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필암서원의 우동사(祐東祠)와 청절당(淸節堂)

김윤수 성균관 부관장, 지리산문학관장, 일두기념사업회장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은 세계문화유산이다. 필암서원의 주인공 하서 김인후는 문묘종사 동국십팔현이다. 김인후는 도학자이다. 도학의 최고봉 퇴계 이황의 친구이다. 도학의 연원 도맥상으로도 한훤당 김굉필-정암 조광조-회재 이언적을 이은 영남의 퇴계와 함께 한훤당 김굉필-모재 김안국-하서 김인후-고봉 기대승을 잇는 호남을 대표하는 호남도맥의 정점이다.
필암서원을 참배하면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강당과 사당이 마주 보는 형태이다. 학생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그 사이에 위치한다. 보통 강당 앞에 동서재가 양쪽에 있고 강당 뒤로 사당이 있는 일반적인 서원구조와 다르다. 전학후묘의 양식은 같으나 강당이 사당을 향한 구조가 특이한 것이다.
또 특이한 것은 강당 현판이 많이 게시되어 있는데 시에 대한 현판, 곧 시판(詩板)이 많다는 것이다. 세계문화유산 9개 서원에서 필암서원에 시판이 가장 많이 걸려있다. 필암서원의 시판을 수록한 것이 『필암서원지』의 「청절당제영」이다. 그런데 제영과 시판이 자구가 일치하지 않는 것도 있다.
장성 필암서원의 사당 편액은 우동사(祐東祠)이고, 강당의 편액은 청절당(淸節堂)이다. 이 명칭은 모두 우암 송시열의 문장에서 취한 것이다. 우암은 <하서김선생신도비명(河西金先生神道碑銘)>에서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우사(天佑我東)이라 하였고, 그 청풍대절은 진동하여(至其淸風大節聳動震耀)라고 하였는데, 동춘당이 강당 명칭을 청절당이라고 명명하고 편액 글씨를 써서 게시하였다. 사당은 의중에 없었다.
우동사(祐東祠)
일반적으로 서원에 가면 강당 전면에 서원명칭 편액이 게시되어 있다. 강당명칭 편액은 안쪽에 걸려 있다. 지금 필암서원에 가면 그렇게 되어있다. 강당 전면이 대문을 향하지 않고 사당을 향해 있는 것이 특이할 뿐이다.
서원명인 필암서원 편액은 서원의 일반적인 양식대로 강당 전면에 게시되어 있고 강당인 청절당 편액은 안쪽에 걸려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수십 년밖에 안 된다.
1964년에 사당명칭 우동사 편액이 게시되기 전까진 오늘날과 달랐다. 필암서원 편액은 이전엔 사당에 걸려있었다. 그러면 당연히 사당명의 편액은 없었던 것이다.
1950년대 초에 소장학자 산암 변시연(1922~2006)이 사당명칭을 여러 대학자에게 상의하였다. 보성 죽곡정사(竹谷精舍) 주인 회봉(晦峰) 안규용(安圭容, 1873~1959)은 우동사와 이양사(尼陽祠), 고창 현곡정사(玄谷精舍) 주인 현곡(玄谷) 유영선(柳永善, 1893~1961)과 양재(陽齋) 권순명(權純命, 1891~1974)은 필암사(筆巖祠), 하서 본손 월담(月潭) 김재석(金載石,1895~1971)은 집성사(集成祠)를 제안하였는데 필암사는 서원명칭과 사당명칭이 같을 수 없다는 반대가 있어 최종 우동사가 채택되었다.
1964년에 사당에 우동사 편액이 게시되었다. 그 10여 년 전에 김재석이 사당에 서원 편액이 걸려있는 것은 체면에 어긋나니 강당에 옮겨 걸자고 주장했는데, 박하철(朴夏轍, 1889~?)은 선대에 이미 정한 일을 후학이 감히 망령되이 평가하느냐고 소리 지르며 사당에 게시되어 있던 필암서원 편액은 그대로 두고 옮기지 말자고 반대하였다. 그래도 결국 강당에 옮겨 게시되고 사당편액이 새로이 게시되어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 일반적인, 상식적인, 정상적인 서원편액 게시양상이 비로소 구현된 것이다.
필암서원은 1590년(선조23)에 전라도관찰사 오음 윤두수와 하서의 제자 송강 정철 및 다른 제자들-변성온(卞成溫), 기효간(奇孝諫), 조희문(趙希文), 양자징(梁子澂)-에 의해 건립된 뒤로 1964년까지 무려 370여 년간 사당명 편액은 없었다. 1964년 이전 선비들은 필암서원에 사당 편액이 없는 것을 특별한 거라고 자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서는 1662년(현종3)에 필암서원에 사액되고 7년 뒤에 문정공이란 시호가 내렸다.
동방오현 일두 정여창의 남계서원과 한훤당 김굉필의 도동서원에는 사당의 편액이 없다. 사당명 편액이 없는 것이 무슨 특별한 양상인 것처럼 자랑할 거리는 아니다. 필암서원은 1964년에 소장학자의 노력으로 과감히 사당명 편액이 게시된 뒤로 그것이 정상으로 인식되고 정상적인 면모가 되었으니, 남계서원과 도동서원도 과감히 사당명 편액을 게시할 필요가 있다.
남계서원은 소수서원 문성공묘를 본따 사당명을 시호에서 취하고자 했을 것이다. 서원 창건초에는 일두의 시호가 내리지 않았다, 남계서원 사액이 1566년(명종21)에 이뤄지고 일두에게 문헌공이란 시호가 1575년(선조8)에 윤허, 1577년(선조10)에 내려졌다. 창건자 개암 강익(1523~1567)이 별세하여 시호가 내린 뒤에는 문헌공묘라고 사당명 편액을 게시할 주체가 없었다.
후인들은 남계서원 사당을 지칭할 때 일반적으로 문헌공묘라고 하였다. 남계서원의 두 배향 인물 동계 정온도 배향될 때 남계의 문헌공묘에 승향하다라고 하였고, 개암 강익도 문헌공묘에 동계와 개암을 나란히 배향할 것을 신청하였다고 하였다. 문성공묘를 잇는 문헌공묘이니 사당명으로 적당하다.
문제를 인식한 사람이 주체가 되는 법이다. 지금이라도 남계서원에 문헌공묘라는 사당명 편액을 게시하여 서원의 정상적인 면모를 되찾아야 한다.
청절당(淸節堂)
필암서원 강당인 청절당에는 여러 현판이 걸려있다. 시를 새겨 게시한 현판인 시판(詩板), 글을 새겨 게시한 문판(文板), 시문을 같이 새겨 게시한 시문판(詩文板), 공지사항을 새겨 게시한 공지판(公知板), 건물명을 새겨 게시한 편액(扁額) 등이 있다.
청절당에는 정면에 필암서원 편액, 강당 안쪽에 청절당 편액과 원중집강기, 강수재 강장기, 집사분정기의 공지판, 서원의 기본인 백록동학규를 비롯하여 사제문, 숙종신미 전교, 문묘종사교서, 문묘종사반교문, 고암선생추배시유림상언비답, 필암서원중수기(유사명단), 어제사제문 등의 문판이 걸려있다.
백록동서원학규(白鹿洞書院學䂓) 현판에는 하서의 <독백록동규(讀白鹿洞規)>라는 오언고시가 부각되어 있으니 시문판이라고 하겠다.
시판(詩板)만을 살펴본다. 청절당은 5칸으로 이루어졌다. 동서 양끝 2칸은 방으로 되어있고 가운데 3칸은 대청이다. 그 3칸을 청절당 3자로 명칭을 붙여 구별하고자 한다. 청절당 편액을 기준으로 동쪽 청간, 중간 절간, 서쪽 당간으로 획정한다.
청간에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과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시가 1판에 각자(刻字), 게시되어 있다.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시판 1개 있다. 반환당(盤桓堂) 홍천경(洪千璟, 1553~1632)의 시판은 권석주와 유서경의 시에 대한 차운시가 1판에 각자(刻字), 게시되어 있다. 추담(秋潭) 김우급(金友伋, 1574~1643)의 시판은 유서경의 시에 대한 차운시와 서원 중영청의 제시(題詩)가 1판에 각자(刻字), 게시되어 있다. 일재(一齋)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의 시판 1개 있다. 총 5개 있다.
절간에 서경(西坰) 유근(柳根, 1549~1627),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 온재(韞齋) 김진옥(金鎭玉, 1659~1736)의 시판 등 총 3개 있다.
당간에 초천(苕泉) 김시찬(金時粲, 1700~1766),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3~1767),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시판 등 총 3개 있다.
필암서원을 읊은 시가 수록된 것이 『필암서원지』의 <청절당제영>이다. <청절당제영>에 있는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과 관찰사 민영철(閔泳喆)의 시를 새긴 시판은 청절당에 없다. 일재 어윤중의 시는 <청절당제영>에 수록되지 않았다. 반환당 홍천경의 시는 <청절당제영>과 시판에 있으나 『하서전집』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실수인지 당색 문제로 인한 고의누락인지는 미상이다.
아무튼 필암서원에는 모두 12인의 11개 시판이 청절당에 게시되어 있다. 하서의 시를 붙여 새긴, 부각한 시문판까지 포함하면 모두 13인의 12개 시판이 걸려있다. <청절당제영>에 있으나 청절당에 없는 시판은 복구하여 다시 게시할 필요가 있다.
함양 남계서원의 강당인 명성당에도 옛날에는 시판이 다수 걸려있었다. 지금은 하나도 없다. 체모에 어긋나는 것이다. 분실된 것이다. 어찌 아는가. 남계서원에서 퇴계의 시판 시에 차운하다, 모재의 시판 시에 차운하다, 개암의 시에 차운하다란 시가 있으니, 강당에 게시된 시판을 보고 차운하여 지은 것이다.
함양향교를 읊은 모재 김안국의 칠언절구, 남계서원을 읊은 퇴계 이황의 칠언절구와 개암 강익의 칠언절구가 <일두집>에 실려 있는데 후인의 시는 이에 차운한 것이다. 퇴어당 김진상과 삼주 이정보의 칠언절구는 차운시이고, 화서 김학순의 오언율시는 별본이다. 이 시들도 <일두집>에 실려있다. <남계서원지> 제현시장(諸賢詩章)에도 실려있는데 정작 모재의 시는 누락되었으나 차운의 모본이다.
남계서원에 방문한 선비들이 강당에 앉아 쳐다보면서 차운하여 짓는 견본이 되었던 명현, 명사들의 시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서원의 품격에 손상이 가는 것이다. 이 시들의 시판을 다시 새겨 강당인 명성당에 걸어놓아야 원모를 복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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