瓊宮)·요대(瑤臺)의 유(類)는 아니거늘 변변치 못한 사람이 대·못·새·짐승이라고 말한다면 옳겠는가. 또 대를 쌓는 것은 큰일인데 일꾼이 적으면 오래도록 준공하지 못하리니 가을에 가서 다시 3천인을 더하여 독촉해서 일하게 하면 빨리 완성할 수 있으리라. 옛적에 ‘여러 백성이 자식처럼 와서 얼마 안 되어 이룩하였다’ 하였으니 이렇게 한다면 거의 될 것이다”라고 하교한다.
당시 연산이 수천 명을 동원해 세웠던 대는 서총대(瑞葱臺)로 창경궁(昌慶宮) 안에 있던 석축(石築)의 대이다. 연산은 크게 석대를 쌓고 그 앞에는 배를 띄울 수 있는 큰 못을 파는 대대적인 공사를 벌일 때 많은 감역관을 두어 독역했다. 당시 감역관 중 일부는 중종반정 이후 백성을 혹사시켰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기도 한다. 지금은 사라진 서총대는 높이가 수십 길이며 넓기도 높이와 맞먹었다고 전한다. 굽어진 원(院)과 강이 강물을 내려다보아 극히 사치스럽고 교묘했었다고 한다.
선비 찬물에 발 담그고 몸과 마음을 식히다
임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절과 산으로 자유롭게 더위를 피해 다녔던 선비들이 주로 했던 피서법은 탁족이다. 탁족은 신체노출을 꺼렸던 선비들의 최선의 피서법이었다.
탁족이라는 용어는 『맹자』의 “창랑의 물이 맑음이여 나의 갓끈을 씻으리라. 창랑의 물이 흐림이여 나의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한 구절에서 취한 것이다.
탁족은 단순히 발을 차가운 계곡물에 담근다는 행위를 넘는 정신 수양의 방법이었다. 선비들은 산간 계곡에서 탁족을 함으로써 마음을 깨끗하게 씻었던 것이다. 최북을 비롯한 문인과 화가들은 탁족에 관한 많은 그림을 전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탁족도가 북송 때부터 화제로서 자주 등장하였으며 우리나라서는 조선 중기를 전후하여 주로 그려졌다.
계곡을 찾을 여유가 없으면 대야에 물을 떠놓고 즐기기도 했으니 이를 세족이라 한다.
산사로 가서 맑은 공기 속에 독서를 하는 것도 선비들의 주요한 피서법이었다. 실록은 조선초에 목은 이색이 신륵사에 피서를 갔다 졸했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동학사는 선비들이 모여 글을 고치거나 교정하는 학문의 장소로도 유명했다.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는 선비들에게 한여름 산사는 피서지이자 공부방이었던 것이다.
백성들 먹을거리와 피서를 함께하다
탁족과 함께 주로 했던 것이 천렵(川獵)이다. 단백질 섭취가 부족했던 시절 천렵은 탁족을 하기 위해 계곡을 찾은 선비들은 물론 더위를 피해 산을 찾은 일반 백성들에게 먹을거리를 확보하고 놀이와 함께 휴식을 함께할 수 있는 최고의 피서법이었다.
천렵은 말 그대로 냇물이나 강가에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으며 헤엄도 치고, 또 잡은 고기는 솥을 걸어 놓고 매운탕을 끓여 먹으며 하루를 즐기는 것이다.
양반 체면에 물놀이를 제대로 할 수 없던 선비들은 하인들에게 천렵을 시키고 자신들은 탁족을 하며 지켜보았을 것이다. 천렵할 때는 바람이 조금씩 불어야 고기가 잘 잡힌다고 하니 바람도 쐬고 고기도 잡고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다.
정학유의 농가월령가는 4월령에서 아래와 같이 천렵을 노래하고 있다.
"앞내에 물이 주니/천렵을 하여보세/해 길고 잔풍(殘風)하니/오늘 놀이 잘 되겠다/벽계수 백사장을/굽이굽이 찾아가니/수단화(水丹花) 늦은 꽃은/봄빛이 남았구나/촉고(數罟)를 둘러치고/은린옥척(銀鱗玉尺) 후려내어/반석(磐石)에 노구 걸고/솟구쳐 끓여내니/팔진미(八珍味) 오후청(五候鯖)을/이 맛과 바꿀쏘냐.”
천렵은 굳이 한여름에만 했던 놀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 천렵은 무더위에 해야 제멋이다.
이홍익 / 성균관유도회 서울시본부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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