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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시론

<특별기고> 정월 대보름엔 왜 오곡찰밥을 먹는가?

사금갑(射琴匣)과 오기일(烏忌日)에 얽힌 정월대보름 설화

오흥녕
2024.02.16·4분 읽기·조회 105

 

김영진 사천향교 교화수석장의

 


 

정월대보름은 설날 이후 처음 맞는 보름날로 ‘까마귀에 제사 지내는 날’이라 하여 오기일(烏忌日)이라고도 부른다. 공휴일이 아니어서 다른 명절에 비해 관심이 좀 적겠지만 사실 정월 대보름은 한자로 상원(上元)이라 하여 설날보다 더 성대하게 지냈던 명절이었다. 원래는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15일간이 축제일이었으며, 이때는 빚 독촉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좀 더 먼 옛날엔 정월 대보름을 한 해의 시작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하는 설도 있다.

 

정월 대보름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오곡찰밥일텐데, 왜 하필 오곡찰밥을 먹는가에 대해 전해오는 설화가 하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제1권 기이(紀異)1 사금갑(射琴匣) 조에 의하면, 신라 제21대 비처왕(또는 소지왕)이 정월 대보름에 천천정(天泉亭)으로 거둥하기 위해 궁을 나섰는데, 갑자기 까마귀와 쥐가 시끄럽게 울었고, 쥐가 사람의 말로 왕에게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옵소서’라고 했으며, 임금은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쫓아가게 하였다.

 

까마귀를 따라가다가 어느 연못에 다다랐을 때 못 둑 아래에 두 마리의 멧돼지가 싸움을 하고 있어 그걸 구경하느라 기사는 그만 까마귀의 정체를 놓쳐 버리게 되었는데, 조금 있으니 연못 서출지(書出池, 현 경주시 남산동 소재)에서 한 노인이 솟아올라 물 위로 걸어 나와 기사에게 한 통의 편지를 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런데 그 봉투에는 ‘개견이인사 불개일인사(開見二人死 不開一人死,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기사가 돌아와 편지봉투를 바쳤는데, 임금은 난감하여 생각하다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단 한 사람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편지를 읽지 않고 태우려 했는데, 옆에 있던 일관(日官, 천문관측과 점성을 담당한 관리)이 아뢰기를, ‘전하, 두 사람이라 함은 보통 사람(庶人)을 이름이고, 한 사람이라 함은 하늘에 태양이 하나이듯 1이라고 하는 숫자는 나라에 임금님이 한 분이니 바로 전하(임금님)를 말하는 것일지 모르오니 편지의 글을 읽으소서’라고 했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임금은 편지의 글을 읽어 보니 사금갑(射琴匣, 거문고 갑을 쏘시오)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임금은 곧 환궁하여 처소에 있던 거문고 갑을 끌어내어 활로 쏘게 하고 열어보니 두 사람이 활에 맞아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들은 상간(相奸)하던 궁주(宮主)와 분수(焚修)하는 중으로 임금을 해치려 했고, 그 중은 고구려에서 보낸 첩자였음이 밝혀졌다.

 

그 때부터 정월 대보름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오곡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생겼다고 하는데, 까만 오곡밥이 까마귀를 연상시킴은 물론 지붕 위, 담장 위, 나뭇가지에 얹어 까마귀들이 물고가기 쉽게 찐득한 찰밥을 해서 까마귀에 보은했다고 한다.

 

따라서 정월에는 이 짐승들 이름이 들어가는 첫 번째 날, 즉 쥐(上子), 돼지(上亥), 말(上午-烏의 同音)의 날에는 특히 조심하고 근신하는 날로 지켜오는 세시풍속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런 기원을 제대로 알고, 다가오는 올해 정월 대보름에는 오곡밥과 각종 나물, 부럼으로 겨우내 부실했던 몸의 건강을 추스려 갑진년 새봄의 힘찬 출발을 기원한다.

 


 

 

신라 소지왕의 목숨을 구한 설화의 무대 '서출지' 연못의 모습이다.