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남계서원의 문헌공묘와 별묘

김윤수 성균관 부관장, 지리산문학관장, 일두기념사업회장
1. 남계서원과 광풍루
남계서원은 경남 함양에 있다. 문묘 16현의 16개 존속서원이고, 세계문화유산 한국의서원 9대서원이다.
남계서원의 주벽(主壁) 일두 정여창 선생은 동방오현, 문묘 18현이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에 희생되고 1504년(연산군10)에 순교하여 2024년이 순교 520주기이다. 절친 동문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4대사화 순교성인이며 조선 성리학의 개창자이다.
일두는 그 10년 전 1494년(성종25)에 안음현감으로 부임하여 경남 함양군 안의면 소재 관아 객사 문루인 선화루를 중창하며 광풍루로 개칭하고, 제월당을 금천 언덕에 창건하고, 광풍루와 짝이 되게 하였다. 서하 명승에 군자정을 짓고 공무의 여가에 소요하였다.
염계 주돈이의 기상을 산곡 황정견이 묘사한 광풍제월 문구에서 취하여 광풍루, 제월당이라 명명하고, 주돈이의 명작 <애련설> ‘련(蓮)은 화지군자야(花之君子也)’에서 취하여 군자정이라 이름 지었다.
올해가 광풍루 제월당 530주년이니 이를 기념하여 '광풍루(光風樓) 제월당(霽月堂) 530주년 기념 주련차운(柱聯次韻) 전국한시지상백일장'을 개최하여 작품을 공모하여 일두의 성경(誠敬)사상과 애민선정의 공덕을 기리고자 한다.
2. 남계서원과 남계오현
한국 최초의 서원 백운동서원이 창건된 지 10년 후인 1552년에 함양 선비 5인이 남계서원 건립을 주창하였다. 당시 함께 주창한 다섯 선비는 개암과 고향 친구이고, 같은 스승 당곡 정희보의 동문들이다. 남계오현이라고 칭하여 존숭하는 바이다.
남계오현(灆溪五賢)
반계(潘溪) 박승원(朴承元)[1516?~1561?] 반남(潘南)
매촌(梅村) 정복현(鄭復顯)[1521~1591] 서산(瑞山) / 영빈서원
사암(徙庵) 노관(盧祼)[1522~1574] 풍천(豊川)
개암(介庵) 강익(姜翼)[1523~1567] 진주(晋州) / 남계서원
남계(灆溪) 임희무(林希茂)[1527~1577] 나주(羅州) / 화산서원
반계, 매촌, 사암, 개암, 남계 등 남계오현이 모여 사림 최초의 서원, 남계서원 창건을 논의하여 건립에 착수하였다. 강당을 건립하다가 공사비 부족으로 중단하고 7년 뒤 재개하여 9년 만에 강당을 완공하고 사당도 세워 일두를 봉안하였다. 동서재 건립까지 모두 12년이 걸렸다.
개암이 상소하여 사액서원이 되고 초대원장이 되고 강학하였다. 강당과 협실, 동·서재 및 마루, 대문의 명칭을 개암이 명명하고 <남계서원기>를 지었다. 개암 별세 후 서원을 주관한 옥계 노진은 강당과 동·서재 명칭을 자기 나름대로 명명하여 편액을 게시하였다.
3. 남계서원의 광거당과 명성당 및 성경당
남계서원 강당명에 대하여 옥계는 맹자사상을 취하여 광거당이라 하여 인(仁)을 강조하였고, 개암은 중용사상을 취하여 명성당이라 하였다.
남계서원의 편액은 임진왜란 이후도 마찬가지로 통틀어 1574년(선조7)부터 1685년(숙종11) 이전까지는 옥계 명명의 당재 명칭인 광거당, 의방재, 경직재 등이 게시되어 있었고 숙종 중기 이후에야 개암 명명의 당재 명칭인 명성당, 양정재, 보인재 등이 게시되어 현재까지 전승되어 건재하다. 그러나 덕천서원 강당이 남명의 경의(敬義)사상을 취하여 경의당(敬義堂)이라고 명명되었듯이 일두의 사상은 성경(誠敬)사상이니 성경당(誠敬堂)이라 해야 타당하다.
일두는 박언계에게 준 서간에서 향학이성(向學以誠), 율신이경(律身以敬)이라고 강조하는 친필을 남겼고, 일두의 조카 정희삼이 지은 행장에서는 ‘범지기행사(凡持己行事)에 일이성경(一以誠敬)으로 위일용공부(爲日用工夫)라’고 했고, 서부 경남의 대표 대유 동계 정온은 일두 신도비에서 ‘일용공부(日用工夫)는 불출성경지외(不出誠敬之外)라’고 했듯이 사림은 일두의 성경사상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4. 남계서원의 문헌공묘
어떻든 개암이나 옥계나 모두 사당명은 붙이지 않았다. 동방사현이라서 사당명을 감히 붙이지 못했다는 건 억측이다. 소수서원은 주벽 회헌 안향의 시호 문성공에서 취하여 문성공묘라고 하고, 회재 이언적의 옥산서원은 회재의 인(仁) 사상을 강조하여 체인묘(體仁廟)라 하였다.
마찬가지로 동방오현의 초기 인물인 한훤당과 일두는 시호를 받은 뒤엔 똑같이 문경공묘와 문헌공묘라고 편액을 게시했어야 하는데, 없이지낸 관행으로 사당 편액 없이 이어져 온 것이다. 장성의 필암서원도 사당명이 없다가 1964년에 소장층 유학자 변시연의 주장으로 공론을 모아 우동사(祐東祠)라고 편액을 게시하였다.
남계서원도 반 천년 미완의 사업인 사당명 편액을 게시해야 할 것이다. 사당명은 옛사람들이 의례적으로 칭해온 문헌공묘가 타당하다.
나중에 사당에 배향되는 인물들, 동계나 개암은 모두 문헌공묘에 배향되었다고 하였다. 먼저 문헌공묘에 바로 배향된 것이 아니고 향현사라고 칭해지는 별묘에 제향하다가 사액서원의 위상에 맞게 임금님께 상소하여 윤허를 받아 배향하였다. 왕명을 받지 않고 임의로 배향하면 처벌되었다.
5. 옥개시비(玉介是非)
남계서원의 별묘에 최초 제향된 인물은 남계서원의 창건주 개암 강익이다. 개암을 위하여 별묘를 창건하여 향사한 것이다. 사연이 깊다. 개암과 옥계 사후 남계서원의 주도권을 두고 옥계파와 개암파가 쟁탈전을 펼친 것이다.
남계서원 창건과 운영에는 옥계 노진과 초기 원장을 돌아가며 맡은 사암 노관, 운고 노사훈, 홍와 노사예, 우계 노사상, 추담 노사개, 서간 노사회 등 풍천노씨의 공덕이 지대하였다. 남계서원터를 기부한 이도 옥계의 조카 약관 15세의 강재(剛齋) 노사준(盧士俊,1536~1566)이었다.
천령삼걸이라 불리는 옥계 노진이 별세하자 선배 갈천 임훈이 남계서원에 배향하라고 권유하였다. 경상도관찰사가 옥계는 명현이니 따로 사당을 세워 향사하라고 권유하고 건축비도 지원하였다. 그래서 추담에 있던 옥계의 서재 신의재를 강당으로 삼고 사당을 세워 옥계를 향사하였다.
선조 14년(1581) 옥계를 처음 제향할 때 옥계의 조카 홍와 노사예가 선의로 개암은 옥계의 동문이니 같이 모시자고 건의하여 개암을 옥계에 배향하였다.
호사가들은 말도 많고 탈도 많다. 당주서원에 옥계주향, 개암배향이 지속되니 개암파들이 보기에 부당하였다. 개암은 옥계보다 5세 연하이나 같은 당곡 정희보의 제자로 동문 친구인데 어찌 배향이 맞냐고 물의가 비등하였다. 배향을 병향으로 바꾸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한강 정구와 동강 김우옹의 동문병향(同門竝享)이 맞다는 의견대로 병향이 실현되었다.
정유재란에 남계서원과 당주서원이 소실되고 복원운동이 일어났는데, 주관자들이 서원의 옛터를 버리고 남계서원의 묘하서원 형식을 취하여 구라에 중창하였다. 그 옆에 당주서원도 중창하여 같은 담장 안에 사액서원인 국학의 남계서원과 향현사인 당주서원이 병립하고 편액도 옥계서원(玉溪書院)이라 칭하였다.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합천의 선비 역양 문경호는 통문을 보내 일두존숭의 의미가 퇴색하니 옛터에 각기 중건하라고 권유하여 일두가 문묘에 종사된 지 2년 뒤인 광해군 4년(1612)에 옛 터인 지금의 터에 남계서원이 중건되었다. 당주서원은 새 터에 이건하여 신계서원이 되었다. 이것이 사액을 받아 정통의 당주서원이 된 것이다.
옥계파들은 개암이 5세 연하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배웠다, 사제지간의 의리가 있으니 배향이 맞다, 병향이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함양지역사회에 개암파와 옥계파의 시비 향전이 전개된 것이다. 이것을 옥개시비(玉介是非)라고 하겠다.
6. 남계서원의 별묘
결국은 개암파가 위패를 싸들고 나가 개암의 공적이 지대한 남계서원에 별묘를 세워 따로 모시기로 한 것이다. 남계서원은 사액서원이라서 임의로 배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조 12년(1634)에 개암파 사림이 동계에게 품의하여 남계서원 문헌공묘 좌측 전사청 밖에 별묘를 창건하고 개암을 향사하였다. 그리하여 옥개시비가 잦아들었지만 꺼진 것은 아니다. 남계서원의 편액이 모두 옥계가 명명한 것이 게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숙종 중기 이후 개암이 명명한 남계서원의 편액이 게시됨으로 해서 남계서원의 주도권은 개암파가 장악하였다.
노론 세력화한 일두 후손에 의해 남계서원 묘정비가 건립되자 남인 학통을 무시한 비문으로 인해 파문이 일고 남계서원 건립공로에 개암만 강조하자 풍천노씨 측에서 불만을 품고 비문을 쪼아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옥개시비의 잔영이라고 하겠다.
동계가 별세한 지 1년 뒤 인조 20년(1642)에 일두의 동향이고 동문이며 절친인, 시서화삼절의 대시인 뇌계 유호인과 남계서원의 유사도 지내고 일두의 문묘배향상소를 서울로 모시고 가서 제출한 공이 있는, 배소(陪疏)운동을 벌인 척화파 양대신 동계 정온을 별묘에 개암과 병향하였다.
사림의 끝없는 승배(陞配)운동에 의해 숙종 3년(1677)에 동계가 승향<陞享灆溪文獻公廟>되고, 숙종 15년(1689)에 개암도 숙종대왕의 윤허를 받아 문헌공묘에 승향되어 배향<先生及桐溪鄭先生竝配于文獻公廟>되었다.
개암의 문헌공묘 승배운동을 소치재 강명세와 공동 주도한 춘와 양천익은 <개암집> 보각 사업으로도 바쁜 와중에도 남계서원 별묘에 제향되던 개암을 문헌공묘에 승격, 추향하는 것을 1689년(숙종15) 9월에 상소하여 윤허 받았다. 상소문은 개암 방손 소치재 강명세가 지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토록 갈망하던 문헌공묘 개암 배향 숙원사업이 우암 송시열이 사사되고 석 달 뒤 기사환국(己巳換局)의 남인 집권 때 이루어진 것이다.
개암과 동계의 승배 이후 별묘에는 뇌계만이 남았다. 영조 20년에 별묘를 중수하였다. 제5대 남계서원 원장을 지낸 홍와 노사예(1538~1594)의 제자이며, 일두 종통을 지킨 일두 제4대 종손 송탄 정홍서(1571~1648)를 순조 20년(1820) 별묘에 제향하였다.
7. 남계서원의 별묘 복원 촉구
별묘에 모셔지면 향현사로 타치대상이 되기도 하고 사액서원 사당에 제향되면 국학으로 노타치대상이 된다. 성균관 문묘 제향의 지위와 특권을 나름 누렸다.
남계서원의 문헌공묘는 문묘 16현 서원이라서 존속되고 별묘는 향현사라서 1868년(고종5) 서원훼철령 때 철거되었다. 다른 향현사들이 거의 다 복원되는데 남계서원 별묘가 빈터로 남아 있는 것이 안타깝다. 별묘가 복원되면 남계서원의 유적이 늘어나고 활동이 더욱 다채로울 것이다.
함양군 수동면에만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 서원이 네 개 있다. 회헌 임대동의 화산서원, 일두 정여창의 남계서원, 탁영 김일손의 청계서원, 남계 표연말의 구천서원이다. 별묘가 복원되어 뇌계 유호인의 제향이 복구되면 점필재의 함양 5대 제자의 서원 제향인물이 150여 년 만에 완성되는 것이다. 임대동, 유호인, 정여창, 김일손, 표연말이다.
일개면에 사림파의 종장 점필재의 5대 제자가 향사되는 서원이 4개가 있다는 것이 대단하지 않은가. 영남 사림파의 자랑스런 표상이 될 것이다. 뇌계 유호인을 향사하는 남계서원 별묘를 조속히 복원하기를 촉구한다.
아울러 함양 정신문화의 삼대원천인 고운 최치원<최치원역사공원>, 점필재 김종직, 연암 박지원<연암기념관>에서 함양 5대 제자의 스승인 점필재 김종직을 향사하는 백연서원이 복원되어 영남 사림파의 종장 사제지간의 역사문화유적이 나란히 광망을 발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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