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유림시론

홍주향교 안병찬 전 전교의 나라사랑정신, 항일의병활동과 파리장서 운동

충남의병기념관 건림 추진에 즈음한 특별기고

안병주 기자
2022.08.20·10분 읽기·조회 41

오늘의 번영은 어제와 이어지고 지난날의 역사와의 끊임없는 대화(對話)속에 그 맥을 같이 한다. 우리의 선열들의 위대한 사적은 후인의 정신적 교훈이 되기도 한다.

 

홍성은 자타가 공인하는 충절의 고장이다.

 

충절의 지사들은 모두가 국가의 위난이 닥쳤거나 불의와 맞서 싸워야 할 때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절의와 충절을 위하여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대쪽 같은 성품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인들의 위대한 사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적 정신적 교훈이 되기도 한다.

 

공자가 「춘추」를 집필하여 밝히고자 하였던 선악 판단의 대의명분과 같은 것이다. 춘추에 나타난 대의(大義)는 개인적 윤리차원을 넘어 자신의 삶에 투영하고 이를 위하여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대의(大義)의 자세를 가지고자 하였다. 의(義)는 그 자체가 선이기 때문에 무조건 지켜야 할 도덕적 명령으로서 정언명령의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도덕적 정당성으로 올바름을 추구하는 적극적 실천 의지이다.

 

충남의병기념관 건립추진에 즈음하여 나라사랑 정신으로 의병활동을 한 충의열사를 소개하려 한다.

 

그중에서도 호국의병을 이끈 안병찬 홍주향교 전 전교가 대표적인 충절의 인물에 속한다. 이는 자신이 응당 행하여야 할 의무로서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놓을 수 있는 선비와 지사로서의 자세를 지니신 분이다. 나아가 옳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 정신과 저항 의식이 가슴 속에 항시 담고 있었다. 그것은 비판이나 저항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도(正道)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세기 들어와서 홍주유림의 가장 중요한 활동을 해온 안병찬 전교는 나라사랑 정신으로서 1906년 홍주성전투, 그리고 3. 1 운동 때에 전개된 파리장서운동의 주역 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 본격화된 일본의 침략에 우리 민족은 강력하고 끈질기게 독립투쟁을 전개하였고, 특히 유림들은 조선왕조의 왕통과 민족의 전통 수호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다양하게 일본의 만행에 맞서서 저항하였다.

 

안병찬 전교는 안창식의 장자로 1854년 홍주(현재 청양) 화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여  세상과 구차하게 타협하지 않았으며, 매번 책을 읽을 때마다 옛 사람의 절의를 지키다 죽은 대목에 이르면 반드시 무릎을 치면서 탄식하고 “대장부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된다”라고 한 것은 그의 절의 정신을 대변하고 있다.

 

안병찬은 1894년 홍주향교 교임(校任)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이승우( 李勝宇)와 함께 민요(民擾)를 평정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향약을 창설하고 강화를 열어 향리( 鄕里)를 교화시키는 한편 주자학 질서를 지키고자 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충청도 방면에서 제일 먼저 의거의 깃발을 올린 것은 충남 홍주에서였다. 안병찬은 청양 화성 이인영의 집에서 향회를 열어 홍주일대 100여 명의 유생들이 모였다. 이 향회에서 군사 활동을 집행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80여 명의 의병이 결집되었다. 다음날 안병찬과 채광묵이 이 부대를 안솔하여 홍주성에 제일 먼저 입성하였다.

 

안병찬이 먼저 들어가서 이승우를 설득시키는 한편 일부 인사들이 관청에 호소할 일이있다고 하면서 바로 들어가 참사관 함인학, 경무관 강호선 등을 체포하고 창의의 깃발을 조양문(朝陽門)위에 높이 날리니  형세는 이미 결정되었다. 관찰사 이승우는 할 수 없이 홍주 목사 겸 창의대장을 자원하고 각 고을 각 포구에 공문을 보내여 창의의 뜻을 밝혔다.

 

안병찬은 1895년 12월3일 홍주관아 17군과 본부 27면에 통문을 띄워 독자나 노약호(老弱戶)를 죄외하고는 매 호에서 군사 한 명씩을 내개 하였다. 이어서 각 부서 작전계획을 세웠다.

 

의병들은 12월3일 홍주부대내 창의소를 설치하여 김복한을 총수로 추대하고 안병찬은 김복한과 함께 창의소에서 의병을 지휘 하였다. 그러나 창의소를 설치한 지  하루 만인 12월4일 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안병찬을 비롯하여 김복한,이설, 홍건,송병직,이상인 등 23명을 구속하였다.

 

안병찬은 구속된 12월4일 저녁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을 기도하였다. 그는 구차하게 살 수 없어 자결하려던 네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이미 대의를 짚고 그 의리를 팔도에 펴고, 종묘사직을 지키고, 사문(斯文)을 호위하려 했는데 분패하여 통분한 마음 그지없으며, 또 관찰사의 배신은 단지 죽음이 두려워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사문(斯文)이라 함은 유교(儒敎)의 도의나 또는 문화를 일컫는 말로 유학자는 불의에 사는 것보다 차라리 한번 죽어서 변질자로 하여금 부끄러워할 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뭇 소인배들에게 체포되었으므로 삭발을 면할 도리가 없으니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삭발을 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머리를 온전히 하고 죽는 것이 낫다.

 

셋째, 전후에 걸친 의거의 계획은 죄다, 가친의 가르침이며, 또 지위(知委)이니 향당과 이웃사람들이 다 함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읍내 사람들도 다 알고 있으니 가친도 또 체포를 면할 수 없다. 내가 죽으면 가친이 연루를 면할 것이다.

 

넷째, 체포된 뒤 뭇 소인들의 꾸지짖도, 욕함이 끝이 없으니,곤궁을 당하고 사는 것보다는 눈을 감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만 못하다.

 

즉 관찰사 이승우의 변절, 삭발문제, 자신이 죽고 가친을 보호하려는 효심, 소인들의 무례함 등에 통분하여 죽음으로 대응하려고 한 것이다.

 

드디어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날카롭게 갈아서 스스로 목을 찔렀더니 선혈이 낭자했다. 임승주의 극진한 간호로 다음날 새벽에 깨어난 안병찬은 문종이를 찢어서 상처에서 난 피로 혈서(血書)를 지어 홍주 관찰사 이승우(李勝宇)에게 보냈다.

 

지사는 구렁에 처할 마음가짐 잊지 않고        志士不忘在溝壑

 

용사는 목숨 버릴 각오 잊지 않네                 勇士不忘喪其元

 

차라리 머리 잘린 귀신이 될지언정               寧作斷頭鬼

 

머리 깎는 사람 되지 않으리                        不作削髮人

 

의리에 죽으니 무엇을 한하랴                     死義何恨

 

다만 노친이 계시는데                              惟恨老親在堂

 

끝까지 봉양 못하니 그것이 한이로다.           未克終養

 


 

안병찬은 옥중에서 임승주가 주는 미즙을 먹었지만 목에 난 상처구멍으로 새어나오고 구멍을 통하여 잔기침도 나오므로 한 표주박의 물도 누워서 받아 마셨다. 지극히 추운 계절에 냉돌에 처해 있으니 바록 건겅하고 무병한 사람이라도 견뎌내지 못하는 곤혹을 치렀다. 홍주의병애 체포되어 구금된 안병찬은 심문에서 의거(義擧)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1896년 3월20일 안병찬의 고등재판소의 공사(供辭)』

 

「나는 시골에 살면서 책을 읽어 의리(義理)에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작년 8월에 있었던 國變〔명성황후 시해〕 이후로 고통스런 마음을 머금고 궁하게 살면서 스스로 부르짓어 울음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런데 12월에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졌으니 사람과 짐승의 구분도 없고, 문화인과 오랑캐의 구별도 없어졌습니다. 내가 바록 우매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일들이 흉당의 협박과 강요에서 나왔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김복한(金福漢)등과 더불어 의거(義擧)를 일으키기로 합의하였으니 이것은 옛날에도 일대 의리이며 지금에 있어서도 일대 의리입니다. 살아서도 의리이며 죽어서도 의리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을 성토하고 보복하려 하였는데 성사도 하기 전에 실패로 돌아가서 홍주부(洪州府)에 체포되었으니, 그날이 바로 흉역배가 일을 꾸민 날이었습니다.

 

스스로 목을 찔렀으나 죽지 않고 여기에 이르러 오늘날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만 번 죽어도 유한이 없습니다. 달리 더할 말이 없습니다.」

 


 

안병찬은 의거(義擧) 이유로 을미사변을 분통해 하였고 단발령에 화이(華夷)의 구별이 없어졌기 때문에 김복한과 더불어 의거를 일으키기로 하여 의리(義理)를 위해서였다고 진술하였다. 즉 충의정신과 의리정신을 바탕에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을미의병 때 구속되었다가 고종의 특사로 방면된 안병찬은 홍릉주사(洪陵主事)에 제수 되었으나 받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방면 1년 후인 1897년 강회를 개설하고, 50세 때인 1903년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한 홍승헌(洪承憲)에게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숭상하며, 기개와 절의를 존중하는 기풍을 다져가도록 건의하였다.

 

파리장서사건은  1919년 3. 1 운동 때 유림(儒林)이 독립선언에 참여하지 못하자 호서와 영남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에 137명이 서명하여 파리에 발송했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137명중 충남에 연고를 둔 사람은 17명으로 이들은 파리장서 사건 이외도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이다.

 

김복한을 비롯한 안병찬의 파리장서 운동은 일경에 탐지되었으며, 김복한이 8월에 체포 공주 감옥에 구속되는 등 체포되었다. 김복한은 징역 1년형을, 임한주와 안병찬은 징역6개월에 집행유에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안병찬은 5회에 걸쳐 기혹한 옥고를 치루고 그 후에도 일본의, 감찰의 눈이 끊이지 않았으나 향리에 은거, 후학교육에 힘써오다가 1923년 6월2일 7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홍성 지역에는 홍주의병이 순국한 유해를 모신 홍주의사총(洪州義士塚:사적 제431호)과 병오 항일의병기념비, 홍주의병 기념탐 등이 있다. 1949년 부터 매년 6월1일(의병의날)에는 홍주의사총에서 병오 홍주 장사공 순위 제향을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