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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시론

<특별기고> 개암(介庵)의 일자사(一字師)와 《개암집》의 일자사(一字死)

오흥녕
2023.11.29·9분 읽기·조회 34

 

김윤수 성균관 부관장, 지리산문학관장, 일두기념사업회장

 


 

일자사(一字師)란 한 글자를 바로잡아 준 스승을 가리킨다.

 

《만성통보(萬姓統譜)》에 “양만리(楊萬里)가 ‘진우보(晉于寶)’라고 말하매 한 이서(吏胥)가 ‘간보(干寶)이지, 우보가 아니다’ 하니 양만리는 그 이서를 일자사라 했다” 하는 것과 《오대사보(五代史補)》에 “제기(齊己)의 조매시(早梅詩)에 ‘앞마을 깊이 쌓인 눈 속에[前村深雪裏] 어젯밤에 두어 가지가 피었다[昨夜數枝開]’ 하는 수(數)자를 정곡(鄭谷)이 일지개(一枝開)자로 1자 고쳐주니 제기는 정곡을 일자사라 했다” 하는 고사가 있다.

 

퇴고(推敲)란 말도 일자사와 유사하다.

 

당(唐)나라 때 승려 가도(賈島)가 나귀를 타고 시를 읊다가 “새는 못 속의 나무에 잠들고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鳥宿池中樹 僧敲月下門〕”라는 구절이 생각났는데, 두드릴 ‘고(敲)’ 자가 좋을지, 밀 ‘퇴(推)’ 자가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가 우연히 길에서 만난 한유(韓愈)의 말에 따라 ‘고(敲)’ 자로 결정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퇴고해준 인물이 일자사인 것이다.

 

일자 천금(一字千金)도 다르지 않다.

 

전국 시대 여불위(呂不韋)가 문객을 시켜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짓게 하고 함양(咸陽)의 성문에 공포하기를 “이 책에서 한 글자라도 보태거나 빼는 자가 있으면 천금의 상을 내리겠다” 하였다. 《사기(史記)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 곧 매우 진귀한 시문(詩文)을 뜻한다.

 

일자의 가치가 어찌 꼭 시문을 고치거나 가감하는 것만을 지칭하겠는가. 한 글자로 평생의 교훈으로 삼는 것이 진정한 일자사인 것이다.

 

《논어 위령공》에 자공이 묻기를 “한 마디 말로서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하니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그 서(恕)일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지니라”라고 하였다.

 

서(恕)란 여심(如心)이니, 남의 마음과 같이 행하는 것이다. 남이 일하고 싶으면 같이 일하고 남이 쉬고 싶으면 같이 쉬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남에게도 시키지 않는 것이 서(恕)이다. 종신토록 교훈으로 삼을 만한 한 글자가 아니겠는가.

 

송조육현과 비등한 유현 사마광(시호 온공)도 한 글자를 강조하였다. 《소학 선행》에 유충정공이 온공을 찾아뵙고 마음을 다하여 자기를 행하는 요체로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것을 물으니 온공이 “그 성(誠)일 것이다” 하였다. 유공이 “어느 것을 먼저 행합니까?” 물으니 온공이 “망녕되이 말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라” 하였다.

 

서(恕)니 성(誠)이니 하는 것은 덕목이다. 한 글자의 덕목을 종신 역행의 스승으로 삼는다면 어찌 한 글자 잘 고쳐주는 문학의 일자사에 비할 수 있겠는가. 유교의 일자사가 진정한 일자사인 것이다.

 

한 사람의 일생도 일자사가 있을 것이다. 일자사를 일생의 목표로 삼아 종신토록 역행한다면 어찌 스승의 가르침을 잘 따른 바른 선비가 되지 않겠는가. 그런 바른 선비에 세계문화유산 함양 남계서원 창건주 개암(介庵) 강익(姜翼,1523~1567)이 있다.

 

개암의 한 글자 스승은 무엇이었을까? 필자는 맡길 임자, 맡을 임자, 임(任)이라고 생각한다. 천장강대임어시인야(天將降大任於是人也)의 대임을 자임하는 것이다. 그 대임이란 바로 동방오현 일두 정여창을 제향하며 선비를 육성하는 남계서원의 창건이다. 남계서원을 통하여 사문흥기와 유교창명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은 것<이흥기사문(以興起斯文) 창명유교위기임(倡明儒敎爲己任)>의 책임의식이다. 실상 남계서원의 창건은 개암 혼자만의 공로는 아니다. 남계오현으로 불리는 함양 선비 5인이 모여 의논하고 협력하여 창건한 것이다.

 

남계오현(灆溪五賢)

 

반계(潘溪) 박승원(朴承元)[1516?~1561?] 潘南

 

매촌(梅村) 정복현(鄭復顯)[1521~1591] 瑞山 / 영빈서원

 

사암(徙庵) 노관(盧祼)[1522~1574] 豊川

 

개암(介庵) 강익(姜翼)[1523~1567] 晋州 / 남계서원

 

남계(灆溪) 임희무(林希茂)[1527~1577] 羅州 / 화산서원

 

논의를 모아 군수에게 건의하여 건축비를 받아 강당 건축 공사를 시작하고 협조적인 군수는 전근 가고 비협조적인 군수가 부임하여 공사 재개 못하고 시일을 끌다가 협조적인 다른 군수가 부임하여 지원받아 사당을 건축하여 완공하였다. 1561년(명종16)에 일두를 비로소 제향하고 학생들을 모집하여 강학하였다. 모두 10년이 걸렸다. 그동안 다른 선비들은 죽거나 벼슬하거나 다른 일로 빠지고 끝까지 책임지고 서원 건립을 완성한 이는 개암이다. 그래서 서원 창건주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도 서원창건공신 남계오현은 고루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박승원(朴承元)의 존재와 명예가 《개암집》의 오자 1자 때문에 묻히고 훼멸된 것이다. 이름 1자 오자가 나서 박승원이란 남계서원 창업공신의 존재가 죽어버린 것이다. 엉뚱한 사람이 다른 이름으로 행세하는 것이다. 가짜 옹고집은 이름과 용모가 똑같은 존재지만 여기 박승원의 오자로 탄생한 인물 박승임(朴承任)은 실존 인물로 다른 인물이다. 그 인물이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1517~1586)이다.

 

심지어 “함양의 남계서원 건립에는 퇴계문인인 박승임이 참여하고 있었다. 󰡔남계서원지󰡕에 의하면 1552년(명종 7) 강익이 박승임, 노관, 정복현, 임희무와 상의하여 서원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건립 활동 / 권시용 / 한국서원학보 제8호> 하여 소고 박승임이 아무 관련도 없는 남계서원 창건공로를 다 차지하고 퇴계의 영향력으로 남계서원이 창건된 것처럼 역사를 오도하고 있다.

 

소고는 퇴계 문인인데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1495~1554)과 벼슬살이로 친하게 지낸 사이이다. 신재가 풍기군수로 부임할 때 축하시 <송주첨정경유선생출쉬기성(送周僉正景遊先生出倅基城)>을 지어 보냈고 자신도 풍기군수가 되어선 신재가 창건한 소수서원에 회헌의 화상(畫像)을 개수하고 발문을 짓기도 하였다.

 

박승원은 신재의 제자이고 신재가 청량산 유람할 때 전송한 적이 있고 박승임과 같은 반남 박씨 종친이니 어쩌면 둘이 면식이 있을 수도 있다. 남명 조식이 거창 감악산에서 목욕할 때 모시고 같이 미역감은 함양 선비는 남계오현 중 임희무와 박승원이었다.

 

박승원이 신재를 모시고 공부한 문인이니 신재의 소수서원 창건 사실을 목도하고 잘 알았을 것이다. 함양 고향에 돌아와선 함양 선비들에게 서원 일을 이야기하여 남계서원 창건 의욕을 고취시키고 같이 서원 창건을 추진한 것이다.

 

함양 선비 박승원은 천령삼걸인 옥계 노진의 절친이고 청련 이후백의 매부이다. 박승원이 먼저 별세하자 옥계는 애도의 만사와 제문을 짓기도 하였다. 박승원의 처는 수절과부로 수십년간 슬퍼하며 추모사업을 적극 추진하기도 한 열녀로 감수재 박여량의 <천령효열록>에 입전되기도 하였다.

 

개암의 조카 강위수(姜渭琇)가 개암이 흥기사문(興起斯文)과 창명유교(倡明儒敎)를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위기임(爲己任>)고 한 것은 훌륭한 표현이다. 다만 개암과 같이 서원 창건을 논의한 네 선비 이름을 나열하며 박군승임(朴君承任)이라 한 것이 남계오현 박승원을 죽인 것이다. 여기 박승임 오자는 윗줄의 위기임(爲己任)의 임자가 연상, 착각, 오자로 필사하거나 판각한 부산물일 것이다. 이 오자 1자로 인해 박승원이 남계서원 역사에서 죽게 만든 것이다. 1자의 죽음, 이것은 명백한 오자이다.

 

단지 오자 1자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오인되어 남계서원에 한 푼도 한 개도 어떠한 것도 기부하지 않고 어떠한 공헌도 공로도 심지어 함양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소고가 창건공로를 인정받는 것은 실제 창업공신 박승원이 볼 때는 매우 억울한 일일 것이다.

 

같은 남계오현 남계 임희무의 《남계집(灆溪集)》에는 강개암이 선생(임희무) 및 박승원(朴承元), 노사암관(盧徙庵祼), 정매촌복현(鄭梅村復顯)과 함께 서원 창건을 상의하였다고 정확히 기록하였다. 《개암집》만 한국문집총간에 수록되어 널리 알려지고 《남계집》은 실리지 않아 알려지지 않은 관계로 누구도 박승임이 박승원의 오자 인물임을 의심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이라도 바로잡아 남계오현 박승원의 남계서원 창건공로를 선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