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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시론

<李玄崗의 泮中雜詠>건국절 논란을 생각해 본다

편집부
2016.09.09·8분 읽기·조회 20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 집결한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각도 대표 29명으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해 임시헌장안을 통과시켰고, 그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이 조항은 왕정이 아닌 어떤 정치체제도 경험한 일이 없는 당시 한국인에게는 혁명적 대전환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그럼에도 임시의정원 의원 전원이 이를 아무 이견 없이 만장일치로 가결했다는 점에서도 놀라움을 안겨 준다.

당시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미국에서, 백암 박은식 선생은 북만주에서,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은 국내에서 왔다. 파리장서를 우송한 후 상해에 체재하고 있던 심산 김창숙 선생은 이들과 회합을 가지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협의했고, 임시의정원에서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했다.

이때 임시의정원이 제정 공포한 최초의 헌법 ‘대한민국 임시헌장’에는 그 모두에 전문에 해당하는 ‘임시헌장선포문’이 붙어 있었다.

“神人一致로 中外 協應하여 漢城에서 起義한 지 三十有餘日에 平和的 獨立을 三百餘州에 光復하고, 國民의 信任으로 완전히 다시 조직한 臨時政府는 恒久 完全한 自主獨立의 福利로 我子孫藜民에게 世傳키 위하여 臨時議政院의 決議로 臨時憲章을 宣布하노라.”

이어 1948년 5월 31일 당시 초대국회의장으로 당선된 이승만은 국회 개회식에서 “이 民國은 기미년 3월 1일에 우리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독립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오늘 여기서 열리는 국회는 즉 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이니 … 민국년호는 기미년에서 起算할 것이오 이 국회는 전 민족을 대표한 국회이며 이 국회에서 탄생되는 민국정부는 완전한 한국 전체를 대표한 중앙정부임을 이에 또한 공포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여 대한민국 국회가 임시정부를 계승하고 있음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1948년 헌법에는 “대한민국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규정돼 있으며, 1948년 9월1일 대한민국 관보 1호에는 연호를 ‘대한민국 30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987년 제정된 현행 헌법 전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이라고 돼 있다.

임시헌장과 헌법 조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19년에 대한민국은 건국되었고 1948년에 재건돼 정부수립을 했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라 할 수 있고 그것이 자연스럽다. 지난 70년간 일부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지금처럼 논란이 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최근 일부 학자들과 정치인들이 이 같은 일반적 인식을 부정하고 건국절 법제화 운운하면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사실 건국절 논란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임시정부의 법통이나 정통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평가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임시정부의 법통이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이들은 국가구성 요소 등 ‘실정’ 국제법의 틀을 고집해 대한제국은 1910년에 소멸했고 1948년에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수립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너무도 형식적인 논리에 치우친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제헌헌법과 현행 헌법의 전문은 임시정부를 현재 대한민국의 정통정부였던 것으로 인정하는 국민의 의시표시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임시정부의 법통과 정통성을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주장은 크게 논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유력 정치인들과 학자들에 의해 임시정부의 법통과 정통성을 부정하는 건국절 법제화 주장까지 나오다보니 예전과는 논란의 정도가 크게 다르게 됐다.

그 논란의 중심에 있는 류석춘 연세대 교수(전 이승만연구원장)는 최근 “일부 이상한 사람들이 1919년 건국설을 주장한다”며 “부모가 눈이 맞아 연애를 하고 사귀다가 거사를 치르고 자궁에 정자가 자리를 잡고 일정 기간이 지나 태어나야 그날이 생일인데 1919년은 임신한 날일 수도 있고 연애를 한 날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류 교수로 인해 “1919년에 대한민국은 건국되었고 1948년 재건돼 정부수립을 했다”는 일반적 인식은 졸지에 이상한 사람들의 생각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류 교수의 비유에 따르더라도 어머니 뱃속에 있던 태아를 ‘임시정부’라고 하고 태어난 신생아를 1948년에 수립된 정부라고 한다면, 잉태되어 뱃속에 있던 태아와 태어난 신생아가 동일한 ‘나’일텐데 그것을 다르다고 하니 그야말로 이상한 얘기가 되고 만다. 비유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이 같은 류 교수의 비유는 임시정부를 씨앗에 비유하고 1948년에 수립된 정부를 그 씨앗이 만개한 것이라며 임시정부의 법통과 정통성을 인정한 ‘씨앗론’을 잘못 변형한 것이라 보인다.

또 류 교수는 유력 일간지에 ‘대한민국 건국 = 항일 + 반공’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한 적이 있다. 류 교수는 ‘항일’과 ‘반공’이라는 두 가지 힘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할 수 있었고, 반공을 뺀 항일만으로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절대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부터 23년 전인 1993년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은 ‘대한민국 뿌리는 광복→반탁→반공이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이 글의 내용은 류 교수의 글과 맥락이 동일하다.

이 같은 주장들은 1945년 이후 전개된 남북 분단 상황을 과거인 1919년으로 확장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들은 백범 김구 선생이 단정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독립에 큰 기여는 했지만 대한민국 건국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같은 논리는 반대로 단정에 협력한 친일파는 대한민국 수립의 공로자가 돼버린다는 점에서 ‘건국절 법제화는 친일세력에게 그 죄과의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고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류 교수는 “6·25 전쟁으로 상징되는 이념 대립이 1919년 당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이념을 따지지 말고 합작해서 대한민국을 독립시켜보자는 생각으로 모인 것이고 48년으로 가면서 중국 소련 국적 가진 사람들은 남한보다 북한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즉 1919년을 건국일로 삼을 경우, 남북한이 모두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에 남한만이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1948년을 건국절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북한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무시한다. 일제 침략 중 김일성이 이끌어 온 빨치산 투쟁, 즉 김일성의 타도 제국주의 동맹 건설, 보천보 전투 등 항일무장투쟁이 조국 해방의 원동력이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1919년을 건국일로 삼을 경우 남북한이 모두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류 교수 주장은 이 같은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북한은 결코 정통성을 주장할 수 없다.

‘건국절 법제화’ 주장은 논리면에서나 내용면에서 아주 거칠다. 그 때문에 도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이런 논란을 일으키느냐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혹여 이를 이슈화해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제라도 그만두는 게 낫다.

이상호 /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